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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석 Jan 01. 2024

지극히 이기적인 하루

01.

 2023년 마지막날, 잠들기 전 집 근처 새해 일출 시간을 검색했다. 7시 50분가량이었나. 이 정도면 7시에 일어나 집 뒤편 산자락에 올라 해돋이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람을 맞추고 잠자리에 들었다.


 새해에 뽀송한 이불을 덮고 자겠다고 야심 차게 침대시트를 세탁했지만 건조 시간 계산이 영 잘못됐다. 밤이 깊어도 여전히 축축한 시트를 만지며 그냥 시트 없이 잠자리에 들었더니 영 깨끄름한 것이 깊이 자지 못하고 계속 뒤척거렸다. 설상가상으로 요 며칠 계속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여지없이 새벽에 깨 화장실에 다녀왔다. 안 되겠다 싶어 기어이 장롱 구석에 있던 여분의 침대 시트를 꺼내 새벽 네시에 침구 정리를 다시 했다. 그제야 안정감이 들어 꿀잠을 자고 눈을 뜨니 8시. 새해 일출은 물 건너갔다.


  괜찮다. 그까짓 일출 따위 못 본 것이 대수랴. 해는 내일도 뜨고 모레도 뜬다.


 몇 년 전에는 새해를 가열차게 시작해 보고자 절친과 새벽녘 근교 해돋이 명소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산자락을 나처럼 부푼 열망을 가진 부지런쟁이들과 함께 올랐다. 산 정상에 도착해 보니 더욱더 인산인해라 깨끔발을 겨우 하고 떠오르는 해 한 조각을 보았다. 좁은 산 정산에 엄청난 인파가 모여 있어 자칫 발이라도 헛디뎠다가는 여지없이 황천길로 직행할 것 같아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 와중에 그 지역 국회의원이 준비한 소원 풍선도 다 같이 흔들며 사진도 찍어야 해서 좀 피곤했다.


 그렇게 부지런을 떨었건만 딱히 그 해가 운수 대통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산길에 평소라면 붐벼 멀리했던 카페에서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조용히 마셨던 모닝커피가 기억에 남는다. 예쁜 잔에 담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호로록 불어 마시며 속으로 앞으로 남들 다 간다고 굳이 해돋이 명소에 힘들게 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중요한 것은 새해에도 잘 살아보겠다는 마음가짐이니까. 이왕이면 내 몸 편한대서 조용히 맞으리라.


 일출은 물 건너갔지만 떡국을 끓였다. 부모님은 매번 소고기를 듬뿍 넣어 끓여주셨는데 나이가 들수록 고깃기름이 영 느끼하게만 느껴져 나는 고기 없는 담백한 떡국을 좋아한다. 다시 국물에 내 입맛대로 떡과 간장, 소금, 파를 넣고 마지막에 계란물을 후루룩 둘러 떡국 한 그릇을 뚝딱 끓였다. 소박하지만 내 입맛에는 더할 나위 없이 맛있는 떡국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 먹은 것을 정리하고 서둘러 외출 채비를 한다. 집 뒤편 산책로를 따뜻한 햇볕을 맞으며 어서 걷고 싶어 마음이 급했다. 날이 많이 풀려서 그런지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1번 왕복에 20분. 평소라면 1번만 걷고 금방 꾀가 나고 집에 가고 싶어 했는데 오늘은 컨디션이 좋아서 가뿐히 2번 왕복했다. 음악 듣는 것도 성가셔 그저 떠오르는 생각들을 아무렇게나 하며 마음 편히 걸었다. 상쾌한 공기가 폐로 들어오는 것 같아 기분이 참 좋았다.


 돌아와 본가에 다녀온 동생을 마주하러 용산역에 갔다. 새해에는 집에서 조용히 쉬고 싶다고 하니 부모님이 조금 서운해하시는 것 같았는데 동생이라도 다녀와서 다행이다. 내 몫까지 효녀 노릇을 하고 온 동생에게 맛있는 점심과 커피를 샀다. 이제 곧 대학원을 졸업하고 진정한 독립을 준비하는 동생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고, 이번 주말에 우리 집 근처에서 같이 집을 보러 다니기로 했다. 처음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동생과 함께 살면 어떻냐고 부모님이 살짝 물어보셨는데 단호히 거절했다.


 나만의 온전한 공간이 필요했고, 동생에게는 동생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와 지혜를 터득할 경험이 필요하다. 경험은 무조건 실전이다. 집도 구해보고 본인 명의로 대출도 알아보고, 그러면서 한 뼘 성장하는 것이라고 부모님께 말하니 그러마 하시며 더 이상 권유하지 않으신다. 그동안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부모님과 일정한 거리 두기를 하고 있다. 아마 부모님은 속으로는 못내 서운하게 느끼실 수 있으실 테지만 그간 나는 K-장녀로 부모님의 그늘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받아 내 삶을 단단히 건사하지 못했다.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어도 현재는 나를 위한, 멀리 보면 우리 가족 모두를 위한 방향이라 생각한다.


 귀가해 집안 정리를 위해 배송시킨 물건들을 까서 정리했다. 정리를 위해 정리물품들이 필요한 아이러니지만 이렇게라고 패킹해 두어야지 방심하면 온갖 살림살이들이 민낯을 드러낸다. 즐겨보는 정리 콘텐츠에 출연하시는 분들처럼 야무지게 살림하고 삶의 질서를 만들고 싶지만 내 몫에서 할 수 있는 정도만 욕심내기로 했다. 지레 겁먹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더욱 경계하고, 조금 부족하고 서툴러도 계속해야지. 설사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꾸준히 하는 마음을 더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물론 삽질에 따른 시간과 비용 손실은 나같이 지갑이 얇은 월급쟁이에게 매우 뼈아픈 일 이지만 실패에서도 항상 무언가를 배운다는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는다. 그래도 이왕이면 올해는 실패 비용은 최소한으로 지출됐으면 좋겠다. 몇 년째 제자리 걸음인 월급에 비해 물가가 너무 올랐다.


 저녁으로 오랜만에 주특기인 애호박명란 파스타를 만들어 순식간에 게눈 감추듯 먹었다. 주특기라고 하나 가끔 양 조절에 실패하면 너무 느끼하거나, 과하게 짜거나 면이 설익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오늘은 모든 것이 퍼펙트했다. 식후 빨래를 게어넣고 얼굴을 말끔히 씻고 책상에 앉았다. 새해에 목표가 있다면 매일매일 나를 위한 2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올 4월에 있을 자격증 시험공부와 회사에서 내 몸값 향상을 위한 영어공부가 메인이 되겠지만 집중이 안되거나 컨디션이 안 좋다면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하다못해 음악을 듣거나 명상을 하거나 기타 등등. 정말 온전히 나를 위한 방해받지 않는 시간을 많이 가지고 싶다. 오늘은 자격증 준비를 위해 코딩 관련 기초강의 3개를 들었다.


 브런치 글쓰기도 다시 시작해 본다. 나를 위한 글을 쓰고 싶다. 이번에는 조회수와 구독자수, 공모전, 출간 제안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즐거움을 온전히 느끼리라 마음에 새긴다.


 2024년 1월 1일. 한줄 평


 지극히 이기적이었고 그래서 더할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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