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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단 Jun 22. 2021

일방적 사랑의 태생적 한계와 그 초월성에 대한 고찰

<키사라기 미키짱> 2007


혼자서는 도저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기에 들어가 버리는 순간, 이전까지의 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내가 되어버릴 것만 같은 두려운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이 웬수지, 결국 친구에게 억지로 동행을 부탁해 함께 들어가 보기로 했다. 2000년대 초반 일본 아키하바라에서 시작돼 수많은 오타쿠와 마니아들의 환상을 현실로 만들어 주었던 ‘메이드 카페’로 향했다.


“다녀오셨어요 주인님! 밖이 많이 덥지요?”


도착한 곳은 Sofmap 빌딩 건너편 골목 2층에 있는 작은 메이드카페. 심호흡을 깊게 하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빵긋빵긋 해실한 미소와 함께 메이드 복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소녀가 우리를 반겼다. 동행인은 일본어를 모르는 친구였기에 그나마 충격이 덜해 보였다. 하지만 생전 처음 듣는 격조 높은 존댓말과 피치 높은 콧소리에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뀨뀨! 기다렸어요 주인님. 여기는 처음이신가요? 이곳은 현실과는 다른 세계입니다. 꿈과 행복의 나라이니 입국 수속을 하셔야 해요. 여기 패스포트에 이름을 적어주세요~”

우린 뭔가에 홀린 듯 신속하게 입국수속(?)을 밟았고 각자 음료수와 먹거리를 적당히 시켰다. 음료나 음식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마법의 양초를 켜야 했고(?) 맛있어지기 위한 주문을 외워야 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주문을 따라 하세요 주인님! 이렇게 하면 주스가 더 맛있어진답니다.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맛있어져라~ 맛있어져라~ 모에모에 뀽!"


주문을 외치는 소리가 작으면 너무 작다고 다시 (신병훈련소인 줄?) 손가락을 제대로 안 돌리면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고 다시. 진땀 흘리며 가까스로 메이드님의 기준을 충족시켰다. 300엔을 더 내면 옆에 앉아 오므라이스 위에 케첩으로 그림과 하트를 그려주는 서비스가 있었지만 차마 그것만큼은 도저히. 기본적으로는 주문을 받거나 음식을 가져다줄 때, 혹은 지나가면서 한 번씩 말 상대를 해주는 시스템이었다.


과감히 자기 자신을 버리고 판타지 세상 속으로 흠뻑 빠져 메소드 연기를 나눈다면 꽤 즐거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하기 어려워서가 문제지. 뀽뀽이라니! 주문한 음료도 나왔고 메이드와 몇 마디 주고받다 보니 조금 적응이 됐다. 그제야 주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토요일 점심이라 그런지 테이블은 거의 만석이었다. 도쿄여행 가이드북을 보고 호기심에 들어왔을 게 분명한 '유럽 남녀 커플' 한 팀과,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 이색 카페가 궁금해 몸소 찾아오신 걸로 보이는 80대의 '할머니 할아버지 커플'. 이 두 팀을 제외하고는 모두 혼자 온 남자들이었다.


아키하바라 공식 지정 유니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체크 셔츠에 면바지, 커다란 백팩으로 무장한 그들을 천천히 관찰했다.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메이드 카페를 즐기고 있었다. 방금 사 갖고 온 피규어를 정성껏 조립하는 사람, 메이드에게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추천하며 주인공의 명대사를 외치는 아저씨, 잔뜩 쇼핑해온 만화책을 한 권씩 소중하게 정리하는 청년, 한 주 동안 있었던 힘든 일을 쏟아내듯 하소연하는 회사원, 그 옆에서 고개 끄덕이며 정성껏 귀 기울여주는 메이드 소녀…


기묘한 풍경이었다. 인구 1400만의 초거대도시. 뉴욕과 런던에 이은 세계 3대 메트로폴리탄. 그 안에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너무나 외로워 현실을 떠나 이곳을 찾는다. 고작 2시간의 이용시간이지만 명랑한 메이드 친구들이 최선을 다해 자기 얘길 들어준다. 함박 웃으며 주고받는 몇 마디 대화로 다음 한 주를 살아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메이드복의 그녀들은 이곳에서 이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 뒤틀리고 외로운 영혼들의 상처를 위로해주는구나.


