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진 바다 한가운데서

열다섯 살, 나는 한국을 떠나 St. Andrew's 고등학교로 유학을 갔고 내 이름은 처음으로 알파벳 옷을 입었다. Wanki Park. 낯선 땅에서 낯선 철자로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친구들의 이름은 죄다 길었다. 가운데 이름이 하나씩, 때로는 두 개씩 끼어 있었다. 마치 샌드위치처럼 두툼했다. 내 이름은 그에 비해 너무 얇았다. 식빵 한 장짜리 샌드위치랄까. 외국 문화를 통째로 흡수하고 싶었던 어린 마음에 나도 가운데 이름이 필요하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성경을 펼치셨다. 그리고 모세를 골라주셨다. 바다를 가르고 억압받던 민족을 이끌어 낸 지도자. 아마도 어머니는 내가 낯선 세계를 헤쳐나가길 바라셨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Wanki Moses Park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 Moses는 참 좁은 틈에 끼어든 셈이다. Wanki와 Park 사이, 동양과 서양 사이, 한국인이고 싶은 마음과 이방인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 모세는 바다를 갈랐지만 내 이름 속 Moses는 오히려 갈라진 바다 한가운데 서서 양쪽 물벽을 동시에 버텨야 했다.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Wanki가 힘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Moses가 비집고 들어온 자리를 내어주면서도 한 발자국도 물러나고 싶지 않았으니까.


다른 한국 아이들은 James, David, Sean이 되었다. 깔끔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내 자존심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이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Wanki라는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나는 자동으로 이방인이 되었다. 동양인의 얼굴,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 사람들은 내 이름을 부르기 전에 잠깐 멈칫했고 그 찰나의 머뭇거림 속에서 나는 매번 국경을 넘었다.


Bowdoin 대학에 입학했을 때 학교는 나를 'student of color'로 분류했다. 유색인종 학생. 배려 차원에서. 실제로 많은 혜택을 주려 했다. 하지만 나는 학생처장을 찾아가 물었다. 누가 색이 있고 누가 색이 없는 건가요? 이건 흰색을 기본값으로 설정하고 나머지를 예외로 처리하는 거 아닌가요?


학생처장은 처음에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그는 절대 차별하려는 의도가 없다고 부드럽게 답하며 내 얘기를 들었다. 대학 행정가 특유의 '당신 말을 경청하고 있어요'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나는 사무실을 나오면서 내가 뭘 기대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학교가 갑자기 분류 체계를 바꿀 리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갔던 건 아마 그 질문을 던지는 내가 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나도 나를 분류하고 있었던 셈이다.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아시아인'이라는 칸에.


3학년 때 서울대학교에서 1년을 보냈다. 드디어 박완기였다. 이름도 한국 사람, 얼굴도 한국 사람. 모든 게 맞아떨어질 줄 알았다.


틀렸다.


술자리에서 나는 자꾸 타이밍을 놓쳤다. 누군가 농담을 던지면 나는 한 박자 늦게 웃거나 한 박자 빠르게 웃었다. 선배가 잔을 건네는 각도, 마시는 순서, 그런 것들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몸이 자연스럽게 따라가지 않았다. 한 번은 선배가 말했다. "야, 너 미국에서 왔다며? 뭔가 다르긴 다르다." 악의는 없었다. 오히려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그 말 속에서 나는 선을 느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선.


수업 시간에는 미국에서 배운 대로 내 나름의 논리를 펼쳤다. 교수가 말했다. "개인적인 의견보다는 합의된 틀 안에서 생각해보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반문했다. 합의된 틀이 뭔데? 누가 합의했는데? 그리고 곧바로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이 반문 자체가 이미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 아닌가.


미국에서는 내 얼굴색이 문제였다. 여기서는 내 태도가 문제였다. 어디든 무언가 부족했다. 박완기라는 이름으로 불려도 나는 박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박완기가 되려고 애쓰는 누군가였다.


런던 정경대 대학원에서는 다시 Wanki M. Park. 이번에는 미국식 영어 억양을 가진 특이한 동양인. 새로운 종류의 이방인이었다. 이방인에도 여러 맛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바닐라 이방인, 초콜릿 이방인, 민트초코 이방인.


그리고 영국에서 나는 발견했다. 내 이름 Wanki가 영국 귀에는 'wanker'로 들린다는 것을. 영국 속어로 그리 좋은 뜻이 아니다. 굳이 번역하자면... 아, 번역하지 않는 게 좋겠다. 어쨌든 프로페셔널한 자리에서 쓰기에는 곤란한 발음이었다. 이십 년 넘게 함께한 이름이 바다 하나 건넜을 뿐인데 갑자기 나를 비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웃음이 났다. 한국에서는 자부심, 미국에서는 이국적 표식, 영국에서는 욕설. 내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이름의 순수성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맥락에 따라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공이었다. 그때는 생각했다. 이름에 이렇게 목숨을 걸 필요가 있나?



홍콩에 왔을 때, 나는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여기서는 모두가 조금씩 이방인이었다. 광둥어를 하는 사람, 만다린을 하는 사람, 영어를 하는 사람. 필리핀에서 온 가사도우미, 영국에서 온 금융인, 중국 본토에서 온 사업가. 모두가 어딘가에서 왔고 완전히 이곳 사람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방인이 다수가 되면 이방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해진다. 물고기에게 물이 보이지 않듯 여기서는 다름이 보이지 않았다.


홍콩이 여전히 영국 문화를 지녔다는 걸 느끼며 나는 선택했다. 순서를 바꾸기로. Moses Wanki Park. 하지만 실제로는 더 근본적인 것을 선택했다. 더 이상 하나를 고르지 않겠다는 것. 영어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Moses Park.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박완기. 변덕이 아니라 실용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건 항복이면서 동시에 승리였다. 하나의 깔끔한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항복, 그리고 그것이 결핍이 아니라 자유라는 걸 깨달았다는 점에서의 승리.


라고 쓰면 너무 깔끔한 결말인데 솔직히 말하면 배웠다는 표현도 좀 거창하다. 그냥 지쳤다는 게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싸움에 지쳐서 휴전한 것인지 정말로 평화를 찾은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괜찮다.



Moses Park은 회의실에서, 명함에서, 영어 이메일에서 존재한다. 박완기는 한국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에서,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한국 클라이언트와 미팅 중에, 가끔 혼자 중얼거리는 독백에서 존재한다. 둘은 더 이상 같은 공간을 두고 다투지 않는다. 한 지붕 아래 사는 룸메이트처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가끔은 냉장고 음식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평화롭다.


가끔 생각한다. 열다섯 살의 내가 만약 처음부터 David Park이나 James Park을 골랐더라면. 분명 더 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이 길고 구불구불한 여정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체성이란 것이 하나의 답이 아니라 끊임없는 협상이라는 것. 내가 여러 버전으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 버전들이 반드시 싸울 필요는 없다는 것. 이 여정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들이다.


성경 속 모세는 바다를 갈라 사람들을 건너게 했다. 내 이름 속 Moses는 조금 다른 일을 했다. 갈라진 두 세계 사이에서 버티다가 결국 다리가 필요 없다는 걸 알게 해줬다. 그냥 둘 다 존재하면 된다는 것.


Moses Park. 박완기.


가끔은 사이가 좋고 가끔은 서로를 버거워한다. 완전히 하나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휴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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