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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읽고 쓴 글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어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by 황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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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진민, 동양북스, 2024


1. 남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마음과 검은 하늘


언어와 사고의 관계는 흥미로운 문제다. 우리는 결코 언어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우리는 항상 말과 글에 둘러싸여 있으며, 누군가와 말을 하지 않고 무엇을 읽지 않더라도 머릿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도 언어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언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까? 언어가 사고를 결정할까 사고가 언어를 결정할까? 어떤 개념이나 단어가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 개념을 영영 이해하거나 떠올리지 못할까? 명사에 성별 구분이 존재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항상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의식할까? 한국어와 같이 종결어미를 통해 반드시 화자와 청자 사이의 관계를 표식해야 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결코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소통할 수 없을까?


세상 많은 것이 그러하듯이 이 관계 또한 쉽게 단언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 없는 개념이라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도 유명한 독일어 단어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즉 '남의 불행을 보았을 때 느끼는 기쁨'이라는 개념과 정확히 부합하는 단어는 한국어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어를 모어로 사용한다고 이 개념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어에는 다만 그러한 기쁨이나 감정 상태를 하나로 지칭할 단어가 없는 것일 뿐, 특정한 대상, 개념, 감정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다고 곧 대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 도이처의 재미있는 책『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2011)에 따르면 인간 모두에게 당연히 보편적일 것이라고 여겨지는 감각마저도 언어에 따라 다르게 표현한다. 어떤 언어에는 '파란색'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천자문 千字文』의 첫 문장은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天地玄黃)'이다. 하늘이 왜 검을까? 밤하늘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천자문』이 집필되던 때에는 '하늘은 색이 있고 파랗다'라는 인식이 정착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사실 한국어에서도 청색과 녹색의 구분은 여전히 모호하다. 신호등 불빛은 청색으로 바뀌는가, 녹색으로 바뀌는가? 그러나 '파란색'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쓰는 사람이라도, 파란색과 빨간색 물감이 다른 것은 구별한다. 다만 그는 다른 단어로써 두 색을 구별해서 지칭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뿐이다. 언어는 우리가 사고하고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의 경계를 설정하지만, 상상력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폭군은 아니다.


하지만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주지 않다고 말하기에도 어렵다. 종결어미를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그리고 종결어미를 사용할 때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한국어를 쓰는 우리는 누군가와 만날 때 항상 상대와 나의 관계와 위치를 생각해야 한다. 내가 높임말을 써야 하나? 말을 놓아도 되나? 어디까지 놓아도 되나? 어느 정도까지 존칭어를 사용해야 하나? 그런 언어를 쓰다 보면 원하지 않더라도 상대와 나의 지위와 권력 관계와 나이의 차이를 인식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언어는 분명히 우리의 사고가 향하는 방향, 우리가 더 깊이 신경 써야 하는 영역은 결정한다.


나는 언어학 전문가가 아니기에 이 의문을 끝까지 밀고 갈 능력은 없다. 질문에 질문이 이어지는 상황을 적당히 정리해 보자면, 언어는 생각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어느 쪽이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분명한 것은 그 관계는 양방향이다.


따라서 어느 언어를 통해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세계관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엿보는 작업은 그렇게까지 큰 비약은 아니다. 이진민의 『모든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바로 독일어를 통해 독일인들의 사고와 독일 사회가 구성된 방식을 일부나마 들여다보는 책이다.


2. 경계에 선 사람만 볼 수 있는 것


독일은 한국과 다르기 때문에 같은 현상과 개념도 독일어에서 말하는 방식과 한국어에서 말하는 방식이 다르다. 하루 일을 끝내고 직장을 떠나는 것이 한국어에서는 퇴근退勤, 잔뜩 지친 상태로 일에서 물러나는 것이라면 독일어에서는 파이어아벤트(Feierabend), '축제가 있는 저녁'이다. 유치원 과정을 마치고 초등학교에 가는 것은 진학進學, 배우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라우스부르프(Rauswurf), '(세상에) 던져지는 것'이다. 샤덴프로이데처럼 한국어에 지칭할 수 있는 단어가 바로 존재하지 않는 개념도 있다. 합젤리히카이튼(Habseligkeiten)은 정서적, 감정적인 의미까지를 내포하는 의미에서의 소유를 뜻한다. 이야기가 담겨 있는 소유, 추억을 가지는 것, 합젤리히카이튼이 가리키는 것은 그런 의미라고 한다.


