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일기_94
시간에 얽매이는 일은 퇴직전 출근시간을 다투어야 했던 때로 끝일 줄 알았다. 그러나 은퇴하고 유랑하는 사람에게도 여전히 시간을 셈해야 하는 일은 여전하다. 한 나라의 체류기한을 넘기지 않았는지, 머물고 있는 숙소의 기한은 언제까지인지, 새로운 마을에 밤늦게 도착하지 않으려면 몇 시 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야 하는지, 오늘 방문하기로 한 곳의 운영시간은 몇 시까지인지... 유한한 생을 살아야 하는 우리의 삶이 신의 가호로 무한한 생을 사는 기회로 바뀐다 하더라도 이렇듯 시간에 얽매는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시간에 속박된 유기체의 삶을 살아야 하는 숙명이 불변인 만큼 그 시간을 대하는 태도가 삶의 질에 중요할 수밖에 없다. 나는 오래된 것을 좋아한다. 오래된 숲, 굽은 골목, 묵은 친구, 주름 많은 어른... 여정 중에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일이 많다. 유적지라는 곳은 대부분 유한한 것은 모두 사라지고 단지 돌덩이들만 남아서 그때를 짐작케 할 뿐이다. 그들이 살았던 오래전의 시간을 상상하는 그 시간 또한 좋다.
내가 점점 좋아했던 그 사람, 할머니가 되고 있음이 좋다. 다만 걱정은 정신이 혼미해져서 사리에 어긋나거나 누구를 고생시키는 삶을 살게 될까 걱정이 들기도 한다. 남편은 기억력이 많이 감퇴되었는지 아침까지도 확인하고 잘 넣어둔 여권을 어디에 넣었는지 기억하질 못해 공항 바닥에서 가방을 풀어헤쳐야 했다.
오래된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친정에 문제가 좀 있어서 가슴이 아팠고 그 이후에 잠시 남도를 여행하고 왔다오^^ 울 엄마는 다행히 기억을 점점 잃어가고 있고~~ 순한 노인이 되어가고 있다오. 세상만사에서 걱정이 끊어진다는 점에선 치매가 괜찮을 듯. 나는 계절이 바뀌어가는 걸 지켜보고 있다오. 가금씩 이집 저집 기웃거려보기도 하면서^^ 넓은 세상에서 잘 살다 오길!!!”
56년 된 카페에서 그 문자를 읽다가 내 남은 인생의 목표를 정했다.
"순한 노인
20231021
강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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