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시험을 준비하던 시절 다음 카페 '아랑의 언론고시'라는 곳에서 다양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아랑에 올라온 스터디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도 하고, 직접 스터디원 모집 공고도 내보고. 그런데 아랑 카페가 요즘은 전처럼 언.시.생들의 활동이 많지 않다고 들어서, 아랑 카페에 썼던 언론사 합격 후기를 브런치에 옮겨봅니다. 2006년 8월에 작성한 글입니다. (언론사 지원자 분들은 참고하시라고 올립니다,)
2년 전의 나
만으로 꼭 2년이 됐습니다. 정확히 2004년 9월 초에 스터디를 시작했습니다. 두꺼운 SPA(시사 상식 책)를 사서 한숨만 푹 쉬던 기억이 납니다. 잠재적 실업자인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SPA를 챕터별로 나눴습니다. 남들은 분책해서 사용하던 데 저는 그 돈도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내가 볼 것인데, 예쁘게 나눈 들 무슨 소용 있나 싶어 문구용 칼로 챕터를 나눴습니다. 실력보다는 기자가 되겠다는 의지만 앞서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몇 번의 스터디 실패
처음 스터디원을 만났을 때 설렘이 가득했습니다. “이제 이 사람들과 함께 뜻을 향해 나가면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스터디원 중 경험이 많았던 한 사람이 “논술을 쓰는 수준이 너무 다르다”며 스터디 해체 선언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소위 언론고시를 준비한다는 이 바닥에서는 기본적인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스터디 하나 제대로 구하는 게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한 번은 ‘논술’만 따로 하는 스터디를 구했습니다. 모 대학 국문과 학생들이 중심이 됐던 스터디인데, 첫날 제 글을 보고 첨삭을 해주던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른 길을 찾아보시죠”라는 조언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3개월 동안 꿋꿋하게 모임에 나갔고, 첨삭 시간에 내가 다른 사람의 글을 첨삭해 줄 순 없었어도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받아 적고 집에 와서 여러 번 옮겨 쓰기를 해봤습니다. 그날 가장 잘 쓴 글을 뽑아서 베껴 써보고, 또 제 글의 문제점을 고쳐나가도록 노력했죠. (한겨레 신문사 한효석 씨의 ‘이렇게 해야 바로 쓴다’는 책에 도움이 컸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스터디마저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스터디를 직접 만드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4학년 졸업을 앞둔 학생과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스터디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아랑 카페에 냈습니다. 그때 여러 명의 지원자들의 스터디 지원서를 받으면서 5명 정도 뽑았습니다. 감사하게도 모두들 ‘의지와 열정’ 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실하게 맡은 과제를 충실히 해왔고, 철저하게 벌금제도를 유지하면서 긴장의 끊을 놓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이 스터디가 자리를 잡을 때쯤 ‘논작’ 스터디만 하나를 더 구했습니다. 그렇게 좋은 사람들과 귀한 인연을 맺어 공부를 했습니다.
방송 아카데미 중도 하차
졸업 후 기자 시험을 준비하다 보니 어딘가에 적을 두지 않아 불안한 마음이 컸습니다. 그래서 모 방송사 아카데미를 등록해 ‘방송기자’ 수업을 듣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름대로 서류전형과 면접을 통해서 들어갔던 아카데미였는데, 시스템과 체계가 전혀 잡혀있지 않은 것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그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수업을 들은 지 3일 만에 바로 ‘환불’ 신청을 했습니다. 정말 웬만한 아카데미보다 제대로 된 스터디 하나가 훨씬 낫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나왔습니다.
2005년 나
언론사 시험 준비만 하던 저의 하루 일과는 이러했습니다. 아침 5시 30분-6시 기상. 책가방을 메고 학원을 향해 7시에 CNN 청취를 한 시간 들은 후 8시부터 신문을 보며 상식공부를 했고, 오후에는 좋은 글을 찾아서 옮겨 쓰는 것을 했습니다. 스터디는 일주일에 2번 정도 했기 때문에, 스터디 과제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금방 갔죠.
