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 남편의 세상>
남편이 또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그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모습을 보는 나는 담담했다.
“119에 전화할까요?”
“그래주면 좋겠어요.”
119에 전화를 해서 도움을 요청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들 것에 실려 나갔다. 남편의 보호자로 구급차를 타고 가는 내내 나는 남편을 무기력하게 지켜봤다.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해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고, 의사는 고통을 덜 느끼도록 마약성 진통제가 든 수액을 처방했다. 남편이 수액을 맞는 내내 옆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몸이 너무 피곤했다. 조금씩 편안해지는 남편을 보며 그의 무기력함이 절망스러웠다.
남편의 앓고 있는 병은 전립선염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발병했던 전립선염은 세월이 흘러가며 더 자주 발병했고, 전립선염약을 자주 먹으면 먹을수록 약을 먹어도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질병 때문에 통증을 겪으면서도 남편은 가까운 병원의 약을 먹는 것이 노력의 전부였다.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싶다는 말도, 더 유능한 전문의를 찾아보려는 시도도, 대체의학을 찾거나 습관을 교정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를 불편하게 견디고 있다 고통을 견디기가 힘들면 혼자만의 공간으로 도망쳐 혼자 끙끙대고, 통증을 도저히 참아내기가 힘들면 온몸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그는 나에게 응급실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먼저 표시한 적이 없고, 보다 못한 내가 먼저 응급실 행을 제안해서야 그는 응했다.
호전되지 않는 남편의 병 때문에 내 일은 계속 늘어났다. 가정경제를 책임지는 일도, 아이를 양육하는 일도 대부분 내 몫이 되었다. 남편과 함께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이 수업을 소홀히 하면 할수록, 남편이 늦은 출근을 하면 할수록 미래에 대한 나의 불안감은 커져갔고, 가정경제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나를 뒤흔들었다. 이런 남편을 하루라도 빨리 일으켜 세우기 위해, 하루라도 빨리 이 극심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편의 병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해볼 수 있는 선택지들을 남편에게 제시하면 남편은 열심히 노력하겠노라 다짐을 했지만 그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고, 그 어떤 선택에서도 효과를 볼 수 없었다. 병을 고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나였고, 내 눈에 그는 노력하는 척만 할 뿐이었다. 이런 남편과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이 남자를 선택한 내 인생이 원망스러웠고 자신의 인생조차 책임질 의지를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몇 년을 이렇게 보낸 후 어느 날, 남편이 나에게 말했다.
“삼성병원에 가보고 싶어.”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고 표정에는 불편함이 가득했다.
“병원에서 내가 다른 병 일 수도 있데.”
다른 병이었다. 남편은 간질성방광 진단을 받았고 수술을 위해 입원해야 했다. 간병할 사람이 필요했다. 돈을 벌어야 하고, 아이를 양육해야 했던 나는 남편의 곁에 있을 수가 없었고, 남편의 어머니에게 간병을 부탁했다. 그런데 간병을 약속했던 어머니가 수술 직전에 전화를 했다.
“정말 미안해. 미안해 아들아.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는 무서워서 서울에는 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녀 역시 작은 두려움 앞에 무기력했다.
‘아~남편이 이렇게 자라왔겠구나,‘
남편의 무기력이 이해되었다. 남편의 무기력은 그녀로부터 자연스레 습득된 것이었다. 화를 참으며 절망을 견뎌내는 남편의 표정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남편은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수술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는 간병에 대한 그 어떤 말도 나에게 꺼내지 못했다. 내 안에서는 남편에 대한 연민과 동시에 또다시 그를 책임져야만 하는 이 상황이 당황스럽고 화가 났다. 하지만 수술을 앞둔 그의 두려움과 엄마에 대한 절망 앞에서는 내 감정을 다스려야 했다.
“내가 있어줄까요?”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어리고 어린 우리 아이를 이곳저곳에 맡겨야만 했고, 울고 싶었지만 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