렛잇고 02.
긴 추석연휴에 모처럼 햇살이 좋아서 대학생 때 이런저런 추억이 방울방울 떠올라서 조금 더 끄적여본다.
1. 과 꼴찌
1학년 끝자락에 나는 내가 우리 과 꼴찌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고등학교도 아니고 과 전체 학생들의 성적이 공개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았는가 하면……
1학년때는 전공과목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학부’ 소속인 형태였다. 1학년 성적을 토대로 2학년 때 원하는 과를 지원하는 시스템이었는데 당연히 성적순으로 배정됐다. 단, 수시로 입학한 나는 예외였다.
수시도 전형별로 입학타입이 달랐는데 운이 억세게 좋은 건지, 내 전형은 수능점수가 필요했던 조건부 수시였기에 나는 ‘과가 확정되어 입학하는 수시전형’이었다.
다만 그동안 수시생과 정시생간의 수준차이가 많이 난다는 원성? 이 자자해 내가 입학한 해에만 수시생들의 수능 조건부 기준이 예전보다 상향되었다. 그 결과 조건부 기준을 넘지 못한 탈락자들이 우수수 발생했고 그나마 조건을 넘은 학생들은 아마 더 상위대학, 상위 학과에 지원했던 걸까? 해당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은 30명 중 단 3명이었다.
그 3명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더 럭키비키 했던 점은 내가 소속된 과가 우리 학부 소속 5개 과중에 학점 커트라인이 제일 높은 최인기 학과였다.
그러다 보니 동기들은 1학년 때 앞으로 우리 과에 배정되기 위해 학점을 잘 따기 위해 노렸했지만, 이미 강 건너 안전지대에 있었던 나는 좀 태평했다.
1학년 말이었나, 지도교수님이 나를 호출하셨다. 가보니 교수님이 우리 과 올해 배정 커트라인은 OO점인데 너의 학점 평균은 XX점이라고 하시며, (당연히 커트라인 기준 학점보다 훨씬 낮았다)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하라며 따끔한 경고를 날리셨다.
어? 그럼 나머지 2명은 어떻게 된 거지? 싶었는데 그 비밀도 나머지 2명이 성적우수 장학금 대상자라는 말에 금방 풀렸다. 그 말인즉슨 그 둘은 학점 상위 3등 안에 들었다는 소리였고 교수님이 특별히 ‘나만’ 불러서 경고를 주신대는 이런 배경도 한몫한 것 같았다.
교수님 방을 나오자 갑자기 복도에서 창피함과 수치심이 밀려왔다. 단순 경고가 아닌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수시에서 너를 안 뽑았다’는 다소 모욕적인 말까지 듣고 나니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울다 보니 감정이 격해서 단과대 복도 벤치에 앉아 본격적으로 엉엉 울고 있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동기가 날 발견하고 자초지종을 묻자 울먹울먹 자초지종을 말했다. 떠듬떠듬 말했지만 결국 팩트는 ‘나 과 꼴찌했어 엉엉. 교수님이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하래. 엉엉.‘
갑자기 우연히 그 앞을 지나다 날벼락을 맞은 동기는 갑뿐 꼴찌 커밍아웃에 당황했겠지만 앞으로 잘하면 될 거라고 어른스럽게 위로해 줬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귀엽다.
그깟 잔소리 좀 들었다고 서럽게 울던 스무 살의 나.
귀엽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모욕적이고 더 기상천외하고 해괴하고 상처되는 말들을 들을지 상상도 못 했던 그때의 내가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난다. 선생님한테 혼났다고 엉엉 울던 스무 살의 나.
그때 각성한 건지, 2학년 때는 제법 학점 관리에 신경을 쓰고 공부도 열심히 한 것 같다. 유독 2학년 1학기, 2학기 학점이 제일 좋은 것이 귀욤 포인트다.
좀 맹해서 공부는 못했지만 순진했던 스무 살의 나.
2. 동아리 면접 탈락
어리버리했던 1학년 1학기 새내기 끝자락쯤, 친구들이 하나 둘 동아리를 가입하기 시작했다. 나도 뭐라도 해보고 싶어서 기웃거리던 중, 그때 한창 선호도가 높았던 광고 동아리에 눈에 들어왔다.
중앙 동아리여서 그런지 인기가 많았다. 가입원서만 내도 웰컴이요, 했던 다른 동아리들과 달리 면접을 보고 합격해야 가입이 됐다.
설마 떨어지겠어? 싶은 마음에 면접장으로 갔지만 보기 좋게 똑 떨어졌다. 심지어 같이 지원한 동기는 붙었는데 나만 떨어졌다. 제기랄.
면접 마지막 공통 질문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자신을 사물에 비유하면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런류의 질문이었던 것 같은데 돌이켜보면 내 대답은 평범했나 보다. 광고 동아리이니 창의성, 참신함 같은 것을 봤던 것 같은데 내 대답은 그냥 soso 했던 것 같다.
대학생활의 낭만이라는 동아리까지 똑 떨어지다니.
내 참.
학부에도 겉돌았던 나는 소속감을 느낄 동아리도 없어져 1학년 때 더 밖으로만 돌았던 것 같다. 다행히도? 2학년 때 당시에는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인지도도 거의 전무하고 지원서만 내면 웰컴이었던 봉사동아리에 가입해 무소속 상태에서 벗어났다.
참 인간사 알 수 없는 것이 내가 가입한 동아리는 훗날 듣보잡 신생에서 위풍당당 중앙동아리로 거듭났다. 개인 스펙에 봉사활동도 중요한 비중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엄청난 인기 동아리가 됐다. 면접이 열기도 대단하고 가입 경쟁이 치열하다는 후배들에 전언에 웃음만 난다. 얼결에 초기에 들어가 ’원로‘ 취급을 받는 요즘을 보면 인생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얼래 벌래 들어간 그 동아리에서 첫사랑도 만났다. 아기자기하고 로맨틱한 캠퍼스 첫사랑의 추억이면 참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본인이 알파남임을 충분히 자각하고 그걸 충분히 즐길 줄 아는 바람기 있는 거지 같은 놈이었다는 사실이 반전이라면 반전이지만.
거지같았던 첫사랑 썰도 좀 써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