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을 위한 제안
“도쿄는 겨울에 서울보다 따뜻하지 않나?”
내가 물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니, 내가 3년쯤 도쿄에 살아봤는데, 오히려 더 추웠어. 바닷바람 때문인지 체감온도는 훨씬 낮더라.”
그 말은 경험적으로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묻고자 한 것은 날씨가 아니라 기후였다.
기후는 수십 년의 평균-30년 이상-이고, 날씨는 짧은 기간의 기상 상태이다.
그는 공기의 온도를 피부로 느꼈고, 나는 통계의 평균을 떠올렸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말했지만, 서로 다른 층위의 세계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그건 기후가 아니라 날씨야, 도쿄 옆엔 따뜻한 쿠로시오(黑潮) 해류가 흘러.”라고 말했다면 그건 단순한 보충 설명이 아니라, 논리적 정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대화에서는 이런 정정이 곧 ‘따지는 말투’로 들린다.
논리적 반론이 감정적 공격으로 번역되는 순간, 언어는 의미를 잃고 관계만 남는다.
이 짧은 대화 안에는 문해력의 성장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제한 요소가 숨어 있다.
하나는 언어 내부의 문제, 다른 하나는 언어 외부의 문제다.
첫째, 언어 내부의 문제는 ‘기후’와 ‘날씨’처럼 구분되어야 할 개념이 모호하게 쓰이는 데 있다.
단어를 안다고 해서 그 의미를 정확히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불명확성은 사고의 깊이를 얕게 만들고, 문해력의 기초를 흔든다.
둘째, 언어 외부의 문제는 관계 중심의 문화적 습속이다.
한국어는 고맥락 언어다.
정확한 표현에 대한 요구는 종종 무례로, 논리적 반론은 ‘따짐’으로 오해된다.
그래서 화자는 의미를 흐리고, 청자는 눈치로 보충한다.
그 과정에서 명시적 언어는 사라지고, 문해력의 훈련은 멈춘다.
관계적 문해력-감정, 눈치, 분위기,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는 언어 감수성-이 발달할수록 인지적 문해력-논리, 정의, 의미의 정밀성에 기반한 언어 사용 능력-은 위축된다.
공감을 위한 언어가 사고를 억누르는 역설이 생기는 것이다.
문해력은 명시적 언어의 사용과 의미를 정밀히 다루는 문화 속에서 성장한다.
그것은 따지는 일이 아니라, 사고를 언어로 세밀히 다듬는 과정이다.
아이들에게 문해력을 가르친다는 것은 단어의 뜻을 외우게 하는 일이 아니라, 생각을 명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연습이다.
그리고 그 연습은 의미의 정밀화 과정을 경험하게 하는 일이다.
“무슨 말이야?”라고 묻는 아이는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의 정밀화는 언제나 권력에게 불편한 일이다.
정확한 언어는 책임을 분명히 하고, 명확한 책임은 변명의 여지를 없애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은 언제나 모호한 언어를 선호한다.
함성득 교수는 “한국 정치의 모호한 언어는 책임 회피의 문화와 직결된다.”라고 지적했다.
정치가 모호함 속에서 책임을 숨기듯, 사회 또한 ‘공감’과 ‘배려’의 이름으로 정확한 언어를 회피한다.
그러나 가정과 교실에서만큼은 달라야 한다.
아이의 문해력은 바로 그 ‘의미의 정밀화’를 허용하는 순간에 자란다.
당신의 말의 의미를 정밀화 하려는 아이에게 "따지지 마!"라고 하지 않기를 바란다.
결국 문해력의 성장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사회가 명시성과 책임을 얼마나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의 문제이며, 그 사회의 출발점은 언제나 가정과 교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