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은 5코스 종점인 수철마을을 지나 산청까지 17.6km를 걸어야 한다.
길은 어제보다 더 험하다고 마구 겁을 준다.
50대 이상 아줌마 셋 중, 두 사람이 지레 포기해 버린다. 유일한 아줌마, 영자는 꿋꿋하다. 포기한 두 사람이 주최 측에서 보내준 차를 타고 오늘 숙소인 산청센터까지 간다고 해서 불필요한 짐들은 그 차편에 보냈더니 배낭이 한결 가볍다.
호주에서 10년 살았다는 30대 진행요원 철수의 구호에 맞춰 매일 아침 체조로 몸을 풀었는데 형편없이 엉성한 철수의 체조 시범에 호주 체조는 그러냐며 한바탕 웃고 난 후 걷기 시작한다.
코스모스와 노란 들판 파란 가을하늘.
식상한 수식어를 붙여보지만 그래도 우리 가을 들녘은 넉넉하고, 상쾌하다.
20분쯤 걸은 후 도착한 산청. 함양 사건 추모 공원에선 모두 숙연해진다. 1951년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 수행 중 군인들이 무고한 민간인을 마구 학살했다는데, 그 영령들을 모신 곳이다.
썰렁한 추모 공원 구석구석을 돌며 향도 피우고 묵념도 해 본다. 소설에서나 봐 왔던 우리의 쓰라린 과거가 새삼 아프다.
엄청난 예산을 들여 고통의 벽, 희생자의 상, 위령 탑등을 세워 놓았는데 참배객은 거의 없는 듯하다.
아픈 과거를 털어버리듯 서둘러 공원을 빠져나오니, 오밀조밀한 냇물이 흐르는 예쁜 숲길이 이어진다.
‘이런 길은 너무 좋아’ 조금 전의 숙연함은 어느새 날려 보냈는지 병태가 병태 지수 매김을 선명하게 해 준다.
적당한 오르막의 개울물이 흐르는 숲길. 누구든 머릿속이 맑아질 기분 좋은 길을 천천히 오르다 보니 폭포와 맞닥뜨린다.
상사 폭포다.
폭포는 이틀 전 내렸던 폭우 덕에, 미리 봐 두었던 사진보다 훨씬 폭포답다. 사진도 찍고, 간식도 먹고, 물만 보면 무조건 발을 담가봐야 직성이 풀리는 영자는 물장구까지 치며 아주 신났다. 병태도 엉거주춤 옆에 앉아 발을 담근다.
발 마사지로 한결 가뿐해진 발걸음은 경쾌하기 그지없다. 오늘 일정 중 제일 가파르다는 산불감시초소도 가뿐히 오르고, 고동재는 언제 지났는지도 모르게 휘리릭 날아다닌다. 가볍게 산을 하나 넘고 나니 이젠 또다시 임도다.
그러나 어제의 임도와는 달리, 길옆엔 나무도 울창하고, 다니는 차도 드물어
걷기엔 최적이다.
걷다가 만나는 마을 길목 평상엔 앉아 쉬고 계시는 어르신들이 많다. 함께 앉아 쉬며 인사를 드리는데 혼자 사신다는 어르신들이 의외로 많아 마음이 편치 않다. 주최 측에서 매일 나누어 주는 간식이 너무 많아서 나누어드리면 굉장히 좋아하신다. 그리고 헤어질 땐 잡은 손 놓기 아쉬워 눈가가 촉촉해지시는 분까지 있어, 우리와 헤어질 때마다 우시는 어머니의 눈과 겹쳐 가슴이 아프다.
5코스 끝인 수철마을은 쓰레기뿐이었던 마을 앞 도랑을 ‘물고기 노닐고, 아이들 수영할 수 있는 개울물’로 바꾸어 놓은 마을답게 아담하고 깨끗한 시골마을이다. 마을 앞 평상에서 흥겨운 파전과 막걸리파티가 있었는데 다음에 이런 기회가 또 생긴다면 근처에 계신 어르신이라도 모셔놓고 함께 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몇 개의 마을을 연거푸 지난 후, 드디어 오늘 목적지인 숙소에 도착한다.
여전히 5인 1실이지만 부근에 다른 숙소는 보이지 않고 연일 따로 잔다는 것도 눈치 보여 일행과 함께하기로 한다.
오늘은 마지막 밤. 내일 티브이 프로에 모두 나가야 하니 연습도 해야 하고 왕언니의 생일파티까지 있단다. 저녁 식사 후에 모두 모여 Y.B(young boy) 팀이 애써 만들어 놓은 종이 구호를 클립으로 가슴에 고정시킨 다음, 단체로 나갈 장기자랑 연습을 한다.
