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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Jun 19. 2020

새내기 탈 수습기

여기자 협회에 실린 '탈 수습기'

 여기자 협회에선 매년 초에

'여기자'라는 제목의 책자를 발간합니다.

저는 2년 차 백수에서 기자가 된 뒤 경찰서를 취재하는 사회부 기자, 일명 '사츠마리' 기자 생활을 했고, 경찰서 말진 기자실에서 쪽잠 자고 밤새 일하는 '하리꼬미'생활했습니다. 당시 여기자 협회 요청으로 작성했던 탈 수습기도 올립니다.




#수습기자 일


10월 9일 출정식.

기본적으로 폭탄주 5잔씩 마신 후 각자 주량에 맞게 선배들의 잔을 받았다. 모두들 긴장한 탓에 선배들이 주는 술잔은 거의 다 비웠다. 입사 당시 남자 동기들의 평균 주량은 소주 2병, 여자는 1병이었는데 이날 이후로 동기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주량을 반 이상 줄여서 이야기하게 됐다.

새벽 3시 30분. 동기 몇 명은 술에 취해 이미 의식을 잃었다. 갑자기 술자리는 정리하는 분위기가 되면서 라인이 정해졌다. 나는 종로 라인이었다. 며칠 전 회사에서 받은 ‘수습기자 매뉴얼’을 꺼내 들고 택시를 탔다. 입에서는 술 냄새가 가득하고, 속은 울렁거렸다. 그래도 정신만은 놓을 수 없었다. 총알택시를 탄 것도 아닌데, 밤길이라 차가 없어 그런지 서대문에서 종암경찰서까지 15분밖에 안 걸렸다. 종암서부터 돌기 시작했다.


경찰을 ‘형님’이라고 부른다는 말은 들었지만, 막상 아버지뻘 되는 아저씨들을 보니 형님이란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소속과 이름을 밝히고 들어갔다.

경찰들은 모여서 웅성웅성 대화를 나눈다. 한동안 조용하더니 이제 다시 수습이 돌기 시작한 것 같다며, 자기들끼리 피곤하고 귀찮아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종암, 성북경찰서는 당직 기록부가 있어서 사건, 사고를 빠뜨리지 않고 챙길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종로경찰서에 도착했다. 종로서 형님들은 까칠한 편이라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역시 소문이 맞았다. 큰 소리로 웃으며 인사하고 명함을 줘도, ‘왔냐?’는 식으로 반응이 없었다. 데스크에서는 뭔가를 열심히 두드리는데,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하면 기자 출입금지 구역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아침 보고 시간 다가오는데 보고할 것이 없다며 하나만 알려달라고 부탁하자, 얘기 안 되는 폭력사건 밖에 없다며 가라고 했다. 물러설 수 없었다. 얘기 안돼도 좋으니 몇 개만 알려달라고 했다. 안 그러면 선배가 라인 안 돌았다고 의심한다고 선배를 팔았다.


그렇게 단순 폭행, 상해 등 몇 건을 챙기고

 6시 30분에 첫 보고를 했다.

종로 라인 1진이 전날 야근이어서 혜화 라인 선배께 전화를 걸었다. 기자수첩에 메모한 것을 보면서 사건 보고를 했더니, 야마 잡아서 5분 후 다시 보고하라고 했다. ‘야마’라는 말뜻을 몰랐던 나로선 순간 당황했다. 동기 중에 가장 똘똘해 보였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야마가 뭔지 알아?”


“응, 나도 야마가 뭔지 모르는데 아마 개요를 잡아서 핵심만 보고하란 말인 거 같아.”


다시 사건사고 내용을 정리해서 육하원칙에 맞춰 야마를 잡고 보고를 했다. 간신히 한 고비를 넘겼다. 사건사고를 보고하고 났더니 선배가 묻는다.


“소방서는?”


갑자기 앞이 캄캄해졌다. 소방서를 챙겨야 하는지 몰랐다. 매뉴얼을 꼼꼼히 읽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선배께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경찰서 3군데 도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려 소방서는 갈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선배는 귀신같이 매뉴얼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을 알아채고 매뉴얼 내용을 정확히 확인하고 어디를 체크해야 하는지 다시 보고하라고 했다.


첫날, 첫 보고는 9시가 되도록 끝날 기미가 안보였다. 종로 1진 선배가 전날 야근을 해서 혜화 라인 선배께 보고했던 건데, 우리 라인 1진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라며 위안을 삼았다.

그렇게 삼일 연속 제대로 눈 한번 못 부치고 밤에는 경찰서, 낮에는 집회 시위 현장을 찾아다녔다.

나흘째 되던 날이다. 머리에 기름이 좔좔 흐르고, 세수는 언제 했는지 피부가 거칠게 느껴졌다. 정말 씻고 싶은 욕구가 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아침 보고를 마치니 선배가 식사하고 라인에 대기하고 있으라고 했다. 종암서 2분 거리에 있는 찜질방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핸드폰을 검은 비닐봉지에 넣고 찜질방으로 향했다. 일회용 샴푸, 린스 등을 사서 초스피드로 샤워를 했다. 혹시나 비닐봉지 안에 핸드폰 벨이 울리면 어쩌나 새가슴처럼 그렇게 마음 졸였다. 다행히 9시까지 선배의 전화는 한 통도 없었다. 행복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씻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시간이 지나니 틈틈이 잠을 자는 방법도 터득하기 시작했다.