계속 보다 보니 메이드들은 TV속 아이돌과 다름없고 손님들 또한 팬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화면으로만 볼 수 있는 아이돌보다 어떤 면에선 더 낫다. 같은 공간에서 잠시나마 함께 호흡할 수 있고 서로 시선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같은 뜨내기손님 말고 단골들끼리는 서로 인사도 나누고 근황 토크도 한다. 메이드는 손님에게 지난주 다친 발목은 어떤지 묻고, 손님도 메이드를 이리저리 챙긴다. 서로를 응원하며 함께 성장하는 아이돌과 팬클럽이었다 이들은.



누군가를 애틋하게 여기고 아끼는 마음이란 아름다운 법. 친구와 함께 한 메이드 카페 체험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싶어 슬슬 일어나려던 때였다. 혼자 온 아저씨 손님 중 누군가가 2만 원가량의 비용을 지불해 메이드의 노래 공연을 주문했다. 그 즉시 카페 조명이 점멸하는 무대조명으로 바뀌더니 지명당한 메이드가 마이크를 꺼내 들었다. 경쾌한 드럼 전주가 나오자마자 카페 안의 모든 오타쿠들이 손을 높이 들며 환호했다. AKB48의 'Flying Get' 이었다. 그래, 그해 여름 일본은 어딜 가나 이 노래였다.


노래를 부르는 메이드 친구는 물론 다른 메이드들까지 잠시 접객을 멈추고 한쪽에 모여 흥겹게 춤을 추었다. 손님들도 유쾌하게 박수를 치며 어깨를 들썩였다. 나와 친구는 왜 좀 더 일찍 가게를 나서지 않았을까 후회했지만 이미 장내는 도쿄돔 콘서트에 버금가는 열광의 도가니. 차마 분위기를 깨기 미안해 어색하게 손뼉 치며 동참해줬다.


2절이 시작되자 메이드는 무대가 아닌 객석으로 내려와 손님들 앞에 마이크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한 명씩 한 명씩. 피규어를 조립하던 친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열창했지만 음정 박자 모든 게 엉망이라 다들 박장대소했다. 애니메이션 얘기만 하던 퉁퉁한 아저씨는 덩치와 다르게 가녀린 목소리로 노래했고 회사원 아저씨도 쇳소리이긴 했지만 최선을 다해 부르는 모습에 다들 훈훈한 미소로 화답했다.


그때였다. 메이드가 우리 테이블로 왔다.  . 오지 . 나는 너희들과 달라. 오타쿠가 아니라고. 그냥 처음이자 마지막 체험인데친구는 어차피 일본어도 모르고  노래도 모른다. 메이드는 장난기 가득한 개구쟁이 소년의 표정으로  앞으로  마이크를 내밀었다. 언제는 주인님이라더니 이렇게 무례하게 대뜸 노래를 강요해? 어색하게 웃으며 마이크를 슬며시 밀어냈다.


하지만 보고야 말았다.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오타쿠 친구들의 티 없이 맑은 얼굴. 하나같이 기대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여기서 내가 마이크를 내친다면 "어디 이런 기분 나쁜 오타쿠들이랑 똑같이 취급해! 난 정상인이야!" 라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다. 너희들은 그저 조금 외로울 뿐 나쁜 사람들인 건 아닌데. 사랑에 빠진 게 죄가 아니듯 게임, 영화, 만화, 철도, 우주… 이런 걸 좋아한다고 죄는 아니잖아?


잠시의 머뭇거림. 순간 일본 속담 하나가 떠올랐다. ‘독을 마시려거든 아예 그릇까지!’. 그래 어차피 여기까지  , 마이크를 낚아챘다. "플라잉 ! 너한테 차일지 몰라도 일단   부딪혀볼 거야. 그래 나도 남자잖아!" 가게  오타쿠 친구들의 뜨거운 함성 아키하바라를 통째로 집어삼키기라도  듯한 기세로 맹렬하게 터져 나왔다.






그라비아 아이돌 키사라기 미키. 대중적으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끈 건 아니었지만 밝고 씩씩한 미소로 팬들의 사랑을 받던 그녀가 자살로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되었다. 그녀를 아끼던 팬들이 인터넷에서 의기투합해 열리게 된 ‘1주기 추도회’. 그러나 즐거우면서도 엄숙해야 할 추도회는 영 이상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소박한 오타쿠 영화에서 출발해 범죄 미스터리와 추리 스릴러로까지 확대되는 신기한 작품. 아이돌과 팬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드는 영화 <키사라기 미키짱>이다.



