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 경쟁적 분화에서 선택적 분화로
경쟁 자체를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경쟁의 원인이 자원과 인구수 간의 괴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자원을 증가시키지 않는 한 경쟁은 결코 감소할 수 없다.¹ 경쟁이 사회 유지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한 경쟁은 감소할 수 없다.
다만 경쟁을 감소시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수는 있다. 첫째는 경쟁 자체를 은폐하는 것이고, 둘째는 경쟁 방식을 다양화하는 것이다. 한국 교육은 이 두 가지 방식을 번갈아 적용해 왔다. 즉, 우리는 경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경쟁을 감추거나 바꾸는 방식으로만 다루어왔던 것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시험을 없앤 것은 경쟁을 줄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은폐다. 시험의 본래 목적 중 하나는 지금 자신의 역량과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회를 빼앗기면 학생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조차 알기 어렵다.²
물론 모든 아이가 똑같은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니다. 충분한 관심과 경제력이 있는 가정의 학생들은 사교육이나 별도의 진단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고, 적절한 보충 교육을 받을 수 있다.³ 하지만 그런 배려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자신이 어디서 막히는지, 무엇을 잘못 이해했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고학년에 이른다. 그리고 드디어 숫자로 표시되는 경쟁에 직면했을 때, 지금까지 쌓인 차이가 한순간에 드러나며 역전의 가능성은 거의 사라진다.
학생의 상태를 가려내지 않으면 경쟁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진짜 경쟁의 해소가 아니라 숨김일 뿐이다. 본질적 치료가 불가능한 병에 마약을 투여하는 것과 같다. 순간 고통은 줄지만, 진단과 회복의 기회는 영영 사라진다.
이 마약이 누구에게 결정적 피해가 된 것인지는 통계로 확인할 수 있다.
PIRLS(초4 읽기): SES 상위 25% 학생은 하위 25%보다 평균 100점 이상 성취 높음.¹⁶
TIMSS(초4 수학·과학): SES 상·하위 집단 간 성취 차이 약 60~80점.¹⁷
KELS(한국교육종단연구, 초4→중3→고3 추적): 초등학교 4학년부터 SES와 국·수 성취 간 상관계수 0.3~0.4 수준.¹⁸
전국학업성취도 평가(초6): 상위 SES 학생이 하위 SES 학생보다 국·수·영에서 평균 1~1.5등급 높음.¹⁹
OECD PISA: 상위 SES 학생은 하위 SES 학생보다 평균 약 90점 높음, 이는 2~3년 학업 격차에 해당.²⁰
→ 초등학교 시점부터 SES 격차는 이미 분명하며, 학년이 올라갈수록 격차는 확대된다.
물론 이러한 차이를 줄이려는 국가의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초학력 보장제도, 두드림학교, 방과 후 돌봄 교실 같은 제도는 바로 이런 격차를 메우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문제는 항상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든다.
100점 만점 체제에서 점수로 서열화하던 방식을 등급제로 바꾼 것(9등급제, 이후 5등급제)은 처음에는 내신 경쟁을 완화하겠다는 목표에서 시작되었다.⁴ 그러나 과연 등급제는 경쟁을 줄였는가?
현행 5등급제에서 ‘내신 올1’은 과목 수와 상관 구조에 따라 수천 명(대략 4천~6천 명대)이 형성된다.⁵ 한국처럼 대학과 학과가 서열화된 상황에서, 이 수천 명을 내신만으로 변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대학은 수능, 비교과, 면접, 논술 등 추가적인 선발 기준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단지 1등급만의 문제가 아니다. 2, 3등급 구간에서도 동점자가 대량 발생해 변별이 어려워진다. 결국 경쟁은 줄지 않는다. 줄어든 것처럼 포장되었을 뿐이며, 실제로는 학생의 능력이 아니라 정보와 경제력, 그리고 대응력을 가진 집단에게 유리한 구조로 바뀌었을 뿐이다.
평가와 진단이 명확하지 않을 때의 장점은 하나뿐이다. 경쟁이 완화된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많은 정보와 자원을 요구하고, 때로는 억울한 피해자를 만든다.
만약 100점~90점까지가 1등급이고, 89점~70점까지가 2등급이라면, 89점인 학생은 70점인 학생과 동일한 결과로 취급된다. 이는 조삼모사와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학생은 5등급제가 9등급제보다 유리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1점 차이가 치명적 결과로 이어지는 가능성이 오히려 커진 것이다.
수시, 학생부종합, 논술, 특기자 전형 등은 “점수만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구호 아래 경쟁의 방식을 다양화하려는 시도로 도입되었다.⁶ 극단적으로는 “공부 말고도 하나만 잘하면 대학 간다”는 문구로 요약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안다. 내세울 ‘특기’는 정보와 경제력 없이 만들기 어렵다. 외국어 능통이 가난을 이겨낸 순수 근성의 산물인 경우는 드물다. 다년간의 어학연수, 사교육, 교환·캠프, 콘테스트 준비 등 시간·돈·네트워크가 뒤따르는 일이 대부분이다. 특기자·논술·학종이 “기회 확대”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준비 가능한 집단에게 유리한 통로가 된다.
2008학년도 수능 성적을 등급만 표기했던 때를 떠올려보자. 수치의 분해능이 낮아지자 곧바로 논술이 새로운 변별 도구로 부상했고, 수능 직후 전국의 고3이 대치동으로 몰렸다.⁷ 경쟁이 줄어든 게 아니라, 얼굴만 바꿔 다시 나타난 것이다.
