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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Jun 17. 2020

장미란과 김성근

우정의 징검다리가 되다

2008년 가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경기를 앞두고 플레이오프 경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당시 시즌 1위로 여유롭게 한국시리즈 경쟁 상대를 기다리고 있던 SK 김성근 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상대팀 전력분석도 해야 하고 SBS 야구 해설 요청도 있어서 10월 17일 플레이오프 2차전 두산 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 경기에 참석차 서울(잠실구장)을 올라오신다며 시간 되면

저녁을 같이 하자고 하셨다.    

  

“감독님, 제가 아끼는 동생이 있는데

 마침 그날 잠실에 가요.

혹시 같이 봬도 괜찮을까요.”


“그래? 누군데.”


“장미란 선수요.

그날 두산 삼성전에서 시구를 한 대요.”


“아, 장미란. 그 역도 장미란?

 함께 보면 좋지.”     


그날 저녁 8시쯤.


장미란 선수는 시구를 마치고, 김성근 감독님은 클리닝 타임 전쯤 구장을 나와

삼성역 무역센터 건물 52층에 있는 식당 마르코폴로에서 처음 만났다.    

  

“감독님, 여기는 제가 아끼는 동생 장미란 선수고요. 미란아, 인사해. 김성근 감독님이셔.”     


김성근 감독이 장미란에게 물었다.


“바벨을 들어 올릴 때 엄지손가락을 네 손가락 안으로 넣고 올리는 것과 밖으로 빼서 올리는 것에 따라 무게 차이가 얼마나 나요?.”     


장미란은 말했다.


“감독님. 야구만 하시면서 그 차이를 어떻게 아세요. 사실 이런 질문 처음 받아봐요. 사람들이 늘 저를 만나면 ‘얼마나 먹냐’ ‘뭘 주로 먹냐’는 이야기만 묻지 기술적이고 전문적인 영역은 질문을 안 하거든요.”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마치 라켓을 손에 쥐고 탁구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듯이 계속 이어졌다.

밤 10시가 지날 무렵. 이제는 자리를 정리해야 할 때쯤 미란이가 말했다.   

  

“감독님!

저희 역도팀 감독님으로 와주시면 안 돼요? 선수들에 대해서 너무 잘 이해하고 계셔서 정말 놀랐어요. 그리고 감독님 같은 분이 지도해주시면 정말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김성근 감독도 장미란 선수와의 만

퍽 인상적이었다.


“우리 SK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끝나면 일본 고지로 전지훈련을 가는데 그때 시간 좀 내서 일본으로 와서 우리 선수들에게 강의 좀 해주세요.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에서 세계를 들어 올린 그 정신을 우리 선수들도 배워야 해요.”     

2008.10.17. 마르코폴로에서. 왼쪽부터 허회진 교수 임현주 기자 김성근 감독 장미란과 장유성


그해 가을

한국시리즈는 장미란 선수와 함께 직관했다. 미란이도 나처럼 야구 룰을 몰랐다. 역도 외에 다른 경기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그럴 시간도 없었다고 했다.    

  

“미란아, 괜찮아. 언니는 야구 기자로 발령 났는 데 정말 스트라이크가 1점 나는 것인 줄 알았다니까. 다른 기자 선배들이 멘붕이 와서...(*브런치 ‘현정화, 유남규 그리고 김택수 편 참고)”

        

2009년 1월 구정 연휴에 미란이와 미란이 여동생 미령이, 그리고 나는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크리스마스는 물론 명절에도 고향(원주)에 내려가지 않고 태릉을 지켰던 장미란 선수는 코치님께만 조용히 말씀드리고 SK 와이번스 전지훈련하는 고지에서 강의를 했다.

김성근 감독의 요청에 답한 것이다.     




그 무렵 나는

내가 등산하면서 깨달은 진리를 다시 한번 느꼈다.


모두가 출발점은 달라도, 가는 길이 힘들어도 묵묵히 정상을 향해 달리다 보면 결국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정상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통한다는 것을.

    

기자로 살다 보면 ‘기사냐, 사람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는 순들이 있다.


김성근 감독과 장미란 선수의

 41년 나이차를 극복한 우정의 산 증인이자

 두 사람의 인연에 다리 역할을 했던 기자가

 그 이야기를 기사로 쓰는 순간 세 사람의 인연은

기자와 취재원으로

 남았을 수 있다.     

 

다행히 내가 속해있는 부서가 스포츠 부도 아니었고, 태릉선수촌도 모르게 장미란을 일본으로

안내한 기자(?) 입장에선 일단 취재원과 한 몸이 되었으니 ‘철통보안’이 우선이었다.     


일본 오사카행 비행기 수속을 밟기 위해 김포공항에서 미란이, 미령이와 만난 날도 기억이 선명하다. 대한항공에서 혹시라도 장미란의 출국 정보를 알아챌까 봐, 혹은 중간에 기자들 눈에 띄어 기사 한 줄이라도 나올 까 봐 우리 셋은 이른 시간 조용히 만나 수속을 밟았다.     

