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누리는 자들의 윤리
『빛과 멜로디』
조해진, 문학동네, 2024
고통받는더 평화로워진 세계, 더 폭력적인 세계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세계사를 돌아보며, 흔한 통념과는 다르게 인류 문명의 폭력 행위가 과거보다 감소했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달라진 것은 도덕성과 폭력성의 기준이다. 과거보다 더 엄격한 도덕성과 윤리성을 지닌 인류는 과거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적당히 넘겼을 폭력 행위도 중대하게 바라본다. 여기에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이 결합한다. 폭력 행위는 감소했지만, 이제는 한번 발생하면 전 세계 사람들이 알 수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지구 전쟁, 아프리카의 무수한 분쟁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만행을 목격한다.
이런 세계에서 높은 도덕성을 지닌 사람은 더 넓은 시야로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인식하고 사소한 폭력도 심각하게 여기고 사소한 폭력이 만연해 보이는 상황에 근심한다. 실제 폭력 행위는 감소했을지라도, 그런 사람들이 인지하는 세계는 여전히 폭력적이다. 이들은 폭력적인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윤리에 대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한다.
조해진의 『빛과 멜로디』는 바로 이러한 윤리적 고민을 담은 이야기다. 세계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폭력과 분쟁과 전쟁이 일어나는데, 평화를 만끽하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하는가? 누군가는 아무 죄도 없이 총알과 폭탄을 맞아 다치고 가족을 잃고 죽고 단지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지옥 같은 삶을 사는데, 평화롭고 안전한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고통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그들을 '돕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마음으로 도와야 할까? 조해진은 분쟁 지역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찍는 사진가들과 폭력의 피해자를 인터뷰하는 언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이 고민을 풀어 나간다.
2. 도움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소설에서 윤리적 고민은 등장인물 개인의 서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다른 사람의 도움 덕분에 살아난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움직인다. 사람을 따뜻하기 감싸주는 빛이 사라지지 않도록, 사람을 위안하는 멜로디가 멈추지 않도록 윤리성의 태엽을 계속해서 감는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모든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라는 탈무드와 쿠란의 윤리를 실현한다.
평화를 만끽하는 사람이 자를 향해 가진 윤리에는 '고민'이 내포되어 있다. 도움은 어떤 점에서 굉장히 일방적이고 위계적인 행위다. 평화롭고 안전하고 더 나은 상황에 있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시혜를 베푼다. 그러면서 자신이 윤리적인 사명을 다하고 있다고 믿는다. 타인을 위한 행위이기에 옳고 정당하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양심을 달랜다. 나는 내 의무를 다했어, 나는 선한 일을 하고 있어, 나는 좋은 사람이야.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결국 그 베풂과 도움은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의 평화를 지키고 좋은 사람으로서 나라는 정체성을 구성하고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닌가? 이런 점을 인식할 때, 자신이 품은 저의를 의심하기 시작할 때 고민이 시작된다.
분쟁 지역에서 사진을 찍는 등장인물들도 같은 고민에 빠진다. 분쟁 피해자들을 사진으로 찍어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세계가 피해자들을 인식하고 기억하게 만든다는 사명감으로 일을 해 왔지만, 그 사진이란 "구원이 불가능한 세계를 편집한 것에 불과한 사각형의 파일 하나, 혹은 종이 한 장"(61쪽)에 불과하지 않은가? 사실은 "피사체가 살아갈 실제 삶에는 무심했다는 자각,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사진을 위해 한 사람의 고통을 이용"(60쪽)한 것이 아니었을까? 어느 순간 그들은 자신에게 묻는다. "숱하게 찍어온 사진들이 과연 단 한 사람에게라도 의미 있는 말을 걸었는지, 전쟁이 끊이지 않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형벌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는지, 낯선 사람의 손가락이라도 힘껏 잡을 수밖에 없었던 어떤 아기의 절박함을 기억하게 해주었는지"?(178쪽) 사실은 얄팍한 동정심이 발로한 것일 뿐이 아니었는지? 이 지옥에 영원히 살아도 되지 않는 특혜를 가진 사람의 자기만족을 위한 행위는 아니었는지?
소설은 그러나 질문을 던지는 데 그칠 뿐 더 치열하게 끝까지 밀고 나가지는 않는다. 소설은 결국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행위의 감동과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춘다. 등장인물들이 누군가를 돕는 행위가 개인적 경험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조해진은 타인을 돕는 것과 자신을 돕는 것, 구원'함'과 구원 '받음'의 동일성에 더욱 주목한다. 소설은 결국에는 누군가 덕분에 삶을 다시 살기로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 삶을 선사하는 이야기다. 어떤 독자에게는 이 자체로 완결되어 충분한 이야기겠지만, 윤리적 고민을 더 깊게 파고들기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아쉽고 안일해 보이는 전개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통해 중요한 질문을 던지지만, 도움의 윤리가 제기하는 딜레마를 더 파헤치려고 하지는 않는다.
3. 의문에 반문하기
그래도, 하지만, 누군가를 돕는 것이 결국에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정말 떳떳하지 못한 행위인가? 도움은 항상 순수하게 다른 이를 위한 것이어야만 하는가? 한 조각이라도 나를 위한 마음이 있으면 순수하지 않은 도움이며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위선인가? 어떤 고통을 겪는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이는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뿐인가? 왜 돕는 사람은 자신을 위한 행동을 서는 안되는가? 이 역시 도움의 윤리에 내포된 질문이며 조해진이 소설에서 던지는 질문이다.
의문은 또 다른 반문으로 이어진다. 누군가가 가진 저의의 순수성을 의심하고 비판하고 문제시할 수 있지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든 간에 돕기 위해 목숨을 걸고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리려는 마음이, 자기 위안에 그칠 수도 있다지만 작게나마 돈을 내어주는 마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는 점을 부정할 수 있을까? 돕기 위해 나서는 "한 사람이 살면서 어떤 고생을 했고 뭘 포기했는지"(113쪽)를 알려는 의지 없이 저의의 순수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얼마나 그렇게 윤리적인가? 도움이 위선과 구별될 수 없다면, 비판은 위악과 구별될 수 있는가?
그러나 질문과 반문 모두 어느 시점에서 더 들어가기를 멈추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반문은 도움의 윤리가 안일한 결론에 빠지지 않으려면 여전히 유의미하고 필요하지만, 조해진이 반문을 제기하는 방식은 눈에 띌 정도로 독창적이거나 예리하지는 않다. 인물들은 다른 사람 덕분에 살아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살린다라는 이야기를 위해 구성되어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헌신과 도움과 사랑의 현현처럼 보인다. 도움의 윤리가 제기하는 딜레마에 답하려면 그런 특별한 존재들을 상상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기에 이 아름다운 이야기에 왜인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일까.
* 2025문학나눔 선정도서 서평단에 선정되어 책을 지원받아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