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가 집권 3년 차에 접어들 때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대검 중수부)는 작은 사건을 하나 들여다봤다. 이른바 저축은행 비리 사건.
대검 1층 민원실에는 수많은 고발장이 접수된다. 가끔 민원인들이 별관 1층 기자실을 민원실인 줄 알고 자료를 들고 찾아올 때도 있다. 여기가 아니라고 길을 안내하면, 기자님들도 내용을 알아야 한다며 두꺼운 종이 뭉치를 건넨다. 어떤 사건은 아무리 정성들을 들여 읽어보려 애를 써도, 도대체 이게 뭔 말인가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도 부지기수다. 그런데 이번엔 저축은행에 예금했다가 돈을 떼이게 생겼다고? 부실 은행이 법 망을 피해 각종 인허가를 받아냈고, 제2금융권인 줄은 알았지만 튼실한 은행인 줄 알고 이곳을 이용했던 서민들은 하루아침에 은행이 문을 닫게 돼 예금한 돈을 날리게 됐다고?...
부산 저축은행을 비롯해 솔로몬 저축은행 등 모든 저축은행의 비리는 성격이 비슷했다. 서민들이 평생 모은 돈, 믿고 맡긴 돈으로 정관계 인사들에게 불법대출을 해줬고, 자신들의 사업 확장을 위해 SPC, 일명 특수 목적 법인을 세워 골프장도 짓고 해외 사무실도 운영했다. 저축은행 측은 법의 감시를 피해 정치인과 금융권 등 ‘끈’이 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각종 로비를 서슴지 않았다.
“에이, 그래도 그렇지. 대검 중수부가 움직이는데 저축은행 같은 작은 사건을 하겠어요? 그냥 대검에 진정 들어온 사건들을 검토하고 지방청으로 내려 보내겠죠.”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이 사건은 작은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권력형 비리의 모든 것을 갖춘 ‘비리 종합 선물 세트’ 쯤 됐던 것이다.
부산 저축은행 압수수색 속보가 떴다.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팀장에게 보고를 했고, 주말에 부산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이미 K본부에서 모 기자가 부산으로 내려가 어떤 목록이 있는 수첩을 확보하고 단독 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미 압수수색을 했는데 현장에서 무엇을 건지겠나 싶기도 했지만, 마음이 급할수록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현장으로 갔다.
(2011년 6월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검찰청 기자실에서 우병우 대검 수사기획관이 부산저축은행 예금 부당 인출 사건과 관련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좌측 두 번째 필자.)
부산역에 내리자마자 바로 눈에 띄는 토요코인 호텔에 방을 잡았다. 그리고 부산저축은행 초량 본점으로 이동했다. 뽀글뽀글 파마한 아주머니부터 부산저축은행 돈을 맡겼다가 피해를 본 분들이 은행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미 대검 중수부 관계자들은 압수수색을 마치고 떠난 뒤였다.
“기자고 뭐고, 기자 할아버지도 건물 안으로 못 들어갑니다.”
아들 결혼 자금, 딸 대학 등록금 등 평생 피땀 흘려 모은 돈을 날릴 위기에 처한 분들은 정말 눈에 보이는 게 없어 보였다. 기자가 조금이라도 취재의 적극성을 띄면 한 대 맞을 것 같은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나 진정성 있는 대화를 시작했다. 어떤 취지로 부산에 왔으며 지금 이 사건을 왜 다뤄야 하는지, 시기를 놓치면 어떻게 되는지. 위원장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리고 모세의 기적처럼 부산 아주머니들이 점거하고 있는 사무실 곳곳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자 여러분, 이 기자분께는 우리가 협조를 합시다. 검사님들이 어떤 PC에서 오래 앉아있었는지 기억 나시는 분? 어느 방에서 가장 서류를 많이 가져왔는지 생각나시는 분?”
저축은행 피해자 분들은 사무실 곳곳을 알려줬다. 컴퓨터 여러 대가 놓인 곳에서는 검사 몇 명이 어느 컴퓨터에 몇 분 앉아있었다는 설명의 디테일도 빼놓지 않았다. 역시,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이 맞았구나! 일부 컴퓨터엔 정관계 로비 명단이 있었다. 명절에 누구에게 뭘 선물하고 뭘 보내고... 뿐만 아니라 금감원 고위 관계자가 부실한 저축은행 인허가 문제를 눈감아 주는 대가로 자기 아내가 일하는 보험회사에 저축은행 회사 차량을 비롯해 각종 보험을 들게 한 사실들도 나왔다. 내려간 첫날부터 기사를 써 내려갔다. 그해 5월은 기자로서 평생 할 수 있는 단독을 원 없이 했던 것 같다. 중앙일보 1면에 단독, 단독, 단독...
