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

1편 : 과도한 경쟁

by 채현

한국 교육에 대한 대표적 비판 가운데 하나는 “과도한 입시 경쟁”이다. 경쟁은 피할 수 없다. 지구상 어떤 생명체도 경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희소 자원의 배분은 반드시 경쟁을 낳는다. 그러나 경쟁은 단순히 자원의 부족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 자체에서도 발생한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을 넘어 인정과 지위를 추구하며, 사회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서열을 만들고 제도를 통해 경쟁을 재생산한다. 따라서 한국의 입시는 정원이 적기 때문 만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요인 속에서 필연적으로 격렬해지는 것이다.

물론 자원의 배분 방식이 반드시 경쟁일 필요는 없다. 혈통에 따른 신분적 배분도 오랫동안 인류가 채택해 온 방식이었다. 왕의 아들이 왕이 되고, 의사의 아들이 의사가 되며, 농민의 아들이 농민이 되는 사회에서는 경쟁이 줄어든다. 그러나 이러한 신분적 배분 대신 모든 이가 경쟁에 참여해야 하는 사회라면, 특히 희소 자원이 인구에 비해 부족한 경우 경쟁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은 서구에 비해 자원의 절대량이 작은 사회이므로 교육에서의 경쟁은 더욱 격렬할 수밖에 없다. 경쟁은 반드시 부정적이지 않다. 경쟁은 진화와 혁신을 낳는다. 그러나 과도한 경쟁은? 단어 자체에 이미 부정적 어감이 들어 있다. 개인과 사회에 해를 끼치는 과열된 경쟁을 뜻한다. 문제는 “과도함”의 기준이 무엇인가이다.



주관적 과도함

셀리그먼(Martin Seligman)의 무기력 학습(learned helplessness) 이론은 반복된 실패 경험 속에서 인간이 “어차피 안 된다”는 무력감을 학습한다고 설명한다¹. 앳킨슨(John W. Atkinson)의 성취동기 이론 역시 성취 기대치가 낮아지고 성과의 가치가 희미해질 때 인간은 더 이상 도전하지 않는다고 보았다². 일반적으로 노력에 비해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과도한 경쟁이라 부른다. 그러나 노력의 수준은 사람마다 달라 객관적으로 판별하기 어렵다.

셀리그먼의 실험은 개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여 회피 불가능한 상황을 반복한 뒤, 이후 상황에서도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 행동을 관찰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실험은 극도의 신체적 고통과 공포를 전제로 한 것이며, 교육의 실패 경험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맥락에 있다. 또한 셀리그먼의 가정에는 학습을 노동, 성과를 결과물로 보는 서구적 교육관이 전제되어 있다. 이는 문화적 다양성을 무시한 것이다. 반대로 반두라(Albert Bandura)의 자기효능감(self-efficacy) 이론은 실패 경험이 반드시 무기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적절한 피드백과 지지가 주어질 경우 성취 동기와 자기조절력이 오히려 강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셀리그먼의 실험은 인간의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과소평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객관적 과도함

주관적 기준의 모호함을 보완하기 위해 학계는 여러 객관적 지표를 제시해 왔다.

① 학습시간 기준
OECD PISA 연구에 따르면 정규수업 외 하루 4시간 이상의 추가 학습(사교육·자율학습 포함)을 지속할 경우 학업 성취도는 더 이상 증가하지 않고, 수면 부족과 스트레스가 급격히 늘어난다³. 따라서 하루 4~5시간 이상의 추가 학습은 청소년에게 과도함의 임계치로 언급된다.

② 경쟁률 기준
성취동기 이론에 따르면 합격 확률이 20% 미만(=경쟁률 5:1 이상)일 때 학생들은 그 상황을 노력의 장이 아니라 운에 좌우되는 장으로 인식하게 된다⁴. 이 시점부터 경쟁은 자기조절력을 기르는 기회가 아니라 무력감을 학습시키는 조건이 된다.

③ 정신건강 지표 기준
WHO 및 국내 청소년 연구에 따르면 전체 학생 중 20~25% 이상이 만성적 불안과 우울을 경험하는 경쟁 구조는 과도하다고 평가된다⁵. 한국의 청소년 지표는 OECD 평균과 비교할 때 훨씬 심각하다. 전체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약 24.8명으로 OECD 평균(약 10.7명)의 두 배를 넘으며, 청소년 자살률도 11.7명에 달한다. 소아·청소년 정신장애 평생 유병률은 16.1%, 현재 유병률도 7.1% 수준이다. 이는 열 명 중 한두 명의 학생이 현재 정신적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뜻한다. 결국 한국의 경쟁은 단순한 피로감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적 정신건강 악화를 야기하는 구조적 문제로 나타난다.



학습시간과 경쟁률의 과도함

학습시간이 길면 “과도한” 것이 된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학습은 고통 또는 노동이라는 시선이다



학습은 고통인가?

교육을 고통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철학적 전통과 제도적 현실 두 층위에서 형성되었다.

① 철학적 비판
프로이트 이래 알튀세르와 부르디외에 이르기까지 교육은 억압과 폭력의 구조를 품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교사는 종종 학생에게 저항과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죽이고 싶은 존재’로 경험된다. 교사는 오이디푸스의 또다른 아버지이기 때문이다⁶.

