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는 배구선수셨다. 185센티미터의 훤칠한 키에, 외모도 제법 준수한 편이셨고, '나'보다는 '팀워크',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남에게 먼저 양보하는 성격이셨다. 아버지 시절엔 시골에서 키가 큰 사람이 없다 보니 배구선수지만 육상대회, 축구대회, 농구대회 이른바 모든 스포츠 대회를 다 뛰셨다고 했다. 어쩌면 젊은 시절 그렇게 운동을 많이 하셨기에 지금까지도 병원 안 다니고 나름 건강을 유지하시는 거라 생각된다.
지금 내 키는 초등학교 5학년 때 키다. 시골에서 초등학교 운동회 날 운동장에 줄을 서면 매년 맨 앞줄에 섰고, 4학년 때도 5학년 때도 키가 크다는 이유로 맨 뒷자리 똑같은 짝꿍과 앉아야 했다. 어린 시절 기억이 필름처럼 선명하지는 않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은 반 짝꿍이었던 지영이와 1년 내내 짝꿍 하면서 책상에 금 가르고 유치하게 싸우던 기억을 떠올리면 가끔 웃음이 나온다.
아버지는 운동을 계속하고 싶으셨다고 했다. 농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배구부에 합격을 해 대학을 붙었는데(그 시절엔 한양대 배구가 제법 실력이 있었다고?...) 할아버지께서 집에 소주 한 짝을 사들고 오셔서 술 한 잔 하자고 하셨단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형편에 대학 등록금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안 되니 대학 입학을 포기하라고. 아버지는 그날 많이 우셨다고 했다. 그리고 실업팀에 들어가 운동선수 생활을 이어가셨다.
초등학교 5학년의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하교시간 직전에 학급 친구들에게 “자, 모두 일어나 보세요.”라고 말씀을 하셨다. 선생님 옆에는 낯선 아저씨 두 명 정도 계셨다. 나는 그때 뭘 하느라 그랬는지, 꾀가 났던 것인지 그냥 자리에 앉아있었고 내 짝꿍 지영이는 일어났더니 호명이 됐다. “지영이는 잠깐 교무실로 오세요.”
그날은 엄마와 피아노 학원 재등록을 약속한 날이었다. 피아노 학원을 열심히 다니다가 슬럼프가 와서 몇 달 쉬었는데, 다시 배우면 열심히 하겠노라 엄마와 약속을 하고 그날 오후 아빠 사무실에서 만나 학원을 등록을 하러 가기로 했다. 하굣길에 아빠 사무실에 갔더니 우리 반에 오셨던 아저씨들이 와계신 게 아닌가!
“현주야. 인사해. 아빠 친구분들이셔. 아빠와 같이 배구하셨던 분들이야.”
아! 그 정체모를 아저씨들이 배구하셨던 분들이구나.
“안녕하세요, 아까 학교에서 뵀어요.”
“어? 그래? 근데 우린 너를 못 봤는데.”
“아. 교실에서 안 일어나서..^^”
“그래. 너도 아빠를 닮아 키가 제법 크구나. 너, 지영이라고 아니?”
“지영이는 제 짝꿍인데요. 저랑 친한 친구예요.”
“그거 잘됐네. 너 운동할 생각 없어? 배구. 아빠 닮았으면 잘할 거야. 배구는 여자들이 하기 좋은 운동이야. 축구
나 농구는 몸싸움을 해야 하는데, 배구는 그렇지 않거든.”
아저씨들의 인자한 모습과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에 나는 마음이 끌렸다. 키는 컸지만 운동신경은 좋지 않았지만 “아빠를 닮았으면 잘할 거야”라는 말이 귓가에 꽂혔다. 아저씨들은 내게 미션도 주셨다.
“지영이랑 친하면 지영이를 잘 설득해. 너랑 지영이랑 같이 운동하면 정말 잘할 거 같아. 우리 학교는 실력 있는 선수들이 많아서 국가대표도 배출하고...”
아버지는 친구 분들에게 말씀하셨다.
“애한테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얼른 가라”라고.
나는 아빠 친구분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운동하면 때리지 않아요? 선수들 많이 맞고 그런 거 아닌가요?”
그날부터 고민을 했다. 배구선수? 지영이랑 같이 운동?... 혼자서는 자신이 없지만 왠지 짝꿍인 지영이가 같이 하면 잘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리고 아저씨들이 설명해주신 ‘기숙사’ 생활이란 것도 꽤 마음이 끌리는 대목이었다. 언니들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고 2층 침대를 쓸 수 있으며 밥 해주시는 아주머니들이 있고 등등...