검찰 취재를 하면서 문건을 훔치거나, 파쇄기를 주워 붙이는 방식으로 취재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압수수색 현장에 검사들이 흘리고 간 압수수색 목록을 주워서 수사 흐름을 파악한 적은 있다. 검찰청에 소환 조사를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입을 열게 하는 정공법만 썼다.
소환 대상자들의 비서, 운전자 등을 접촉할 방법을 찾고 안 될 경우 검찰청에 소환돼 조사받고 돌아갈 때 무작정 차 문을 열어 옆에 타고 물어보기도 했다. 한 번은 운전기사 A 씨 차를 무작정 탔다. 이분은 내리라고 소리쳐도 기자가 막무가내로 질문을 쏟아내자, 힘들게 입을 열었다.
“기자님, 그 노래 아시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그 노래 주인공 오빠를 찾아보세요. 그 오빠도 이 사건과 관련되어 있어요.”
부산저축은행 비리 수사 과정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박기순 씨의 친오빠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다. 바로 해동건설 박형선 회장이었다. 그분은 곧 구속됐다.
검찰 수사 과정을 취재하는 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을 다루는 것 같다. 선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 알아내야 하는 기자의 숙명 같은 것.
한 번은 유선번호로 저축은행 고위 임원실에 전화를 걸었다. 여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통성명을 했더니 전화를 바로 끊는다. 또 걸었다.
“저기요. 이상한 기자 아니고요. 제가 쓴 기사 검색해보시고, 제가 놓치는 부분이나 잘 못 접근한 부분이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제 연락처 메모 부탁드려요. 공일공...”
그 임원실은 검찰 수사관들이 매일 지키다시피 했던 곳이다. 여비서도 수차례 대검을 방문조사를 받았는데, 눈치 없이 대낮에도 전화하는 기자가 불편했을 수 있다. 그래도 전화를 걸었다. 또 걸었다. 그리고 어느 날, 부산 지역번호로 된 전화가 왔다. 여비서가 공중전화박스에서 전화를 걸어준 것이다.
비대위원장, 운전기사, 비서... 이분들은 발로 뛰는 기자에게 측은지심을 느꼈던 것 같다. 어쩌면 기자로서 애쓴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 은진수, 물방울 다이아
부산저축은행의 정관계 로비 명단은 윗선을 향해갔다. 그리고 어느 날, 금감원 고위 관계자들의 이름을 넘어 이명박 정부의 핵심 측근인 은진수 감사위원(차관급) 이름까지 등장했다.
2011년 5월 27일 자 1면.
“은진수에게 물방울 다이아 줬다”는 기사는 파급력이 컸다. 당시 중앙일보 사회부장과 내가 크로스로 체크해서 썼던 기사였는데, 바이라인은 법조팀장과 내 이름으로 나갔다. 법조팀장은 해외 출장 중이었고, 그 1면 기사가 있은 후 은 위원은 소환 조사를 받았고, 구속영장 실질심사도 포기한 채 곧바로 구속됐다. 얼마 후 은진수 위원은 구속됐다.
은진수 위원은 당시 구속영장 실질심사도 포기했다. 이 경우 판사가 구속영장을 발부할 확률은 거의 100% 였다. 구속영장 실질심사 예정일 직전, 은 위원 변호를 맡은 서현 변호사가 대검 기자실을 찾았다.
변호인이 전달한 핵심 내용은 “은 위원은 다이아몬드를 받은 사실이 없고, 중앙일보 기사는 오보다. 반드시 법적 책임을 묻겠다.”였다. 대검 기자실의 수많은 기자 중에 그 기사를 쓴 기자도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서현 변호사도 알고 있었을까. 서 변호사는 작심한 듯 은 위원의 다른 범죄 혐의에 대해서는 모두 설명하며 인정을 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만큼은 받은 사실이 없다고 강조했다. 상당히 이례적인 상황이다.
은진수 위원이 정식 재판으로 넘겨지기 전쯤, 서초동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은진수 공소장에 ‘다이아’ 부분이 명시되지 않을 것 이란 거다. 나는 정말 오보를 낸 기자가 되는 것인가?... 만감이 교차했다. 그리고 계속 사실관계를 파악하는데 힘썼다.
저축은행 로비스트 윤여성이 은진수에게 건넸다고 하는 돈은 모두 7천만 원.