② 제도적 맥락
왜 서구는 긴 학습시간을 과도함으로 정의했는가? 이는 근대 서구 교육의 목적과 관련이 깊다. 서구의 대중교육은 산업화·군사화를 위한 훈련 체제로 발전했으며, 공장에서 기계 조작법을 이해하고 전쟁에서 명령을 따르는 국민을 양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훈련은 노동의 연장이며, 수당 없는 추가 노동은 곧 “과도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교육을 고통과 노동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학습을 행복한 삶을 향한 실천적 지혜(phronesis)의 축적이라 보았고, 루소는 아동의 호기심을 존중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설명했다. 존 듀이(John Dewey)는 학습을 경험을 통한 성장으로, 피아제(Jean Piaget)는 발달 단계에 따른 능동적 탐구로 이해했다.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의 플로우 이론은 학습이 몰입을 통해 즐거움과 자기실현을 제공한다고 보았다. 동양에서도 공자는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라 하여 학습의 기쁨을 강조했다. 교육은 본능으로는 얻을 수 없는 즐거움을 익힐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결국 학습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나 노동에만 환원되지 않으며, 과도함의 원인은 학습 자체보다 사회적 맥락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정말 한국 학생의 학습 시간은 과도한가?

한국 학생들의 학습량이 과도한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국제적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서구 엘리트 교육과 비교해 보았다.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는 전 세계 140여 개국에서 운영되며 만 16~19세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2년 과정이다. 과목별 주당 수업은 4~6시간, 시험 대비 자율학습을 포함하면 하루 2~3시간 정도로 한국 학생들의 총 학습시간과 유사하지만, 선택과 집중이 특징이다. 미국의 AP(Advanced Placement)는 고교에서 대학 수준 과목을 선택적으로 이수하는 제도로, 3~5개 과목을 이수하는 학생은 주당 10~15시간의 추가 학습을 요구받는다. 영국의 A-level 과정 역시 소수 과목을 선택하여 2년간 심화 학습을 진행한다.

이를 종합하면 한국 일반 학생의 학습시간은 IB·A-level·AP 과정을 이수하는 서구 엘리트 학생들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많다. 그러나 서구는 소수 엘리트에게만 고강도 학습을 집중시키는 반면, 한국은 대중 전체에게 동일한 강도의 학습을 강요한다. 그 결과 서구의 대중교육은 교양과 시민적 소양 중심으로 유지되지만, 한국의 대중교육은 엘리트 훈련 모델이 일반화되어있어 서구 대중 교육에 비해 “과도하다”라는 평가를 받는다.




정신건강으로 본 과도함

WHO 및 국내 청소년 연구에서는 전체 학생 중 20~25% 이상이 만성적 불안·우울을 겪고 있다⁵. 이것은 한국의 과도한 경쟁이 학습을 병리적으로 만든다는 증거로 흔히 해석된다.

분명 객관적이며 분명한 신호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학습의 문제인가?”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학습이 우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바라보는 어른의 시선이 우울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

쉽게 던지는 “너 몇 점이니?”, “너 몇 등이니?”라는 질문은 긍정적일 수 없다. 이 질문은 낙인과 모멸을 위해 사용될 뿐이다. 아이의 노력의 과정, 성장의 기쁨을 무시하는 질문이다. 아이에게 두려운 것은 학습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어른의 시선일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을 괴롭게 하는 것은 성적에 따른 낙인과 차별이 아닐까? 10점 맞는 아이가 나름 노력하여 20점이 된다면, 그 자체로 함께 기뻐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잘못된 노력에는 비난 대신 바른 방법을 알려주고 응원한다면, 학습은 괴로운 것이 아니라 성장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반두라(Albert Bandura)의 자기효능감 이론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성장과 학습이 우울을 만든다고 단정할 수 있겠는가?



결론

“과도한 경쟁”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현실 묘사를 넘어 담론적 장치로 작동한다. 배움의 즐거움과 과정의 성취는 이 표현 속에서 사라진다. 학습은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남긴다. 따라서 학습을 ‘과도하다’고 규정하는 순간, 교육의 본질은 놓쳐버린다. “과도함”이라는 언어는 휴머니즘을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경쟁을 은폐하고 배제를 정당화하는 장치로 기능해 왔다. 경쟁은 결코 줄지 않았다. 다만 은폐되었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배제되었으며 다른 누군가는 이익을 얻었다.

다음 글에서는 묻고자 한다. 경쟁은 실제로 줄어든 것인가, 아니면 교묘히 은폐된 것인가. 그 은폐 속에서 누가 배제되고, 누가 이익을 얻었는가. 이는 단순한 교육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공정성과 민주주의를 평가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주석

1. Seligman, M. E. P. (1975). Helplessness: On Depression, Development, and Death. San Francisco: W.H. Freeman.

2. Atkinson, J. W. (1964). An Introduction to Motivation. Princeton: Van Nostrand.

3. OECD. (2013). PISA 2012 Results: Ready to Learn. Paris: OECD Publishing.

4. Atkinson, J. W. (1964). An Introduction to Motivation. Princeton: Van Nostrand.

5. WHO. (2014). Health for the World’s Adolescents: A second chance in the second decade.

6. Geneva: World Health Organization. /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2021). 청소년 인권실태조사.
7.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금지와 규율의 원천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교사는 학생에게 억압과 저항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존재라는 점에서 비유적으로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