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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완성인간 Jul 27. 2020

최악의 습관, 완벽

직장인 다이어터, 완벽함을 버리다.



완벽주의자의 방은 더럽다.

학창시절부터 그랬다. 나는 청소를 유독 싫어하는 아이였기 때문에, 주변이 항상 너저분했다. 가장 싫어하는 일 중 하나가 정리정돈 이었다. 빌어먹을 완벽주의 때문이었다. 완벽주의자에게 청소라는 것은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하는 숙제다. 예를 들어 책상을 정리할 때는 서랍 속의 필기구들이 열을 맞춰야 함은 물론이고, 내용물의 색깔을 무지개색 배열대로 정렬시켜야만 속이 시원했다. 공책들은 반드시 중요과목순으로 정리하고, 참고서는 과목순을 맞추되, 주요 출판사 순으로 그룹을 달리하여 일목요연하게 줄을 세워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청소라 함은, 시작하면 18시간 정도는 소요되는 그야말로 대장정의 스케줄이기 때문에, 나는 그 큰 마음의 짐을 짊어질 수 없어 차라리 시작을 하지 않는 쪽을 택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항상 너저분한 물건들 속에서 살게 됐다.


비단 청소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공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국,영,수,과,사 모든 과목에서 공책정리는 첫번째 차례의 단원부터 완벽히 해야 했기 때문에, 공책을 정갈하고 완벽하게 정리하는 것에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일반적인 이론은 검정글씨로, 참고해야 할 내용들은 파란글씨로, 선생님께서 중요하다고 언급했던 것들은 빨간글씨로 적어야 했고, 그래프는 자를 대고 완벽하게 수직, 수평을 맞춰야 하는 것이었다. 수업시간에 그것들을 다 정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혼자만의 고군분투를 하다 어느 순간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면, 공책정리를 포기해 버리는 것이었다. 시험공부는 시작을 할 수도 없었다(원래 시험공부라는 것은 공책정리가 완벽하게 된 이후에나 할 수 있는 것인데, 나는 이미 공책정리를 포기했으니까).


이러한 나의 집착적 완벽주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나타났다. 직장에서 맡은 일은 완벽하게 해결해야 하는 것이므로, 일단 주어진 과제를 시작하기도 전에 중압감이 나를 짓눌렀다. 내가 만든 문서는 기승전결이 명확하면서, 반박할 여지가 없는 완벽한 기획안이어야 했다. 때문에, 항상 기획안을 보고해야 하는 최후의 마감시까지 붙들고 전전긍긍하기 일쑤였다. 완성을 하고 나면 결과물은 훌륭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자주 타임라인을 놓치거나, 때때로 방향을 잘못 잡았을 때는 손쓸 방도가 없이 지체되어 골치아픈 문제들이 터지기도 했다.



완벽주의 다이어터

지난 6월 1일은 오래간만에 월요일이면서 한달의 시작이 1일인 날이었다. 다이어트를 시작하기에 가장 완벽한 시기이다. 5월 말, 내 마음은 벌써 드릉드릉 한다. 다음주면 종전과는 다른 내가 되어, 아침과 점심, 그리고 저녁식사 모두를 완벽하게 걸그룹 스타일(예를 들어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300kcal로 먹는 극한의 다이어트 방법 등)로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계획대로라면 1주일에 2kg씩, 1달이면 8kg이 빠질 것이고, 걸그룹 식단에 하루 2시간의 운동까지 병행하면 불가능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설렌다. 2달이면 16kg을 빼고 꿈에 그리던 40kg대에 진입한다. 다음주 월요일 부터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풀떼기와 닭가슴살, 당이 적은 과일(레몬, 키위, 자몽), 오메가3가 풍부한 지방 조금 정도일테니, 이번 주는 미리 해야할 일이 많다. 요즘 유행하는 온라인 식재료 마켓에서 식단에 쓸 식품들도 완벽히 구비해 두어야 하고, 본격적인 운동에 앞서 나의 운동욕구를 극대화 시켜줄 운동복과 운동화도 준비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주 부터 시작될 극한의 다이어트 이전에 먹고싶은 것을 모두 다 먹어두어야 한다. 앞으로 2달간은 꼼짝없이 저염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이어트 첫날과 다음날은 계획한 것보다 운동은 조금 덜 했지만, 완벽한 식단으로 몸이 깨끗해 지는 느낌이 난다. 샐러드에 드레싱도 뿌려먹지 않았기 때문에 붓기가 빠져 얼굴도 갸름해졌다. 생각보다 컨디션도 개운하고 산뜻해서 이번 다이어트는 왠지 순탄하게 흘러갈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한달의 시작인 1일이면서,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 이니까 계획을 짜기도 수월한 것 같다. 주차별로 식단과 운동계획을 깔끔하게 짜본다. 이틀간의 기록대로면 왠지 한달에 10kg 감량도 남의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아 가슴이 뛴다. 수요일, 다이어트 셋째 날이다. 오늘 아침에는 회사 동료가 맛있는 간식을 사왔다며 먹음직스러운 쿠키를 건넨다. 거절하기 싫어 고맙게 받았지만 먹지 않을 것이니 서랍에 잘 보관해 둔다. 한 주의 고비인 수요일을 넘기려니 컨디션이 좋지 않다. 게다가 오후에는 생각지 못했던 줄회의가 이어지고, 업무일이 이틀 남짓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이번 주에 끝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한다. 오후 4시, 급격하게 혈당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입이 바싹바싹 마르고 인생이 다 무어냐는 생각이 든다. 오늘 아침 회사 동료가 전해준 새로나와 맛있다는 쿠키가 서랍속에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쿠키 봉지를 뜯는다. 오늘 다이어트는 실패다.


