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잇고. 01
두 번째 스무 살이라는 마흔을 목전에 두고 그간의 인생을 조금씩 반추해 본다.
최근 대학평량평균을 알아볼 일이 있어 학사 포털에 접속해 성적조회를 했다. 총학점은 딱 평균이다. 4.5점 만점에 3.7점 정도.
예전 같았으면 평량평균 점수만 빠르게 확인하고 포털을 나왔을 텐데, 이상하게 시간 여유가 좀 있어 학점 하나하나를 찬찬히 살펴봤다.
이제까지 나는 대학 때 공부를 열심히 안 해서, 소위 학교를 좀 설렁설렁 다녀서 학점이 높지 않은 거라 생각해 왔는데 ‘그건 순전히 나의 착각이었나?’ 싶은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천천히 그간의 행적을 살펴보니 아무래도 이건 공부를 대충 한 것이 아니라 영 ‘못한 것’에 가까운 것 같았다.
이중전공도 하고, 계절학기도 열심히 수강하고, 교환학생도 다녀오고. 분명 학업에 손을 놓은 것이 아닌데 돌이켜 보니 공부 방법을 몰랐나? 싶기도 하고 공부의 목적이나 방향성이 없네? 뭘 하고 싶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적 우수 장학금도 4년 내내 딱 1번, 그것도 등록금의 1/3 변제받은 게 다였다. 나는 내가 늘 상위권인데, 그냥 마음을 좀 안 먹어서. 중상위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나름의 노력을 했어도 영락없는 중위권. 그런데 왜 그렇게 착각했을까?
대학교 1학년. 나는 자발적, 비자발적 아싸였다.
운이 좋았던 걸까? 나는 학교에서 기대하는 유망주가 아니었음에도 덜컥 혼자 SKY에 붙었다. 수도권에 작은 여고에는 졸업식 날 대문짝만 한 플랜카드에 내 이름 석자가 자랑스럽게 휘날렸다.
전국에 공부 잘하는 똑똑이들이 다 모여서일까? 유난히 현역의 입학비율이 적어서였을까? 우리 과는 고작 30명 정도였는데 돌이켜보면 현역은 30%도 안 됐다. 그것도 나 같은 일반고 출신보다 특목고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개천용으로 혼자 입학한 나와달리 이미 같은 학교 출신, 동문 선배들이 쭉 포진해 있던 아이들은 어딘가 여유로웠다.
스타일들은 어찌나 세련되었던지.
시험 마치고 가끔 시내에 나가서 친구들이랑 영화 보고 용우동가서 밥 먹고 지하상가에서 옷 사 입던 나와는 다들 차원이 다른 세련된 멋들 이 있었다.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는데 성비가 거의 8:2 수준이었다.
여초집단의 특징은 기본적으로 무리 플레이를 하는 여왕벌들이 꼭 있다는 점이다. 당연히 목소리 크고 걸출한 여왕벌들에게 아직 촌티를 못 벗은 부끄럼쟁이였던 나는 무리의 포섭 대상이 아니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낯가림과 수줍음이 좀 심했다. 거기다 서울깍쟁이들에게 기 까지 죽은 상태였으니 나는 당연히 친구 사귐에 소극적이었다. 지방에서 혈혈단신 올라온 친구들은 ‘기숙사’라는 매개체가 있어 금방 무리가 되는 듯했는데 집을 나오기도, 안 나오기도 애매했던 수도권에 사는 나는 편도 2시간, 왕복 4시간 거리 통학러여서 그 무리에도 끼지 못했다.
그리고 늘 귀소본능에 시달렸다. 어둠이 내리고 조금만 늦어지면 ‘어디냐, 언제 오냐’라는 부모님의 성화에 친목 술자리에서도 늘 전전긍긍했다. 술이 약해 이 쓴 것을 도무지 왜 먹는지도 모르겠고, 선배들과 어색하고 뻘쭘한 분위기가 싫어 그마저도 점점 피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하이에나처럼 혼자 다녔는데, 정작 나는 괜찮았다. 일단 원하던 학교에 입학했다는 사실에 도취되어 있었다. 또 굳이 친구들이랑 어울리지 않아도 대학생에게 주어진 자유는 야간자율학습까지 빡빡하던 고등학생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다니다 보니 외톨이들끼리 또 자연스럽게 무리가 되어 밥도 같이 먹고 수업도 같이 듣는 친구들도 생겨 그럭저럭 다녔던 것 같다.
무엇보다 과외를 하며 태어나 처음 버는 돈 쓰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다 보니 학업은 뒷전이었고 첫째였던 내게 대학 생활의 모습을 말로나마 귀띔해 줄 지인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내키는 대로 설렁설렁, 조금은 야무지지 못하게 대학생활을 했는데 그 결과가 바로 포털에 그대로 학점으로 박제되어 눈앞에 있었다.
앞으로 누군가에게 ‘공부를 안 했다.’가 아니라
‘대학 때 공부 못했어요.’라고 말해줘야 할 것 같다.
그냥 그게 맞는 것 같다.
두번째 스무살쯤에 드디어 자기객관화가 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