시작은 따뜻하다. 천국에 있을 그녀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서 추모하겠다며 빌딩 옥상에 모인 이들. 팬클럽 게시판 상으로만 소통하던 아저씨 다섯은 도란도란 그녀를 추억한다. 직접 구워온 애플파이와 술도 한 잔 나누며 미키의 사진집을 돌려본다. 친필 답장이나 사인, 직접 찍은 사진 등 팬으로서 누가 더 레어템을 갖고 있는지를 두고 귀여운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때, 한 팬이 그녀가 정말 자살한 게 맞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오다유지: 여러분도 알고 싶지 않나요? 그녀가 왜 죽었는지.

딸기소녀: 그 아이는 죽지 않았어. 미키짱은 살아있어 내 마음속에. 여기에 살아있어 언제나 함께. 죽지 않았다고.

오다유지: 현실을 보세요.

딸기소녀: 현실이 무슨 의미가 있어!



추도식을 위해 까만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다섯 명의 찐팬. 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추도가 아닌 추리를 시작한다. 경찰은 단순 자살로 발표했지만 팬들이 생각하기엔 아무리 봐도 자살이 아니다. 자살한 당일 찍힌 사진 속 그녀는 해맑기만 하다. “이게 자살할 사람의 웃음입니까?” 의혹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평소 그녀의 행실로 보면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재산까지 앗아가는 ‘방화’를 자살법으로 선택할 리 없다. “설령 죽는다 해도 적어도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게 키사라기 미키 아닌가요?”


사실은 주변에 악질 스토커가 있었던 게 아닐까. 회사의 무리한 활동 강요로 혹사당한 건 아닐까. 누가 몰래 불을 지른 건 아닐까. 그렇게 한 명씩 차례로 의혹과 해명이 이어진다. 순수한 팬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했던 추도식이지만 알고 보니 크든 작든 저마다 미키와의 인연이 있다. 그렇게 하나씩 풀리는 의문들. 결국 그녀는 자살이나 범죄에 연루된 게 아니라 지극히 단순한 사고사였던 걸로 중론이 모아진다.



서둘렀다면 어쩌면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팬들에게 받은 소중한 편지들을 지키려다 화마에 휩싸인 걸로 추정되는 그녀의 마지막 순간. 한걸음 다가간 진실에 다섯 명의 팬들은 할 말을 잃는다.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삶이 괴로울 때 힘이 되는 존재. 서로의 관심과 사랑으로 함께 성장하는 사이. 아이돌과 팬이란 아마도 그런 것인가 보다. 키사라기 미키에게는 그런 팬들이 (많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있었다.


야스오: 그녀를 정말로 받쳐주었던 건 저따위가 아니었네요. 이에모토씨 당신이었어요.

이에모토: 주변인도, 매니저도, 어릴 적 친구도, 아버지도 아니라… 그저 단순한 팬이었던 제가요?

야스오: 단순한 팬이니까 그렇죠.

딸기소녀: 그녀는 진정한 아이돌이었네요.



미키짱을 정말 좋아했지만 노래솜씨만큼은 영 꽝이었다며 웃는 팬들. 완전 음치인데도 활짝 웃으며 안무까지 최선을 다하는 그 노력이 귀여웠다며 따뜻하게 추억한다. 혹여 인기가 떨어져 은퇴를 하더라도 고향에 돌아가 평범한 주부가 되는 그녀의 삶을 먼발치에서 조용히 응원했을 거라는 이들. 이런 팬들을 둔 키사라기 미키는 행복한 아이돌이었을 게 분명하다.


가수, 배우, 아이돌, 만화가, 운동선수, 작가… 자기가 좋아하고 응원하는 이를 향한 일방적인 사랑의 길은 대개 공허하고 외롭다. 그러나 그 사랑에 의미가 없지는 않다고, 별처럼 반짝이는 누군가를 향한 작은 마음들 하나하나 분명히 가서 닿는다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덕질과 팬질을 하고 있는 모든 이들을 향한 따뜻한 이해와 포용을 담은 애정 어린 2시간의 위로. <키사라기 미키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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