실력은 없었지만, 노력은 했습니다. 그 노력을 인정한 몇몇 사람들이 좋은 책을 추천해주고, 조언을 많이 해줬습니다. 제 장점 중 하나라면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의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정말 막막할 때 항상 주변의 선배나 멘토를 찾습니다. 내 공부 방법은 이러이러한데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능률은 안 오르는 것 같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 달라. 정말 구체적으로 묻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도 안타까운 마음에 조언을 해줍니다. 자신의 성공담, 주변의 사례를 이야기하면서 말이지요.
2005년 동안 저는 총 6번의 시험을 봤고, 6번 모두 필기에서 낙마했습니다. 당시 저는 ‘내가 가고 싶은 회사가 아니면 시험을 안 본다’는 소신을 갖고 방송국 2곳, 신문사 3곳, 인터넷신문 1곳을 시험 봤습니다. 공고가 난다고 무조건 지원하지 않았던 이유는 떨어지는 기록만 늘리면 자신감만 잃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렇게 2005년을 보내며 자신감을 많이 잃어갔습니다.
2006년의 새 출발
저는 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실무 관련 경력이 많았습니다. 작은 지역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했고, 방송사 통신원, 신문사 사이버리포터 등 다양한 경험을 맛봤습니다. 그때만 해도 자신감 하나로 똘똘 뭉쳐있던 아이 었는데, 언론사 준비기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점점 나 자신을 작고 초라하게 느끼게 됐습니다. 이런 상태를 유지하다간 나 자신이 망가질 것 같아서 모 토론 프로그램의 시민논객을 지원했습니다. 지원서와 면접을 통해서 시민논객 활동을 시작했고, 매주 다양한 주제로 토론을 하면서 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정확히 알지 못하면 토론에서 밀릴 수밖에 없고, 다양한 팩트와 근거가 없다면 내 말에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처음에는 방송 카메라 불만 들어와도 벙어리처럼 얼어있던 제가, 시민논객 활동 3개월이 지나니 카메라 빨간 불(생방송의 표시)을 봐도 아무런 떨림 없이 질문하는 논객으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렇게 토론 방법을 익히면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의 기회
올해 상반기는 시험을 많이 볼 수 없었습니다. 연초에 인터넷 신문사에 입사해서 3개월 정도 기자생활을 했고, 또 7월 말까지 모 라디오 프로그램의 방송작가를 했기 때문입니다.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그 짧았던 경험들이 필기 통과 후 실무능력 평가 때는 확실히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막연히 언론사에서 어떤 사람을 요구한다는 상상보단, 구체적으로 언론사에서 원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거기에 초점을 맞춰 합숙을 들어갔습니다.
집단토론 시간에는 시민논객의 경험을 살려서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카메라 빨간불이라고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긴장을 풀며 토론했습니다. 1박 2일이란 시간이 결코 긴 시간이 아니기에 그 시간 동안 최대한 ‘나’라는 사람의 열정과 준비과정을 어필하도록 노력했습니다. 회식 시간에 술 마시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고, 자신의 장기를 보여주는 시간에는 조용히 자신 있는 노래를 한 곡 불렀습니다.
문제는 북한산이었습니다. 등산을 한번 해본 경험이 없어서 조금만 뒤쳐져도 낙오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솔자 뒤를 바짝 따라갔습니다. 그렇게 산행을 마치고 합숙평가 결과를 기다리는 데 최종면접 대상자 명단에 제 번호가 있더라고요. 최종면접 당일에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되고 떨렸습니다. 면접을 보러 가기 전 워드 파일을 열어서 ‘내가 면접관이라면 어떤 질문을 할까?’ 생각하며 질문을 나열해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3-4줄 정도로 정리했습니다. 짧고 간단하게, 하지만 임팩트 있게 말이죠. 질문에 답하다 보면 그 답에서 또 다른 질문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럼 그 질문도 추가해 넣었습니다. 나중에 최종면접 후에 돌아와서 그 파일을 다시 읽어보니, 면접관님들의 질문을 제가 70% 정도는 예상했던 것이었더라고요. 하지만 합격자 발표 날까지 정말 불안하고 떨리는 마음은 여전했습니다. 밤마다 잠도 안 오고, 공부도 손에 안 잡히는데 ‘최종 합격’ 발표된 게 아니라 다른 신문사, 방송사 필기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그렇게 요동하는 제 마음을 달래며 조용히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감사하게도 인사팀의 ‘합격’ 전화를 받고, 눈물이 뺨을 적셨습니다.