날짜와 금액을 쪼개서 2천3천2천 중에 3천만 원이 다이아몬드 구입 비용이었다. 로비스트는 자신의 친구가 운영하는 종로 금은방에 은 위원을 직접 데려가서 사줬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더 디테일한 구입 사정 이야기는 개인의 명예와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언급은 않겠다.)
은진수 위원은 만기 출소 후 중앙일보 임현주 기자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걸었다.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중앙일보 기사가 사실이 아니라고, 본인은 다이아를 받은 사실이 없다고 했다.
나는 이미 2011년 9월에 MBC로 이직을 했던 터라 2013년, 2014년에 민사 소송을 준비하는 건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중앙일보 법률팀의 모 변호사는 “지금 MBC 소속이시니 MBC 변호사랑 사건 대응하시라”는 얘기까지 했다.
“아니 제가 중앙일보에서 쓴 기사를 MBC 변호사와 왜 대응합니까. 제가 개인 블로그에 글을 쓴 겁니까. 1면에, 그것도 공동 바이라인 아닙니까. 부장이랑 팩트를 크로스 체크했다고요.!!!”
길고 지루한 싸움이 시작됐다. 그래도 다행인 건 공소장에 금액만 적힌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던 터라 취재 수첩에 취재 날짜와 내용들을 꼼꼼하게 기록해뒀다. 그리고 혹시 모를 소송에 대비해 그 취재 수첩은 이삿짐 귀중 품목으로 늘 보관해 놓았었다.
2012년 9월, MBC 7개월 파업 후 결혼을 했고, 2014년 9월의 어느 날 만삭의 몸으로 서울 중앙지법 법정에 섰다. 판사님 앞에서 은진수 위원의 변호인은 내게 고함을 질렀다.
“당시 그런 얘기를 한 사람이 윤석열(중수 2 과장)입니까. 우병우(수사기획관)입니까”
“저기요. 변호사님. 정중하게 말씀 부탁드립니다. 기자에게 취재원 보호는 생명입니다. 저에게 아무리 고함을 치셔도 저는 취재원은 밝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시 로비스트의 진술은 이러했으며, 다른 사정으로 공소장에 그 부분이 금액만 기제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취재원 보호는 생명이지만, 원 소스가 대검 중수부 과장이거나 수사기획관은 아니었다. 외곽 취재를 통해 확인을 거치는 작업을 했던 것은 맞지만, 다이아 종류가 물방울 다이아는 아니라는 사실에 우병우 기획관과 고성이 오갔던 기억도 난다.
중앙일보에서 배정해준 A 변호사는 마치 영화 속 첩보 작전을 수행하듯이, 내 취재 수첩에 기록된 날짜별로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를 열람해 꼼꼼히 메모해오셨다.
“변호사님, 이 날 은 위원이 ***을 면담했다고 들었습니다. 조사받는 과정에서 분명히 뭔가 있었을 거예요. 기록을 이 날짜 앞뒤로 꼼꼼히 살펴보시면 수사 기록이 ‘뚝’ 끊긴 흔적이 나올 겁니다. 꼭 좀 잘 살펴봐주세요.”
A 변호사는 정말 열심히 변호를 준비해줬다. 긴 싸움이 끝났고, 재판부에선 기사 보도 당시 은진수 위원의 반론을 싣지 않은 부분만 책임을 인정했고, 결과적으론 중앙일보가 이긴 싸움이었다.
A 변호사는 회사에서 내야 할 소송 비용까지 은 위원 측에서 다 내게 되어있어서 결과적으로 이긴 것이라며 기뻐했다. 민사소송이지만 몇 년 동안 소송 준비를 하면서 심적으로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은 위원의 사건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집권 3년 차, 레임덕은 은진수 위원이란 측근의 비리로 시작됐다. 그래서 집권 3년 차가 참 중요하단 사실도 알게 됐다. 취임 직후는 검찰과 정부도 허니문 기간을 보내고, 그 이후 검찰은 살아있는 권력을 견제한다.
# 집권 3년 차, 다시 서초동
오늘 인사발령이 났다.
오는 29일 자로 다시 서초동 검찰청을 출입하게 됐다. MBC 법조팀에서 검찰 법원 관련 취재를 해서 보도하게 된다. 작년 이맘때 법조팀에서 뉴스 PD로 인사 발령이 난지 꼭 1년 만에 다시 서초동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1년 전과 지금, 또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그 어느 때 보다 검찰 출입 기자로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중요한 시점인 것은 맞다.
3년 전 법조팀 발령을 받고 서울지방변호사협회에 기고했던 ‘우병우 생각’이란 글을 공유한다. 앞으로도 생각하는 기자, 고민하는 기자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