안산댁이 춤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나서서 맘껏 흔드는 바람에 쓰러지는 환자가 속출할 지경으로 웃는다. 이렇게 젊은이들과 한 팀이 되어 같은 목적으로 계획하고, 웃었던 적이 있었던가? 갑자기 40년 전 학창 시절로 돌아가 M. T에라도 온 듯, 맘껏 즐긴다.
오래오래 기억될 소중한 시간이다.
연습 후 왕언니의 생일파티.
달랑 초코파이 케이크뿐인 생일파티지만,
언니 목소리는 떨렸고, 눈가는 젖는다.
병태 지수고 뭐고, 그냥 종일 맑은 날이다. 또다시 수소풍선이 된 병태가 같은 풍선인 왕언니의 술친구가 되어 그 자리에 있는 술을 깡그리 마시려고 해서 영자의 뱁새눈이 거의 사시가 돼 버린 것 빼놓고는.
그날은 이 가는 소리나 코 고는 소리가 별로 생각나지 않는 걸 보면 잘 잤나 보다.
마지막 날은 경호강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 데, 최종 목적지인 성심원까지 세 시간쯤 걸린단다. 이젠 그 정도 평지를 걷는 데는 모두 이골이 났다. 즐겁고, 신나게 걷는다.
병태의 입에서 정체불명, 국적불명의 노래가 마구 나온다. 흥에 겨우면 나오는 대로 흥얼대는 병태의 자작곡이다. 그나마 맨 정신이라 노랫소리가 작아서 다행이다. 취한 날엔 고래고래 떠들어 옆집 눈치 보느라, 해품달의 명대사 ‘그 입 다물라’며 두 입술을 꽈악 부여잡고 따라다녀야 했다. 그렇게 걷기를 마친 후엔 지리산 온천에서 목욕까지 시켜준다.
잠깐이었지만 따뜻한 온천수에 몸과 마음은 무방비 상태로 풀어져 버린다.
산뜻해진 몸과 마음으로 나누어 준 단복과 모자를 쓰고 유랑극단이란 경남 부산방송 티브이 프로그램 녹화에 참가한다.
전국노래자랑 같은 프로였는데, 평소엔 외면하던 프로도, 직접 참가하니 기대보다 흥겹다. 무방비로 풀어진 몸과 마음이라 더욱 신난다.
영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초대 가수로 김수희, 김혜연이 등장했을 때보다 힙합 듀오 배치기가 나왔을 때, 이번엔 병태의 눈이 찢어질 정도로 소리를 꽥꽥 질러댄다.
정작 팀은 연습한 보람도 없이, 무대 위라 긴장한 안산댁이 어젯밤 그 현란한 막춤 재현에 실패하는 바람에 인기상도 못 받았지만, 아무래도 그저 좋기만 하다.
그렇게 꿈같던 일정이 모두 끝나고 이젠 이별이다.
우연히 참가하게 된 힐링로드 걷기 행사.
이렇게 전혀 몰랐던 남들과 함께 어울려 웃고 떠들며 걸었던 기억은... 없다.
뭐 그리 감출 것도 없으면서 왜 그리 벽 안으로 들어가 숨기에 급급했을까?
허물면 이리 상쾌한 것을.
함께 어울리며 누렸던 색다른 경험은 달짝지근한 추억이다.
싱싱한 되새김이다.
젊은 그들은 재바르게 그룹 톡을 만들어 사진을 공유하고 소식을 알려온다.
언젠가 슬그머니 잊어버리고 말겠지만, 지금은 많이 반갑다.
느리게 걸으며 자연과 마을과 문화를 만나고, 끝내는 자기와 만나 영혼의 위안을 얻는 순례의 길이 되었으면 한다는 둘레길.
속도의 문화를 느림과 성찰의 문화로, 수직의 문화를 수평의 문화로 만들어 가고자 하는 소망을 담았다는 둘레길.
그 길을 함께 걸었던 맑은 사람들과, 그 길에서 만났던 선량한 얼굴들.
그리고 처연하지만 눈부셨던 노랑과, 맑은 개울의 재잘거림 때문에
한 동안 영자는
무지하게 행복할 것 같다.
-9년 정도 오래 간직했던 이야기를 끄집어냈습니다. 어제일 처럼 그립고 참으로 귀한 경험이었네요. 함께했던 모든 분들께 안부 전합니다. 항상 즐겁고 건강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