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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squeen Jun 10. 2020

내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

'77 사이즈 아줌마의 앵커 도전기'를 응원하며


어젯밤 교보문고에서 책 한 권이 배송됐다.

나에게 '악덕 PD'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는 사실을 처음 알려준 선배, 주말 아침 뉴스 앵커이자 정치부 출입 기자인 김지경 선배(1년 위 선배)가

책을 낸 것이다.

'77 사이즈 아줌마의 앵커 도전기'를 쓰고 있는 브런치 작가 김 선배의 책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인터넷으로 주문해 배송은 어제 오후에 됐는데 아이를 재우고 밤 11시쯤 책의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 쉬지 않고 읽어내렸다. 김 선배가 주말 아침 앵커를 하는 1년 동안 적어도 내 근무(담당 PD)가 몇 번은 겹쳤고, 그런 시간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다.     


늘 고민하는 기자 김지경.

후배들 앞에 더 당당하기 위해 자신에겐 빈 을 허락하지 않는 프로다운 기자 김지경 선배의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이 시대의 40대 워킹맘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 또한 든든한 '왕언니'가 가까이 있음에 감사했다.      


예전에 언론사 시험을 준비할 때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김은혜 앵커가 쓴 책을 읽었었는데, 그 당시엔 무용담도 이런 무용담이 없다고 느꼈다. 기자가 되면 이런 경험도 하는구나 감탄하며 이 시대의 진정한 기자를 책으로 만난 것 같아 밑줄까지 쳐 내려가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가 기자가 된 뒤엔 그 책이 팩트를 기반으로 얼마나 많은 초를 친(과장을 한) 책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지경 선배의 '내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는 기자의 성공스토리가 아니다. 무용담이 아니다. 여느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처럼 화려함을 강조하지 않는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40대 여성, 한 아이의 엄마이자 전문직에 종사하며 '프로답게' 살아야 하는 한 여성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긴 성장기다.           


나도 마흔이 되고 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 더 선명해졌고. 문어발식 인간관계도 정리가 됐다. 이젠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밥 먹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느끼고, 기분에 따라 맘껏 양껏 술 마신 뒤엔 내 몸의 내장기관들이 이틀 이상 극렬히 반항한다는 사실도 인정하게 됐다.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의 화려한 언변 뒤에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번드레한 외모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가치와 진정성 등으로 사람이 다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김지경 선배 같이 열정 적으로 살아가는 '언니' 기자들은 후배들에게 존재 자체로도 큰 힘이 된다.      


김지경 선배의 가장 큰 꿈은 현장을 뛰어다니는 백발의 할머니 기자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책을 읽으면서 중년의 남자 앵커와 젊은 여자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뉴스가 익숙한 시대를 살아오다 중년의 여성 앵커와 젊은 남자 앵커의 변화를 겪게 된 것도 어쩌면 김지경 선배 같은 사람의 고민 끝에 시작된 작은 변화일지 모른다.     


어젯밤 11시쯤 아이가 잠들었을 때 몰래 거실로 나와 첫 장을 넘겼다. 시계는 훌쩍 1시가 됐고,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니 마음 한 구석에 잔잔한 감동이 느껴졌다. 정치부 기자의 시계는 얼마나 빠르게 흘러갈까. 그 바쁜 시간에 짬을 앵커도 하고, 현장 취재도 하며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짧게나마 책으로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것 또한 감사했다.




나도 책과 인연이 닿을 뻔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MBC 보도국 A 부서 부장을 하고 있는 선배가 하루는 전화를 걸어왔다.

"내 친구가 출판사를 운영하는데 임현주 씨가 출연한 팟캐스트를 듣고 책을 내고 싶다고 연락처를 물어보는데 알려줘도 될까. 괜찮은 친구인데 한번 만나봐 봐."

   

3년 전쯤 경찰청을 출입하며 바이스캡을 하고 있을 때 러시아 학위 비리 사건을 취재했고, 그 스토리를 기반으로 러시아 전문 팟캐스트에 게스트로 나가서 취재 뒷 이야기 등을 전했는데 이 출판사 사장이 지난 방송을 듣고 내 이야기와 러시아 유학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회사 선배께 연락을 한 것이다.

      

합정역 인근 어딘가 위치한 출판사도 직접 찾아가 봤다.

"중앙일보 고정애 런던특파원도 저희 출판사랑 책을 냈어요. 임 기자는 러시아 이야기를 써주면 좋을 것 같아요. 너무 어렵지 않게. 요즘 책은 너무 어려우면 잘 안 팔려요. 방송 들어보니

재밌게 이야기 많이 하시던데, 말하듯 그렇게 글 써주시면 될 것 같아요. "     


출판사 대표님은 직원을 통해 계약서도 보내셨다. 몇 %를 글쓴이에게 준다고 명시되어있는 계약서였다. 고민이 됐다. 기자로 살아온 지 10여 년. 러시아의 전문성은 까맣게 잊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 특정 이벤트가 있을 때만 반짝 취재하는 대한민국 여느 기자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기에 망설여지는 부분도 있었다. 또 무엇보다 2017년 파업 직후 법조팀으로 발령이 나서 즐겁게 일을 한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고민 끝에 대표님께 연락을 드렸다.