어른들은 말합니다. 인생에 기회는 몇 번 온다. 그 몇 번을 그냥 다 놓치는 사람이 있고, 한 번의 기회를 잡는 사람이 있다고. 저는 후자에 속한 것 같습니다. 이번 시험이 정말 제겐 좋은 기회였고, 그 기회를 잡기 위해 그동안 준비했던 제 에너지를 마음껏 발산했습니다. 언론사 준비생의 길은 크게 두 갈래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시험을 여러 번 치르다 포기하고 그만두는 경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뜻을 이루는 경우.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모두 후자가 되길 바랍니다. 정말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했던 저도 ‘꿈’을 이뤘는데, 여러분들이라고 못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상식 논작 스터디만 하지 마시고, 토론 스터디도 하시고 다양한 경험도 쌓으시기 바랍니다. 막상 면접에 가면 ‘기자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지냈나?’라는 질문을 받을 때 ‘저는 줄곧 스터디만 했습니다’라고 답하는 사람보단, ‘저는 인턴기자 활동도 해봤고 **실무경험도 많이 쌓았습니다’라고 답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
참, 그리고 제가 어제 알게 된 사실인데 자기소개서도 언론사별로 점수화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소개서는 최종면접에서 정말 중요한 자료로 쓰입니다. 여러분도 단 한 번의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불타오르는 열정 속에 작은 것(자소서)부터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원하는 꿈을 꼭 이루셨으면 합니다.
열정이란 그 이름
저는 22살에 기자의 뜻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대학교 4학년 때부터 대학원 시절까지 언론과 관련된 실무 경험을 쌓았던 것도 한 곳을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열정’이란 이름은 내가 기자가 될 수 없는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단 하나의 희망’으로 나를 이끌어줬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다’는 열정이 있다면 그 꿈은 언젠가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 것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것인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치러야 하는 대가가 큽니다. 그렇지만 그만한 가치를 지불할 수 있는 의지가 있으시다면, 꼭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셨으면 합니다. 저도 이제 새로운 세상에 첫 발을 내딛는 초년병이 됐습니다. 열정이 앞섰던 사람이라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 열정과 초심을 기억하면서 끝까지 열심히 활동하는 기자가 되겠습니다
추억의 명함. 귀국 전 LG상사 러시아 법인에 근무할 당시 명함과 2년 차 백수 중간에 시선집중 작가로 일했던 명함.
15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합격 후기를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청년 백수로 공부하던 시절 중랑구 면목동의 한 옥탑방에 살았는데 고대 안암역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서 매일 새벽 첫차를 타고 공부하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브런치에 첫 글로 쓴 "당신이 살던 나라로 가세요." 글에 등장하는 학생증을 빌려준 친구에게 브런치를 링크걸어 보내며 "고맙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고마워. 덕분에 편하게 공부했다"라고 말했더니, 이 친구는 "에이 뭘,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줬을 뿐인데. 지금 같아도 아마 나는 똑같았을 거야."라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학연 지연 없이도 지금까지 기자 생활을 무탈하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가 꼭 학연 지연이 있어야만 자리 잡고, 인정받는 사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15년 전 저처럼 '기자'를 꿈꾸고 있는 분이 있으시다면, 포기하지 마시고 꼭 그 품은 뜻 이루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