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피형 남자는 불편한 말은 하지 않는다.

<회피형 남편의 세상>

by 나은진

“그 말을 안 한 건 날 속인 거잖아요. “

“말을 안 했을 뿐 속인 것은 아니에요.”


결혼 생활 내내

말을 빼먹고 이야기하는 남편의 행동 때문에

나는 화를 많이 냈다.

남편은 말을 빼먹은 것이 어떻게 속인 것이냐며 억울해했고,

남편의 말이 논리적으로는 맞다고 인정은 되었지만

나는 쉽게 수긍할 수 없었다.

내 마음 안에서는

분명히 나를 속인 것이 맞다는 확신이

나를 옳아 매고 있었다.

이런 나에게 남편은,

자신에게는 나를 속일 의도가 전혀 없음을

계속 이야기했다.


나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한 말임을 알고 있지만,

남편에게서 의도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더 화가 났다.

“당신의 의도만 보지 말고 결과를 보라고요. 당신이 나를 속인 것이 맞잖아요. “

이 말이 나오면

남편은 언제나 그렇듯 내 말에 수긍한 듯

미안하다는 말로 불편한 상황을 종료했고,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에게 미안한 감정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상황이 종료되면

내 마음에서는 뭔지 모를 미안한 감정과 후회가 올라왔다.

말을 안 했을 뿐인데 속였다고 말하는 내가

사람을 너무 나쁜 사람으로 모는 것 같아서 미안했고,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화를 참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계속해서 말을 빼먹는 남편의 행동 앞에

과한 화 대신 이성적으로 대처하자는 나의 다짐은 번번이 무너졌다.


번번이 무너지는 나를 보며

점점 나 자신에 대한 자신이 없어졌고,

남편과 함께 살며 화를 다스린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한 달 전, 시험준비를 하고 있는 남편에게 물었다.

“시험이 언제 끝난다고 했죠? “

“4월 중순에요.”

“뭐라고요? 2월 말에 끝난다고 했잖아요.”

“아 내가 2차 시험은 쉬운 거라 1차 시험만 말했네요.”

또다시 상황은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데 불현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2월 말에 시험이 끝난다는 말만 듣고

당연히 3월부터는 본격적인 소득활동을 하리라고 생각해, 남편에게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

더군다나 내가 남편에게 지원을 약속한 돈은

내 인생처음으로 아르바이트 정도의 일만 하며

나 자신에게 투자하기로 했던 돈이었다.

남편은 ‘1차‘라는 말을 빼먹고

시험이라는 말만 해서 나의 투자를 쉽게 얻어냈고,

이건 나를 속인 것이 분명했다.


아! 법대로 대처해 보자.

불리한 말은 쏙 빼고

유리한 말만 해서 남의 투자를 얻어낸 것

이것은 마땅히 해야 할 고지의 의무를 위반한 것이었고, 책임을 져야만 하는 일이었다.


명확해졌다.

상대에게든 자신에게든 그리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빼먹어도 된다.

모든 걸 몽땅 다 말해야 한다면

말이 너무 많은 세상이 되어

소음 공해에 시달려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상대의 판단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말은

꼭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이 속 시원한 사실을 20년이 지나서야 명확히 알아내다니.

남편에게 논리적으로 이야기했다.

남편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했다.

“나는 말하기가 불편해서 안 했을 뿐인데…“


한숨과 동시에 안심이 되었다.

나이 50이 넘었는데 여태 이 사실을 몰랐던 남편에게 한숨이 나왔고,

그가 의도적으로 나를 속인 것이 아닌 것이 확실해 안심이 되었다.

이후에 남편을 관찰했다.

정말 그랬다.

남편은 본인 마음에 조금이라도 불편한 말은 무슨 말이든 하지 않고 피했다.

하다못해 그릇을 깬 것과 같은 사소한 실수도 말을 하지 못했다.

“회피형 남자들이여~괜찮으니 부디 맘 편히 입을 여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