"저..  몇 %  계약서보다 더 중요한 게, 사실 책을 낸다면 정말 잘 쓰고 싶은데, 제가 검찰 취재를 7년 만에 다시 하게 된 터라 이 출입처를 나가면, 그때 계약서에 사인하고 글을 써도 될까요?.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사법 농단에 대한 취재를 하던 시점이었다.) 이제 현장을 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기자거든요."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시 현장에서 발로 뛰는 기자로 일 할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시점이기 때문에 겁이 났다. 그리고 언제 다시 서초동 취재를 하겠나 싶기도 했다. 출판사 대표님은

서운한 듯 서운하지 않은 척 ‘너무 늦지 않게 연락을 줬으면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2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출판사 대표님이 나의 전담맨으로 지정해준 직원 분은 그 사이 퇴사하셔서 한국을 떠나셨고, 출판사도 어찌 운영되는지 소식을 알지 못했다. 작년 이맘때쯤,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짐을 싸고 아침 뉴스 PD로 인사발령을 받자마자 대표님께 연락을 드렸다.     


"저, 그때 약속했던... 이번에 인사가 나서... 너무 늦게 연락을 드렸지요?..."    


대표님은 말이 없으셨다.

 하긴, 내가 그 입장이라고 해도 2년 가까이 기다렸으면 마음이 돌아설만하지.. 나는 멀티가 불가능한 사람이니까.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후회(?)를 안 했다면 거짓말이지만, 또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또 똑같은 결론을 내렸으리란 것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다. 이제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악덕 PD'로 일하면서 한 번은 주말 뉴스 때 남자 앵커 후배가 출장을 가서 김지경 선배와 평일 메인 앵커인 전종환 선배가 둘이 진행을 맡은 적이 있었다. 뉴스 큐시트를 짜고 블록 배치를 하는데 톱 블록에 김지경, 세컨 블록에 전종환, 주요 뉴스도 여자 앵커가 먼저 읽게 순서를 짜 놨다. 새벽 4시쯤 스텝들이 묻는다.


"선배, 큐시트 이렇게 가셔도 되겠어요?"


"뭐가 문제인데? 평일은 남자 메인 앵커고 토요일엔 여자 메인 앵커잖아. 그런데 오늘은 토요일 아침 뉴스고, 두 앵커는 동기(05년도에 입사한)니 그럼 여자 앵커가 메인 가는 게 맞지 않아?"


새벽 5시쯤 또 다른 스텝들이 묻는다.


"부장님께 한번 여쭤보심이... 아무래도 부장님이 바꾸시면 뉴스 시간 임박해서 블록 배치 다시 하고 정신없을 것 같아요."     


부장께 연락을 드렸다.


"오늘 김지경, 전종환 앵커인데요. 메인 앵커를 김지경으로 가도 돼죠?"


부장은 말씀하셨다.


"우리 아침 뉴스의 메인 앵커는 전종환이잖아. 그럼 주말이어도 전종환이 나오면 전종환이 메인으로 해야지."     

'아니, 주말 메인은 김지경 앵커인데... 오늘은 주말이고?...'

      

그렇지만 그렇게 부장님 말씀에 반문을 할 순 없었다. 악덕 PD도 부장님 앞에선 한 없이 작아지는 힘없는 존재(?) 였으니.. 늘 매사에 문제 제기하고 이의 제기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말을 못 하니까..


부장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7층 보도국에서 크게  소리쳤다.


"오늘 메인 앵커는 전종환입니다. 큐시트에 남자 여자 앵커 순서 바꿔주시고, 앵커한테도 전달해주세요."    


그날 아침 뉴스를 마치고 전종환 선배와 김지경 선배가 나란히 걸어 나오는데 조용히 다가갔다.


"전 선배, 저는 오늘이 토요일이어서. 우리 토요일은 지경 배가 메인이라..^^;; 큐시트를 그렇게 만들었는데, 부장님이 우리 프로그램의 메인인 선배가 나오면 무조건 선배가 먼저시라고

하셔서 급하게 바꿨네요. 제가 사심(?)을 갖고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요..."     


전 선배는 조용히 웃으며 “괜찮다”라고 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안 괜찮았다. 평일 메인, 주말 메인이 주말에 만나서 함께 진행을 할 때 이 두 사람이 동기인 경우엔... 그럼 여자 앵커가 메인으로 해도 되지 않나?라는 내 생각을 뒤집고 부장님의 말씀과, 또 그 현실 속에 타협하며 이야기하는 나 자신이 씁쓸했다고 해야 하나.     

더 솔직히 '사심'을 담아 여자 앵커를 메인으로 했는데, 내 작은 바람이 관철되지 못한 씁쓸함도 있었다.

      



아무튼 김지경 선배!!

책 정말 잘 읽었습니다. 조만간 이 책 들고 저자 사인받으러 갈게요!

출산과 육아를 경험한 워킹맘들은 경쟁의 출발 선상에서 100미터쯤 뒤로 밀려나 있다는 말도 정말 공감됐고요. 지난 1년간 주말엔 앵커로, 평일엔 기자로 열심히 발로 뛰며 살아가는 모습을 정말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기자의 성장담을 담은 '내 자리는 내가 정할게요'의 속편을 기대하며~

"40대, 워킹맘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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