학교에선 지영이를, 집에서는 아버지를 졸랐다. 태어나서 생전 관심도 없던 ‘배구선수’의 삶에 마음이 끌렸고, 내 마음속엔 이미 배구선수로 슈퍼스타가 돼 날아오른 느낌이었다고 할까?
아버지는 심하게 반대하셨다. 아버지도 선수 생활을 해봤고, 선수들을 가르쳐도 봤지만 운동은 정말 힘들고, 단체 기합을 받을 때 맞기도 하고 견디기 힘든 시간이 많다고 하셨다.
“아빠!, 그 아저씨들이 그랬잖아. 안 때린다고. 요즘에 누가 선수를 때려. 걱정 마세요. 한번 해볼게요. 지영이랑 같이 하면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아버지를 설득했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지영이와 전학을 갔다.
평택의 은혜 중고등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고, 우리는 서정리 초등학교 배구부에서 운동을 했다. 우리 1년 위에 선배 언니 중에는 같은 고향 출신의 언니가 한 명 있었다. 언니 부모님들은 언니를 운동시키겠다며 아예 평택으로 이사를 하셨고, 전폭적으로 딸을 지원하셨다. 한 살 많은 언니지만 운동선수의 세계는 군대와도 같았다.
“네!” “~습니다!” “~아닙니다!” “네!”
태어나서 부모님께도, 할머니 할아버지께도 존대를 모르고 커왔던 터라 운동선수들의 세계는 적잖은 문화적 충격을 줬다. 기숙사에서 2층 침대 생활을 처음 시작하던 날은 정말 꿈만 같았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짝꿍 지영이가 함께 갔으니까 괜찮았다. 그렇게 나는 마음만큼은 국가대표 같은 마음을 먹고 운동을 시작했다.
매일 13시간 가까이 새벽부터 심야 운동까지 하다 보니 체중이 점점 빠졌다. 지금 키에 몸무게가 41kg까지 빠졌으니 나중엔 정말 말라서 어디 부딪히면 멍이 들기 일쑤였다.
몸 풀기 운동부터 두 발을 땅에 딛고 강단에 딛는 운동, 체육관을 몇 바뀌 뛰고, 체육관 벽에 배구공을 때리며 스파이크 연습을 하고, 코치 선생님이 책상을 밟고 네트 위로 올라가 공을 때려주면 “마이! My”를 크게 외치고 어디든 뛰어가서 공을 받고..
정말 열심히 운동을 했다. 꾀 안 부리고 연습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내일 당장 국가대표라도 될 것 같았는데, 나에겐 운동선수로서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겁이 정말 많다는 것. 겁이 많아 지금까지도 놀이공원에서 바이킹도 못 타는데... 운동을 하면서 강단 위를 두발로 내딛고 하는 데 그걸 못했다. 무릎이 다칠까 봐, 다치면 피가 날까 봐...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났다. 남들은 다하는데, 나만 못하니까 코치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앞으로 갔다. 갑자기 코치는 내 두 뺨을 위에서 아래로 힘차게 갈겼다. 코피가 났다.
“코피 휴지로 닦고 와! 남들 다 하는데 왜 너만 못해. 이게 어려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해보겠습니다.”
그래도 못했다. 나는 무서웠다. 두발로 올라 뛰다가 무릎이 걸릴까 봐 두 발이 가볍게 뛰어지질 않았다.
다음 날이었다. 운동을 하는데 코치가 지영이 이름을 크게 불렀다. 지영이가 공을 못 받고 놓쳤던 것 같다. 코치는 책상 위 네트에서 내려와 구둣발로 지영이 복숭아뼈를 걷어 찾다.
우리 부모님들이 아이의 약한 부분이라며 때리지 말아 달라고 했던 부분만 집중 공격을 받았다.
그 무렵 기숙사 2층 침대 생활도 끝이 났다. 고등학교 언니들이 있는 1층, 바닥에 모두 이불만 깔고 생활하는 곳으로 내려가란 거였다.