열심히 짐을 부치고 있는데 미령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찾았다.


“현주언니!”


“왜? 누가 미란이 알아봤니?”


“아, 그게 아니고. 대한항공에서 미란 언니랑 우리가 일행인데 언니는 비즈니스고 우리만 이코노미라고 우리도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해준대요.”     


지금 같으면 김영란 법에 걸려도 딱 걸릴만한 일인데, 그 시절은 뜻밖의 행운! 그 자체였다.  

   

왼쪽부터. 임현주 기자 장미령 장미란.

오사카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환승해 고지에 도착했을 땐 SK 구단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다.

장미란은 SK 선수들과의 만남에서

 수줍게 입을 열었다.


“정규 시즌 1위를 하고, 한국시리즈까지 우승하신 대단한 분들 앞에서 제가 강의를 하는 게 맞나, 오히려 내가 강의를 들어야 하는 데...”    

 


사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브런치 ‘1구 2 무’에서 썼듯이 나는 김성근 감독을 인터뷰하기 전까지 두산 김경문 감독님과 더 가까운 기자였기 때문에 그때 일본을 가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두산 선수들도 일본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었고, 일본까지 가서 SK만 보고 간다는 것이..     



미란이는 학부를 고대에서 졸업했다. 김경문 감독도 고대 출신이라 미란이에게 시구를 부탁했던 것인데, 하필 그날 내가 미란이를 낚아채다시피 해서 미란이는 두산이 아닌 SK를 응원하게 됐고, 더 정확히는 김성근 감독이 맡은 팀은 어디든 응원하게 된 것이다.    




장미란 선수는 현재 미국에서 유학 중이다.


2017년 7월, 미란이가 먼 길을 떠나기 전

함께 울산을 방문했다.


김성근 감독님이 한화 구단에서 경질되시고 울산공고 학생들을 지도하시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미란이와 함께 울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울산의 한 찻집에서 둘이 먼저 회포를 풀었다.


“미란아. 언니가 회사에서 인사 불이익을 겪었어. 경찰청을 몇 달 출입하다가 경기북부청으로 쫓겨났는데, 차도 없이 연천, 포천까지 취재하는 게 쉽지 않을것 같아. 요즘 많은 생각이 드네.

내가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사는 것은 아닌가, 기자라는 직업이 좋아서 기자가 됐는데

길을 잘못 택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내가 담당 부장한테 말했거든. 기자직으로 더 이상 일 안 해도 좋으니 본사(서울 상암동)로 출근하게 해 달라고. 근데 그냥 무시하고 멀리 보내더라.”

    

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시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고 인사 불이익을 당한 터라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았다.

눈에선 뜨거운 온천수가 뿜어져 나오듯 폭풍 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미란이가 휴지를 건네며 말했다.    

 

“언니. 많이 힘들었나 봐요. 그동안 제가 수많은 기자들을 봤지만 언니는 기자가 정말 천직이라고 느낀 사람이에요. 언니 경향신문에서 일하실 때 평기자로 처음 뵙고 지금은 MBC 차장이 됐잖아요. 저 운동할 때 언론사 차장님들은 진짜 높은 분이었어요. 저는 한 우물만 파서 한 분야밖에 모르지만, 언니는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 유학도 마쳤고, 기자가 되어서 다양한 분야의 일들을 경험하셨잖아요. 능력이 되니까 할 수 있는 거죠. 오히려 저는 언니처럼 하라면 못할걸요. 힘내세요. 그리고 절대 기자 그만두지 마세요. 언니처럼 자기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계속 그 일을 해야 해요. 저도 사실 언니와 감독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울산에서 보자고 했어요.

저 유학 가요. 미국 가서 공부를 좀 더 하려고요...”     


학부는 고대, 석사는 성신여대, 박사는 용인 체대에서 마친 장미란이 더 공부를 하겠다고?...


그렇다. 미란이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더 채우고 싶다며 유학을 결심했다. 그리고 3년째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2017년 7월 울산공고에서 장미란과  김성근 감독 그리고 필자

가끔 악덕 PD로 밤샘 근무를 하는 이면

가끔 미국에 있는 미란이에게 전화를 했다.


“미란아, 아픈 데는 없고? 밥은 어떻게 먹어?”


“여기 교회분들이 많이 챙겨주세요. 김치도 나눠주시고...”     


장미란과 김성근 감독의 41년 나이를 극복한 우정과 관련된 기사는 여러 번 나왔다. 두 사람이 우연한 식사자리에서 만났다고 소개가 되어 있는데, 그 자리를 만들고 두 사람의 인연을 맺어준 사람으로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한 때 짧게나마 스포츠를 취재했던 기자로, 이렇게 각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참 복 받은 기자였노라고. 그리고 앞으로 남은 기자생활도 ‘기사보다는 사람이 우선인 기자’가 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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