종로 라인을 혼자 돈지 일주일 만에 KBS 경력기자들이 하리꼬미를 시작했다. 드디어 동지가 생겼구나 싶은 마음에 감격이 밀려왔다. 난 그 사람보다 겨우 일주일 먼저 종로 라인 생활을 한 것인데, 마치 종로 1진이라도 된 것처럼 종로 라인 형사들의 특징, 라인의 특성을 설명해줬다. 라인에 적응이 될 무렵 캡께서 라인을 바꾸셨다. 이번 수습은 특별히 서울시내 9개 라인을 모두 경험해보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두렵기도 했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부담감과 이제 막 얼굴 익히고 정들게 된 형사와의 이별이 아쉬웠다. 언젠가는 다시 종로 1진으로 오겠다며 인사를 하고 중부 라인으로 옮겨갔다.


남대문, 중부, 용산. 용산경찰서에는 외국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한 번은 러시아 사람이 절도미수로 들어왔는데, 폭력 4 팀장이 그 사람을 강제 추방시키겠다고 했다. 남자는 오케스트라 단원이었고, 자신은 슈퍼에서 물건을 훔치려 했던 게 아니라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어서 들어갔던 것뿐이라고 했다. 조사가 끝난 후 4 팀장에게 부탁해 러시아 사람과 대화를 더 나누기 원한다고 했다.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딱한 사연이 있었다. 그리고 남자가 속했던 오케스트라단의 임금 문제도 있었다. 팀장에게 그 사람의 사정을 말했고, 강제 추방될 사람은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오케스트라 쪽에서 담당자가 나와 러시아 사람의 신원보증을 섰고, 그렇게 그 남자는 풀려났다.


정확히 사건 발생 4일 후. 또 같은 남자가 불려 왔다. 그때는 이미 내가 중부 라인에서 마포 라인으로 옮긴 후였다. 하리꼬미 생활 5주 차 만에 거쳐 왔던 라인에서 다시 취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번에는 러시아 남자가 3만 원 상당의 위스키를 편의점에서 훔친 것이다. 경찰은 러시아어 통역이 없어서 6시간째 통역원에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갑자기 나를 보더니 경찰이 옆에 앉아서 통역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8년간 러시아에서 생활했던 까닭에 물 만난 고기처럼 한 시간 넘게 통역해주고 통역비 2만 5천 원을 받았다. 취재 내용은 경향신문만 단독으로 기사화됐고, 통역비로 받은 돈으로 용산서 폭력팀에 통닭 2마리를 쐈다. 수습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고 뿌듯했던 순간이었다.


다시 마포 라인으로 돌아와 은평, 서부, 서대문, 마포를 매일 챙기는데 8주 차가 넘어가니 이제 얘기 안 되는 단순폭력사건은 보고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 번은 야근 보고를 하는 데 서부서에 절도 1건이 들어왔다. 가정주부가 슈퍼마켓에서 2천5백 원짜리 냉동만두를 계산 안 하고 가져가다 직원에게 붙잡힌 것이다. 생계형 절도인지 알아보려고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경찰은 충동에 의한 절도라고 했다. 지갑에 8만 원 정도 돈이 있었고, 아주머니는 슈퍼에 손님이 많다 보니 자기 하나쯤 만두를 훔쳐가도 직원이 모를 줄 알았다고 했다. 이 내용을 그대로 야근 선배에게 보고하는데, 선배는 그 사람의 가족관계 등 더 알아보라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얘기가 안 되는 건인데 어쨌든 선배 지시가 있으니 선배 말을 따랐다. 야근 2차 보고 때 추가 취재한 부분을 이야기하는데 선배가 묻는 질문에 곧바로 대답을 했더니, 선배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 냉동만두 1 봉지에 만두 몇 개가 들어있던 거래?”


할 말을 잃었다. 난 그 부분까지 미처 확인하기 못해 죄송하다며 전화를 끊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죄송할 내용이 아니었다. 갑자기 그 선배에 얽혔던 수습 초기 야근 보고가 떠올랐다. 야간에 술에 만취한 사람이 택시를 타자마자 이유 없이 택시 유리창을 주먹으로 쳐 앞 유리가 금이 갔던 사건이었다. 취재 내용을 보고했더니 선배가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그 승객이 택시 앞유리의 왼쪽 부분을 친 거야, 오른쪽 부분을 친 거야. 손가락에 피가 났다면 어느 손 몇 번째 손가락에 피가난 건데? 피는 얼마큼 흘렸데?”...


그 이후로 그 선배가 야근하는 날이면 냉동만두 몇 개 들었는지 고민해야 할 정도로 긴장하곤 했었다.

어느덧 수습 생활한 지 3개월이 지났고, 사회부에서 경찰기자 생활한 지 12주가 됐다. 야근 보고 시간도 풀려서 이젠 출퇴근도 가능해졌다. 돌아보니 영화 속 필름처럼 기억이 생생하게 펼쳐지는데 언젠가 나도 선배가 돼 웃으면서 후배들과 수습 시절 이야기를 나눌 날이 올 것을 기대해본다.      



최근 몇 년 전부터 밤샘 취재 문화가 사라졌다. 수습기자들의 인권  문제  차원에서 하리꼬미 없이 출퇴근 형식으로 바뀌었는데. 요즘 이런 이야기를 후배들과 나누면 나는 그냥 '꼰대' 확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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