‘이건 말이 다르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전학을 오지 않는 건데. 시작도 안 하는 건데...’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는 시간이 공포였다. 언제 코치가 호명할지 모르고, 불려 나가면 여기저기 얹어 터지기 일쑤고. 다른 친구는 코치가 배구공으로 몸에 계속 스파이크를 날렸다. 공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내 눈엔 코치가 그 친구의 머리, 어깨, 다리, 몸을 집중 공격하고 있었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운동 시작 전 몸 풀기를 하고 실내 체육관을 몇 바퀴 돌 때쯤 상상을 했다.
‘내가 체육관을 돌다가 문을 열고 뛰쳐나가 공중전화박스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코치가 때리는 사실을 알리면 어떻게 될까?...’
코치는 독심술이 있는 듯 말한다.
“여러분들, 부모님께 운동 힘들다. 선생님께 맞는다 얘기하면 그 얘기가 다 내 귀에 다시 들어와요. 주말에 집에 다녀올 때도 입 조심하세요. 여러분들 잘 되라고 때리는 건데, 그거 일러바치면 돌아와서 나한테 더 맞습니다.”
그 코치는 백 씨였다. 그래서 우린 백곰이라고 불렀다.
가끔 시합이 없을 때 2주에 한번 집에 다녀올 수 있었고, 집에 가는 날이면 나는 할머니 방에서 할머니랑 손을 잡고 잤다. 할머니는 왜 이렇게 말랐느냐며 밥을 안 해주냐 물으셨고, 나는 운동하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다 보니 먹어도 살이 안 찐다며 설명했다. 할머니 품에 안겨 잠이 들 때면 ‘엄마 아빠한테는 맞는 거 얘기 못해도, 할머니한테 얘기하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래. 그 새끼. 나쁜 코치가, 그래도 우리 잘되라고 때리는 거라잖아...
어린 마음에 솔직히 무서웠다. 단체 기합이 아니라 코치가 자기 기분에 따라 마구잡이로 애들을 때리는 건 분명 문제였는데, 그 문제제기를 했는데도 만약 계속 운동을 해야 하는 상황이면 어떻게 될지, 또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렸다가 코치 말대로 그게 코치 귀에 들어가고 아무런 상황 변화가 없다면 어떻게 될지... 어린 마음에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시나리오를 써 내려갔던 것 같다.
그렇게 석 달 정도 지났고. 내가 갑자기 아파서 며칠 입원을 했다. 함께 운동하는 친구들이 저녁에 야간 훈련 안 가고 병실로 찾아왔다. 엄마는 빵과 음료수를 건네면서 친구들에게 물으셨다.
“너네, 운동하는 거 안 힘드니?”
한 친구가 말했다.
“어머니, 저희는 현주가 아파서 참 고마워요. 현주 덕분에 운동 째고 병문안을 올 수 있었잖아요.”
“어머니, 저는 빵을 먹을 때도 유통기한 안 보고 먹어요. 유통기한 지난 빵 먹고 탈 나면 운동을 며칠 쉴 수 있잖아요.”
“어머니, 저는 횡단보도 건널 때 트럭이 와도 그냥 건너요. 사고나서 다치면 운동 쉴 수 있잖아요.”
해맑은 12살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는 엄마에게 공포영화 같이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도 해맑게, 표정 하나 안 바뀌고 아이들이 얘기하는 것을 보니 엄마는 뭔가 있다 싶으셨던 거 같다.
아이들이 돌아가고, 엄마는 병원에서 조용히 물으셨다. 왜 친구들이 그렇게 얘기하는 건지, 운동할 때 구타가 있는 것인지...
처음에는 엄마께 친구들이 장난친 거라고 말했던 것 같다. 그냥 웃자고 말했다고. 근데 엄마 표정은 진지하셨다. 몇 번이고 솔직히 말하라고 하셨고, 나는 끝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온몸이 멍 들어서 지영이와 주말에 목욕을 가려고 해도 새벽에 다녔다고.
낮이나 사람들이 많은 시간대에 목욕을 가면,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들인 줄 알고 누가 쳐다볼까 봐 창피해서 남들 없는 시간에 지영이랑 목욕을 다녔다고.
나는 매일 뺨을 맞고 코 피 흘리면 닦고 와서 또 맞았고, 지영이는 매일 구둣발 끝으로 조인트를 까이고...
엄마는 그날 충격에 잠을 못 드셨다. 그리고 다음날 퇴원 후 당장 학교장을 찾아가서 문제제기를 했고, 전학 절차를 밟았다. 엄마는 지영이 부모님께도 이 사실을 알렸고, 지영이도 같이 돌아가자고 하셨다.
