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 남자는 이럴 때 공격적이 된다.

<회피형 남편의 세상>

by 나은진

남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화났어요?”

“아니요.”

표정으로는 화가 나 있었지만,

남편은 화가 났냐는 나의 물음에,

아니라는 똑같은 대답만 여러 번 했다.


남편은 늘 그랬다. 아무리 화가 나 보여도 화났다는 말을 스스로 먼저 내뱉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저 표정과 행동으로 보여줄 뿐이었다.

화가 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아이들에게 별 것 아닌 일로 소리를 지른다거나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 하면서, 식사 시간에 얼굴이 굳은 채로 밥을 잘 먹지 않았다.


행동과 말이 다른 남편을 보며 나는 남편을 집요하게 추궁했다.

화가 난 일이 있으면 말을 해야 알지 말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런데 최근 남편에게서 다소 충격적인 속마음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에게서 ‘이건 당신이 잘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참는다고 했다.

누구나 다 잘못하며 사는 것이 인생인데

잘못했다는 말에 화가 치밀어 오를 수도 있을까?


예전의 내가 떠올랐다.

나에게 누군가가 잘못했다는 말을 하면 나는 그 순간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고,

내가 한 잘못임이 확실하면, 잘못했던 그 상황이 자꾸 생각이 나서 여러 날 밤잠을 설쳤다.

하지만 남편은 잘못한 것이 확실한데도 화가 난다고 하니, 잘못한 일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이어 남편은 한마디를 더 했다.

잘못했다는 말을 이 정도까지 들을 만큼 잘못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화가 난다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20년 전 그 일이 떠올랐다.


박사과정을 밟고 있을 때였다. 과제가 너무 많았던 나는 남편에게 내 글을 원고지에 베껴 쓰는 일을 부탁했다.

남편은 그러겠노라 약속을 했지만 과제 제출일 전날 남편이 나에게 내밀었던 것은 달랑 3줄이 적혀있는 원고지였다.

정말 화가 나고 당황스러웠다.

남편의 퇴근시간은 밤 12시였고, 과제를 제출해야 하는 시간은 다음날 1시였다.

준비하는 시간과 이동시간을 따져보면 12시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해야 할 과제는 너무 많았다.

두세 시간이라도 자고서 학교에 가려고 했던 내 계획은 남편 때문에 완전히 어그러졌고, 결국 밤을 꼴딱 새워야 했다.

내가 밤을 꼴딱 새우는 동안, 마음이 불편하다던 남편은 어느새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남편에게 제대로 따질 수가 없어 그날은 화난 표정으로 밖에는 대응할 수가 없었고,

다음 날 남편에게 제대로 따져 물었다.

밤을 새운 탓에 수업시간은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고, 원고지에 바쁘게 갈겨쓴 손글씨 덕분에 공을 많이 들여 쓴 내 글이 제대로 빛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남편에 대한 원망이 쌓이기만 한 하루를 꼬박 보내면서 내 화는 점점 더 커졌다.

퇴근해서 온 남편을 보자마자 화를 내며 따져 물었다.

잘못했다고 잘못했다고 남편은 몇 번 사과를 했지만,

남편의 표정과 태도에서 남편의 사과가 진심으로 들리지 않았고, 계속해서 남편의 잘못을 질책하며 화를 냈다.

어느 순간 남편은 별안간 태도를 바꾸어, 몸으로 더 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문을 쾅쾅 거리며 닫는다든지, 씩씩대며 돌아다닌다던지 적반하장이 따로 없었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남편의 잘못 때문에 피해를 당한 내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의 행동이었다.


남편의 속마음을 들으니 이제야 남편의 행동이 이해가 된다.

남편에게 중요했던 건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덮는 것.

그래서 나에게 끼친 피해를 생각하고 또 파고들면 그의 불편한 마음은 더 불편해졌을 터이고,

남편의 마음 안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축소하는 것 만이 살 길이라 생각했을 것 같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 법이다.

남편이 자신을 보호했던 방법은

가만히 있어도 불편한 자신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것이었고,

그 결과 남편에게는 자신의 잘못을 축소시키는 생각의 습관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으리라.

그래서 그의 눈에는 이 정도의 잘못에 크게 화를 내는 내가 더 감정조절을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을 터이고,

이 정도의 일에 사람을 못살게 구는 나에게 화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그의 행동은 적. 반. 하. 장.이었지만

그에게 나의 행동은 과. 유. 불. 급.이었다.



*적반하장: 도둑이 도리어 매를 든다는 뜻으로, 잘못한 사람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나무람을 이르는 말(출처:네이버국어사전)

*과유불급: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뜻으로, 중용이 중요함을 이르는 말(출처:네이버국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