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60도 오르막길 보다 더 무서운 시간이다. 잠을 청하려고 귀마개, 안대로 중무장을 한 후, 불 끄고 누웠지만 잠은 와 줄 것 같지 않다. 양 백 마리는 택도 없고, 양 천 마리를 거꾸로 세어 봐도 정신이 너무 멀쩡하다. 옆자리 안산댁 코 고는 소리와 그 옆자리 창원 아가씨의 이 가는 소리는 마치 천둥소리 같다.
몹시 힘들었지만, 밤이 지나면 오지 않는 아침은 없다.
둘째 날도 여전히 예쁜 다랑이 논길은 이어진다. 그러나 이젠 현란함보다는 처연한 노란빛, 왠지 슬픈 노랑이다. 산을 내려와 금계마을 느티나무 밑에 둘러앉아 간식 먹고, 자기소개하고, 막내들의 재롱 잔치할 때까진 정말 좋았다. 여유 있는 날이니 천천히 쉬며 가면 된다니까 모두 희희낙락 친구가 되었다. 25살 막내가 언니라고 부르며 애교를 부려 눈물 나게 웃었고, 엄청나게 고마왔다.
병태지수 –수소풍선처럼 놓치면 마구 날아갈 것 같음
그 후에 벽송사까지 이어진 산길도 제법 가파르긴 했지만 숲은 우거졌고, 걷기 좋은 흙길이라 쾌적하게 걸을 수 있다. 제2의 석굴암이라는 서암정사를 둘러보고 내려오니 칠성계곡이다. 계곡 위, 칠성식당에서 막걸리를 곁들인 점심을 먹는다. 폭이 족히 100m는 될 것 같은 넓은 계곡에 마침 전날 내린 많은 양의 비로 인해 힘차고, 우렁차고, 넘칠 듯 기세 좋게 물이 흘러내리고 있어 가슴이 뻥 뚫린다. 이런 곳이라면 아무거나 먹어도 꿀맛이겠지만 산채비빔밥은 단연 최고다. 양은그릇에 담긴 차가운 막걸리를 단숨에 들이켜니 산행의 피로 따위는 한방에 날아가 버린다. 그때까지도 다 함께 행복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병태의 기분이 마구 날아갈 듯해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영자가 손 마이크를 들이댄다.
“누규~~덕?”
커피까지 마시고 푹 쉰 후 다시 배낭을 멘다.
으아악~~ 경사도 70도, 더구나 땡볕의 딱딱한 시멘트포장의 차도가 이어진다.
“난, 이런 길 젤 싫어” 입구부터 병태의 불쾌지수가 급상승한다.
“이런 길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어. 그냥 걸으세요. 남자답게 묵묵히.”
10분은 묵묵하다.
“나, 이런 길~~” 또 시작이다.
“옵빠!!! 10분밖에 안 걸었어. 다음엔 20분 참았다 징징대! 알았죠?”
모두 힘든 그런 길을 40분 정도 오른 후, 길은 산길로 이어진다. 앞서가던 아가씨가 뱀을 보고 비명을 지르니, 진행요원이 잽싸게 달려 나가
길 한가운데에서 똬리 틀고 있던 뱀을 지팡이로 집어 멀리 던져버린다. 조금 있다가 이번엔 막내의 앙칼진 비명소리. 무지하게 큰 지네다.
길은 끝없는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이럴 땐 자동으로 읊조리는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아무려면 태산보다 높으랴 그까이꺼 뭐 하늘 아래 뫼이겠지.
잊을만하면 다시 시작되는 병태의 불평.
“이건 둘레길이 아니지. 해발 6~700m는 족히 돼 보이는데.
거의 평지를 하루 네 시간만 걸으면 된다며? 또 나한테 사기 친 거잖아? “
헉헉대면서도 연신 투덜 댄다. 이럴 땐 빠른 걸음으로 멀리 도망가는 게 상책이다.
병태 지수 –폭발 전야.
지루하고 힘들게 오르막이 계속되더니 드디어 내리막길이다.
고생 끝 행복 시작.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내리막길은 바윗돌이 뒤엉킨 골짜기길이고 돌에는 이끼까지 끼어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내리막 경사도 만만치 않아 다시 고행의 연속이다. 일흔 살 큰 오빠의 다리가 자꾸 풀리자 삼십 대 총각이 배낭을 대신 메고 부축까지 해드린다. 또 한 청년은 험하다 싶은 구역은 오르내리며 어른들과 여성들 보호에 최선을 다한다.
이번 여행에 제일 큰 수확이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이리 건강한 것.
배려하고, 양보하며, 맑게 웃는 그들을 보며, 어른인 영자는 안도했고 한없이 행복하다.
따뜻하고 조심스러웠던 산행을 마치고 이젠 정말 고생 끝이라고 생각했더니 아직도 아스팔트 차도가 6km나 남았다고 한다.
발톱이 빠질 것같이 아프고 발바닥에선 열이 풀풀 나는 것 같다. 패잔병의 모습으로 그날 숙소에 도착한다.
산길 포함 총 18km. 소요 시간 10시간.
힘들게 도착한 숙소에서 도저히 잘 수 없을 것 같다.
작은방 두 개에 여자 10명이 나누어 자고, 남자 8명은 거실에서 자야 한다. 욕실은 달랑 한 개.
병태 지수-불안, 초조, 부글부글
첫날 2시간 남짓 자고 종일 걸었기 때문에 둘째 날은 푹 자야 했다. 다행히 숙소가 마을이라 부근에 다른 방을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병태가 잽싸게 나갔다 오더니, 방을 구했다고 한다. 일행한테 죄송했지만 양해를 구하고 욕실 딸린 방에서 그날은 푹 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