오늘의 실패는 쿠키 1조각으로 시작한다. 쿠키는 120kcal 밖에 되지 않지만, 클린한 식단이 무너졌기 때문에 자괴감이 든다. 다이어트를 시작한지 몇 일 째지? 라는 생각이 들어 달력을 보니 오늘이 3일째다. '아, 작심 3일이구나', 내일부터는 다시 식단을 완벽하게 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내일부터 다시 걸그룹 식단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내 명치를 짓누른다. 때문에, 오늘은 지난 이틀간 제일 먹고 싶었던 엽기떡볶이(치즈 많이 얹어주세요)를 주문(스트레스에는 매운 것이 최고)한다. 매운걸 먹고 나니 달콤한 것이 땡긴다. 내일부터는 먹지 못하는 것들이므로 오늘 먹어두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진다. 이럴 때만 부지런한 나는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귀찮음도 기꺼이 감수하고 편의점으로 향한다. 편의점에는 내일부터는 먹지 못할 것들로 매대가 가득 채워져 있다. 몇일 편의점을 멀리하는 동안 열일하는 식품회사들이 한입만 먹어보고 싶게끔 만든 다양한 신제품도 출시한 것 같다. 내일부터는 먹지 못할 음식들이니 오늘 다 먹어보지 못하면 평생 먹지 못할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오늘만 먹자!'



대충하면 어떨까?

내 주변인 A씨는 대충주의자다. 매일 아침 7시에 기상하는 A씨는 출근준비를 마치면 7-8분 남짓의 여유시간이 있다. 출근준비하며 어질러진 옷가지와 화장품 등을 간종간종 정리한다. 아침식사 후 설거지할 그릇들은 대충 헹궈서 정리하면 금방이다. 오늘은 간만에 체중을 재본다. 저번주보다 0.3kg정도 더 나가는 몸무게. A씨는 그러고보니 요새 앉아있는 시간이 늘어나 아랫배가 조금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회사에 가니 회사동료가 맛있는 간식이라며 쿠키를 전해준다. 아침은 먹었지만, 모닝커피와 함께 맛있게 먹는다. 오전에 간식을 먹었으니 점심식사는 평소의 2/3만 했다. 오후에는 나른함이 밀려와 캬라멜도 두어개 집어먹었다. 저녁약속이 잡혀 외식을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길, 소화도 시킬겸 헬스클럽에 들러 30분만 운동을 하기로 한다. 적당히 속이 부대끼지 않게 소화가 되어 잠도 잘 올것 같다. 쾌적하게 정리된 집에서 내일을 위해 달콤한 휴식을 취한다. 다음날 아침, 어제보다 -0.1kg이 빠졌다. A씨는 오늘 시간이 조금 빠듯해서 아침을 먹지 못하고 출근한다. 대신 출근길에 제과점에 들러 갓 구운 크로와상과 모닝커피를 주문한다. 회사에 10분 전 도착한 그녀는 커피와 함께 맛있는 크로와상을 먹는다. 내가 그녀에게 이야기 한다. "잘 먹는데도 살 안쪄서 좋겠다. 너무 부럽다. 힝. "



대충살기로 했다. 그리고 4.5kg이 빠졌다.

 6월 1일 "월"요일에 시작했던 다이어트를 처참히 실패(꼭 이때만이 아닌, 3n년간 수십 수백번의 실패가 있었다.)한 후 나는 대충살기로 했다. 내 인생 최대의 과제인 다이어트 부터 대충. 완벽한 계획 따윈 집어치우기로 한다. 1주일에 할당했던 목표감량무게 따위도 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무계획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인생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괜한 계획수립과 스트레스의 악순환은 끊어버리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대충산지 50일째다. 지난 50일 동안 4.5kg이 빠졌다. 나는 그 동안 무언가를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집착적인 생각이 내 자신을 얼마나 망치고 있었던가에 대해 절실히 깨닫는다. 그리고 볼록한 아랫배와 처진 엉덩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붕괴됐던 내 자존감 하락도 바로 완벽주의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가능만을 좇는 완벽주의자가 될 것인가, 지속가능하게 대충 살 것인가.

문득 대충살기를 시작한 1년 뒤의 내가 궁금해지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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