이진민인 이러한 차이에서 많은 것을 본다. '축제가 있는 저녁'이라는 단어에서 일과 이후의 저녁이 축제가 되지 못하는 한국 사회를 본다. '내던져지는 것'에서 대학만 가면 다 해결된다는 말로 학생들을 내던지는 한국 사회를 본다. 영어 '고아(orphan)'와 독일어 일(아르바이트, Arbeit)이 같은 어근을 공유한다는 것에서 '알바생'을 '남의 귀한 자식'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을 본다. '알바생'이 보호받기 위해서는 '남의 귀한 자식'이라는 점을 굳이 상기해야 하는 한국 사회를 본다. 그러나 이진민은 묻는다. 사람이 존중받기 위해서 반드시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어야 하냐고. 사람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70쪽). 독일어와 한국어의 경계에 선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언어를 아는 모든 사람이 이런 차이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보고자 하는 이에게만 비로소 보인다. 이진민은 예리한 눈으로 독일 사회를, 한국 사회를, 우리 삶을 들여다 보고자 하기에 16개 독일어 단어에서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이진민의 이 예리한 시선은 경계에 선 사람 가운데에서도 두 세계를 모두 두루 깊게 보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책은 외국어 단어의 어원론에 관한 책이 아니라 한국과 독일,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에 관한 깊은 생각이 담긴 책이다.


3. 한국어의 이야기


이 책을 읽다 보면 독일이 나도 모르게 부러워진다(인터넷 설치와 개통에 6개월이 걸린다는 것은 빼고). 책에 실릴 16개 단어를 고르는 과정에서 독일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이진민의 편향성이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도 물론 있다. 다른 관점에서 16개 단어를 골랐다면 독일에 관해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려냈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회에 관한 책이라는 점에서 그런 편향성은 사실 저자가 아무리 염두에 두고 피하려 한다고 하더라도 빠져나가기 어려운 함정이기는 하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 관해서는, 한국어에서는 '한국을 긍정적으로 보이게 만들 편향적인 단어 16개'가 무엇이 있을까? 책을 읽고 난 뒤 한국을 소개하는 16개 단어를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부정적인 단어 - 갑질, ~충, 진상 등등 -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순우리말 모음이라는 게시글에 실린, 일상생활에서는 쓰이지도 않는 그런 단어들 말고 현대 한국어의 일상 표현에서 '축제가 있는 저녁'이나 '기억과 이야기가 담긴 소유'와 같은 단어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사회언어학자 백승주는 한국인들이 빚어내고 있는 말들의 지형이 어떠한지를 묻는다. 한국인들이 어떤 말들을 서로에게 가르치고 배우는지를 묻는다. 백승주가 발견한 한국어는 혐오와 차별이 거대한 산맥과 광대한 평야를 이룬 모습이다(『미끄러지는 말들』74쪽). 백승주가 보는 한국어는 혐오와 차별로 이루어진 산맥이다. 내가 한국어에서 '축제가 있는 저녁'과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소유'에 상응할 단어를 찾지 못하는 것은 혐오와 차별의 단어가 현대 한국어를 점령했기 때문인 것일까?


내 시야가 좁은 것이기를 바란다. 내 시선이 짧은 것이기를 바란다. 한국어의 지평과 이야기가 더 다채롭고 다양한 것이기를 바란다. 내가 그저 모르는 것이기를 바란다. 백승주가 말한 혐오와 차별의 산맥이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말하는 유일한 언어가, 이야기가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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