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같으면 김영란 법에 걸려도 딱 걸릴만한 일인데, 그 시절은 뜻밖의 행운! 그 자체였다.
왼쪽부터. 임현주 기자 장미령 장미란.
오사카에서 국내선 비행기로 환승해 고지에 도착했을 땐 SK 구단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다.
장미란은 SK 선수들과의 만남에서
수줍게 입을 열었다.
“정규 시즌 1위를 하고, 한국시리즈까지 우승하신 대단한 분들 앞에서 제가 강의를 하는 게 맞나, 오히려 내가 강의를 들어야 하는 데...”
사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브런치 ‘1구 2 무’에서 썼듯이 나는 김성근 감독을 인터뷰하기 전까지 두산 김경문 감독님과 더 가까운 기자였기 때문에 그때 일본을 가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두산 선수들도 일본에서 전지훈련을 하고 있었고, 일본까지 가서 SK만 보고 간다는 것이..
미란이는 학부를 고대에서 졸업했다. 김경문 감독도 고대 출신이라 미란이에게 시구를 부탁했던 것인데, 하필 그날 내가 미란이를 낚아채다시피 해서 미란이는 두산이 아닌 SK를 응원하게 됐고, 더 정확히는 김성근 감독이 맡은 팀은 어디든 응원하게 된 것이다.
장미란 선수는 현재 미국에서 유학 중이다.
2017년 7월, 미란이가 먼 길을 떠나기 전
함께 울산을 방문했다.
김성근 감독님이 한화 구단에서 경질되시고 울산공고 학생들을 지도하시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미란이와 함께 울산에서 만나기로 했다.
울산의 한 찻집에서 둘이 먼저 회포를 풀었다.
“미란아. 언니가 회사에서 인사 불이익을 겪었어. 경찰청을 몇 달 출입하다가 경기북부청으로 쫓겨났는데, 차도 없이 연천, 포천까지 취재하는 게 쉽지 않을것 같아. 요즘 많은 생각이 드네.
내가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사는 것은 아닌가, 기자라는 직업이 좋아서 기자가 됐는데
길을 잘못 택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내가 담당 부장한테 말했거든. 기자직으로 더 이상 일 안 해도 좋으니 본사(서울 상암동)로 출근하게 해 달라고. 근데 그냥 무시하고 멀리 보내더라.”
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당시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고 인사 불이익을 당한 터라 쉽게 회복이 되지 않았다.
눈에선 뜨거운 온천수가 뿜어져 나오듯 폭풍 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미란이가 휴지를 건네며 말했다.
“언니. 많이 힘들었나 봐요. 그동안 제가 수많은 기자들을 봤지만 언니는 기자가 정말 천직이라고 느낀 사람이에요. 언니 경향신문에서 일하실 때 평기자로 처음 뵙고 지금은 MBC 차장이 됐잖아요. 저 운동할 때 언론사 차장님들은 진짜 높은 분이었어요. 저는 한 우물만 파서 한 분야밖에 모르지만, 언니는 어린 나이에 혈혈단신 유학도 마쳤고, 기자가 되어서 다양한 분야의 일들을 경험하셨잖아요. 능력이 되니까 할 수 있는 거죠. 오히려 저는 언니처럼 하라면 못할걸요. 힘내세요. 그리고 절대 기자 그만두지 마세요. 언니처럼 자기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계속 그 일을 해야 해요. 저도 사실 언니와 감독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울산에서 보자고 했어요.
저 유학 가요. 미국 가서 공부를 좀 더 하려고요...”
학부는 고대, 석사는 성신여대, 박사는 용인 체대에서 마친 장미란이 더 공부를 하겠다고?...
그렇다. 미란이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더 채우고 싶다며 유학을 결심했다. 그리고 3년째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2017년 7월 울산공고에서 장미란과 김성근 감독 그리고 필자
가끔 악덕 PD로 밤샘 근무를 하는 날이면
가끔 미국에 있는 미란이에게 전화를 했다.
“미란아, 아픈 데는 없고? 밥은 어떻게 먹어?”
“여기 교회분들이 많이 챙겨주세요. 김치도 나눠주시고...”
장미란과 김성근 감독의 41년 나이를 극복한 우정과 관련된 기사는 여러 번 나왔다. 두 사람이 우연한 식사자리에서 만났다고 소개가 되어 있는데, 그 자리를 만들고 두 사람의 인연을 맺어준 사람으로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한 때 짧게나마 스포츠를 취재했던 기자로, 이렇게 각 분야의 최고의 전문가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참 복 받은 기자였노라고. 그리고 앞으로 남은 기자생활도 ‘기사보다는 사람이 우선인 기자’가 되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