솔직히, 나는 운동신경이 없었다. 겁이 많았고, 몸이 빠르지 않았다. 아빠의 DNA가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힘들게 운동을 계속하느니 몇 달 만에 포기하더라도 접는 게 맞았으리라.
6학년 새 학기에 맞춰 전학을 다시 왔고, 그때부터 매일 새벽 누가 깨우지 않아도 아침에 피아노 연습을 하고 등원을 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었고, 운동하는 정신력으로 뭐든 하면 성공하겠다는 생각이 어린 마음에 들었다. 얼마 후 사춘기가 일찍 찾아왔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고민했으며, 유학을 꿈꾸기 시작했다.
지금은 내가 배구선수였다는 사실은 내 짝꿍이었던 지영이만 알고 있다. 올해 초 마흔이 되어 30년 우정 기념 딸들을 데리고 여자 넷이 여행을 다녀올 때, 딸들에게 설명을 했다. 엄마들은 짝꿍인데 좀 친한 짝꿍이었어..라고.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고 보니, 그 시절 자식이 폭력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우리 엄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상상이 안 간다. 코치님, 감독님, 선배 언니들에게 우리 딸 좀 잘 봐달라며 딸 만나러 올 때마다 고깃집 예약하고, 그 시절에도 고깃값만 백만 원이 넘게 나오는 그 돈을 감당하면서. 딸이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하니까, 밀어주고 지원해주셨던 부모님..
기자가 되고 2007년 3월 체육부로 발령이 나서 스포츠를 취재할 때 배구도 몇 번 인터뷰를 갔다. 아빠 친구의 딸, 나보다 1년 위의 선배 언니는 국가대표이자 실업팀 에이스로 잘 나가고 있었고, 나는 기자가 되어 인터뷰를 하며 만났다. 바로 국가대표 이숙자 선수.
“언니, 저예요. 현주.”
“아, 기자가 됐다고는 들었는데.”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백 코치는 숙자 언니를 한 번도 때린 적이 없다. 숙자 언니 아버지가 체육관에서 매일 운동을 코치와 함께 지켜보고 계셨기 때문에. 단체로 엎드려뻗쳐 일렬로 혼날 때 정도만?...
숙자 언니가 몸 담고 있던 팀이 수원에 있었나?... 아무튼 그때 실업팀 경기 취재를 갔다가 숙자 언니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백 코치도 봤다. 그 팀인지, 경기도 배구협회의 뭘 맡고 있었는지 아무튼 이분 역할은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 현주예요.”
백 코치는 움찔했던 것 같다. 소식은 들었다면서, 배구도 담당하는 기자냐고 물었다.
내가 운동을 그만두고 다시 전학을 갔을 때 우리 엄마가 학교장은 물론 여러 기관에 문제제기를 하고 진상조사를 요구하셨으니, 백 코치도 당시 기억이 또렷하겠지. 그 시절 지영이와 6학년 같은 반에 와서 공부를 하는데 지영이는 얼마 지나 다시 배구를 하러 돌아갔었다. 지영이는 나보다 운동을 더 잘했고, 한 팀에 두 명이 빠지면서 팀 운영에 타격이 있었기에. 지영이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리고 6학년 2학기에 지영이는 다시 돌아왔다.
처음엔 백 코치가 바뀐 줄 알았던 것 같다. 더 이상의 구타는 일시적으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크게 바뀌지 않는다. 백 코치, 개인의 명예가 있기 때문에 개인적인 언급은 삼가겠다. 그런데 적어도 우리 부모님께서 목소리를 높이며 구타, 폭력의 원인에 대해 알아본 결과. 아이들의 운동 실력과는 무관하게 개인적인 스트레스, 감정을 많이 아이들에게 풀었다고 들었다. 그 원인이 가정 문제에 있는지, 처우 문제에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고 최숙현 선수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배구선수로 운동했을 때 생각이 많이 난다.
그 시절 공포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고인과 인연도 없고, 고인의 속사정도 이번 사건을 통해 알게 됐지만, 너무나도 안타깝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지영이와 현주처럼 이른 새벽 목욕탕을 찾아야 하는 어린 운동선수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폭력은 그 어떤 이유로도 용서돼서는 안 된다. 스포츠계에 관행처럼, 아니 이미 그런 관행은 사라졌다 말하면서도 뒤에서 폭력을 일삼는 어른들은 반드시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처벌받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