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그랬다.
상쾌한 바람과 햇살이 마구 유혹하니, 또다시 어디론가 떠나고 싶구나.
역마살 영자가 숙소를 검색하는데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같이,
지리산 산속에 떡 하니 누워있는 모양의 숙소가 눈에 들어왔다. 온통 하늘과 숲뿐일 것 같은 거기 베란다에 퍼질러 앉아 낮엔 향기로운 차를 마시고, 밤엔 아무 술에라도 취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지리산 둘레길을 들쳐보다가 힐링로드 대장정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발견했다. 부산, 영남 지역방송이 주최하는 3박 4일 일정의 참가비 전액 무료인, 걷기 행사로 사연을 보내면 선발해서 참가자격을 준다.
앗 ~~싸 병태도 행사 기간 동안 휴가낼 수 있다니까, 재빨리 사연을 써 보냈다.
마감 전날이었다. 틈틈이 다닌 문학수업은 이럴 때 진가를 제대로 발휘한다. 참가 목적, 등반 경험등 그럴듯하게 써 내려간 후, 병태 것도 병태가 쓴 것처럼 간절하게 써 보냈다. 열흘 후, 둘 다 참가자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떠나는 날은 예고대로 비가 몹시 내린다.
완주 -순천 고속도로의 수많은 터널이 그리 반가웠던 건 처음이다. 일단 구례센터에서 45명의 참가자가 모두 모인다. 15명이 한 팀으로, 총 세 개 팀이 각각 다른 구간을 걷다가 마지막 날은 화개장터에서 만나 유랑극단이란 텔레비전 프로에 참가하는 일정이다.
배정받은 3팀에는 다양한 연령대와 전국 각지에서 모인 분들로 구성되어 대충 훑어봐도 꽤나 흥미로워 보인다. 모자, 물병을 꽂을 수 있는 복대, 수건에 비옷, 간식까지, 가 보진 못했지만 마치 군대 보급품처럼 줄줄이 많이도 나눠준다. 나흘간 필요한 것들을 다 짊어지고 걸어야 하니까 짐을 되도록 줄였는데 오히려 늘어서 배낭은 곧 터질 거 같다.
참가자 15명에 진행요원 3명은 버스 타고 이동, 장항마을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오후 두 시 반 출발. 둘레길 3코스 5분의 2 지점-경사도 15도 오르막길. 오르막길이 시작되면 영자는 거의 반협박으로 모시고(?) 다니는 병태 눈치를 살살 보기 시작한다.
병태지수 -비교적 맑음.
비는 이제 안개비 정도로 걷기엔 오히려 너무 좋다. 일행은 아직 서먹했지만 눈빛과 몸짓으로 서로 배려하며, 나흘간의 인연을 소중하게 시작한다. 길은 완만한 오르막길로 이어지더니 현란한 노랑을 선사한다. 다랑이 논이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산과 어우러져, 구불거리는 모양새의 눈 시린 노랑.
노란 다랑논을 마주하니 떠오르는 사람 고흐.
눈앞에 펼쳐진 정다운 우리 산하가 고흐의 화법으로 그려 낸 그림으로 보여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지난해에 떨어진 묵은 낙엽 위에 사뿐히 올라앉은 구절초 한 송이를 그냥 못 지나쳐 찰칵, 사진도 찍어가며 길을 걷는다.
600년 되었다는 마을 보호수, 느티나무가 한없이 미더워서 도닥도닥 쓰다듬어주고, 다시 걷는다. 등구재 500m 전 –경사도 45도.
병태 지수 –매우 흐림.
곧 터져버릴 배낭처럼 배낭 임자도 터질 듯 부풀기 시작함. 다행스럽게 터지기 일보 직전 내리막길 시작. 무사히 첫날 숙소인 산촌생태마을에 도착한다.
소요 시간- 3시간 반, 거리-8.5km.
여자 5인 1실, 남자 4인 1실.
수학여행 때 이후로 이런 종류의 잠자리는 처음인 것 같아 엄청 불편하다.
영자가 유독 예민한 부분이 잠자리인데, 나이를 먹을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요리연구가라는 그곳 쥔장이 지리산 나물과 야채로 차려낸 음식은 환상적이다. 주부로 요리해 온, 34년을 아프게 자책할 만큼 놀랍다.
식사 후엔, 귀농해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젊은 시인과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있다. 구름 때문에 별을 못 본 게 아쉬웠지만, 달디단 밤공기를 마시며 도란도란 걸어보는 깜깜한 시골마을은 도대체 얼마만인가?
시인은 초록칠판에 하얀 분필로 자작시를 적어놓고 향긋한 차를 내어준다.
진한 허브 향과 나직한 그의 목소리에 취하듯 몽롱해진다. 30km 이내에 30대 부부는 자기네가 유일하다는 말이 새삼스레 놀랍다.
농사를 짓는 건 아닐지라도 농촌을 지키는 자로서의 자부심이 넉넉해서 보는 이들도 흐뭇해진다.
세계자연유산이라는 다랑논의 눈부신 노랑을 우리는 그저 바라보며 감탄하기만 했었는데 캐나다와 FTA가 체결되면서 수매가 되지 않아 진작 베어져야 할 벼들이 수확시기를 놓치고 있는 거란다.
그 말을 듣자 저절로 고개가 떨구어진다. 특히 다랑논에서 농사짓기란 도시인들은 감히 상상도 못 할 힘듦일 터인데, 갈 곳을 잃어버린 노란빛에 우린 그렇게 철없는 환호성만 내질렀다니.. 그 노란빛을 애끓게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의 참담함은 전혀 모르면서.
뉴스에서나 들었던 먼 소리를 코앞에서 마주 대하니 가슴이 저린다.
그러나 그뿐, 숙소로 돌아오는 길엔 도랑물 소리, 벌레 소리나 흉내 내보며 어느새 키득거리고 있는 도시의 둘레꾼들은, 한낱 이방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