정리하면, 경로 다양화는 경쟁을 완화하지 않는다. 희소 자원의 총량이 그대로인 한 총경쟁은 유지되며, 통로가 늘수록 다중 대비가 필요해져 비용·정보 격차가 커진다. 결국 “기회 확대”의 외피 아래 은폐된 배제가 강화된다.
경쟁을 은폐하는 대신, 제도적으로 노골적인 배제를 선택한 사례도 적지 않다.
둘 다 법적으로는 공평하며 누구나 가능하다고 하는 제도이다 물론 과거의 과거제에선 시대적 신분제라는 틀이 작동했지만 사농공상 가운데서도 공부하는 자라면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는 형식적 개방성이 법적으로는 존재했다. 로스쿨 또한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하지만 두 제도 모두 일정한 조건을 요구한다.
과거제 : 교통·통신의 한계에 따른 정보력, 장기간 학업을 가능케 할 경제력이 없는 자는 응시조차 어려웠다. 따라서 형식적 개방성 뒤에 양반 중심의 재생산 구조가 있었다.⁸
로스쿨 : 높은 등록금, 영어성적과 같은 경제력과 법무법인 인턴십, 모의재판 경험, 봉사활동 같은 사회적 능력을 요구한다. 누구에게는 별 것 아닌 등록금 일 것이고 누구에겐 법무법인 인턴쉽을 얻는 것이 별 것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것 아니다. 법조계 진입 문턱은 이전보다 더 높아졌다.⁹
배제는 “넌 안 돼!”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러 허들을 쌓아 올려, 겉으론 공정하지만 실제론 선택받은 이들만 통과할 수 있게 만든다.
흔히 한국의 엘리트 전문가 생산 방식을 경쟁적 분화(모두가 같은 시험을 치르고 점수로 줄 세우는 방식), 서구의 방식을 선택적 분화(일찍부터 서로 다른 경로를 “선택”하게 만드는 구조)라고 구분한다.¹⁰
그러나 ‘선택적 분화’라는 말은 언어적 위장이다. 선택은 자유의 이름을 빌렸지만, 실제로는 사회경제적 배경이 선택의 범위를 결정한다. 부모의 교육 수준·직업·소득이 이미 아이의 경로를 선별한다면, 이는 선택이 아니라 예정된 분화다.
서구의 엘리트 양성 경로를 보라.
유아기(3~5세): 고가 사립 유치원, 명문 사립 부속 유치원.
초·중학교(5~14세): 명문 사립·최상위 공립학교, 소규모 학급, 맞춤형 교육.
고등학교(14~18세): 명문 사립 기숙학교 혹은 최상위 공립학교.
대학교(18세 이후): 아이비리그, 옥스브리지 등 극소수 명문대학.¹¹
그 선택은 누구에게나 열린 것이 아니다. 선택할 수 있는 범위 자체가 사회경제적 지위(SES)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또한 경쟁적 분화에서 선택적 분화로 넘어가는 이행기에 있다. 고교학점제와 같은 새로운 제도들은 겉으로는 다양성과 자율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선택적 분화의 길을 닮아가고 있다.
한국이 만약 이 길을 거부한다면, 남는 선택은 과도한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이 있다. 학습에서의 과도한 경쟁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올바른 목표와 적절한 기준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학습은 개인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고,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¹² 학습은 고통만이 아니라 성장과 성취의 기쁨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이 방향을 잃어서는 안 된다. 경쟁을 줄인다는 추상적 구호보다는, 정말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제대로 배우는 가에 초점을 맞추고, 평가의 공정성에 집중해야 한다. 과거 권위주의 사회에서 교육이 억압으로 주어졌다면, 이제는 합리적 권위와 제도적 시스템 속에서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을 우리는 갖추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야 한다.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학습에서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제도적 안전망을 만드는 것이 교육의 진짜 목표가 되어야 한다.
1. Samuel Bowles & Herbert Gintis, Schooling in Capitalist America (1976).
2. 교육부, 「초등·중학교 시험 폐지 정책 보고서」(2010).
3. 한국교육개발원(KEDI), 「사교육 실태조사」(2021).
4. 교육과학기술부, 「내신 등급제 개편안」(2008).
5. 계산: 35만 명, 1등급 비율 10%, 과목 상관 0.7, 7과목 기준 → 약 4천~6천 명 추정.
6.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학생부종합전형 운영현황」(2019).
7. 한국교육학술정보원, 「2008학년도 수능 성적표 표기 방식 분석」(2009).
8. 한영우, 『조선시대 과거제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0).
9. 교육부, 「법학전문대학원 제도 도입 백서」(2009).
10. 김신일, 『한국교육사』 (교육과학사, 2015).
11. P. Bourdieu, Distinction (1984).
12. Paulo Freire, Pedagogy of the Oppressed (1970).
13. Mullis, I.V.S. et al., PIRLS 2016 International Results in Reading (IEA, 2017).
14. Martin, M.O. et al., TIMSS 2019 International Results in Mathematics and Science (IEA, 2020).
15. 한국교육개발원(KEDI), 「한국교육종단연구(KELS): 초등학교 패널 조사」(2010~).
16. 교육부, 「전국 학업성취도 평가」(연차별 보고서).
17. OECD, PISA 2018 Results (Vol. II: Where All Students Can Succ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