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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내리고 사용하세요!"

Ray & Monica's [en route]_310

by motif

길 위에서 부부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법, 처지를 염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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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부부가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이 순례 길에서 만나는 인연과 문화를 나눈다._이안수·강민지


#1


두 사람의 시간은 한 사람처럼 적막하다. 한국의 가족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시간은 무인도의 그것처럼 일상으로부터도 멀어져있으니 방해받을 일이 없다.


늘 함께하는 생활은 사색으로부터 멀어지기 쉽고 늘 홀로인 생활은 마음과 몸을 상하게 하기 쉽다. 심한 외로움은 엄동의 한기처럼 차기 때문이다.


두 사람만의 생활에서도 매한가지라 함께하는 시간과 홀로 하는 시간의 안배가 필요하다.


아내와 나는 하루의 시작과 마감의 시간이 때때로 다르다. 나는 종종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든다. 아내는 날이 밝으면 하루를 시작하지만 나는 전날의 취침시간에 따라 다르다.


아내가 기상하면 옥상정원으로 간다. 세 개의 화산을 보며 명상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다. 기상하자마자 옥상으로 가는 루틴의 시작은 늦게 잠든 나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열흘 전쯤 늦은 시간에 기상한 나는 평소처럼 욕실로 갔다. 닫힌 변기 뚜껑 위에 쪽지가 올려져 있었다.


"물 내리고 사용하세요."


나는 그 지시대로 따랐다. 물은 시원하게 내려갔다. 메모를 남긴 것이 막힌 이유도 아닌 것 같았다. 나중에 그 이유를 물었다.


"물 내리는 소리로 당신이 깰까 봐요."


#2


결혼기념일이 지난 며칠 뒤 늦게 눈을 떠니 아내 책상 위에 새로운 것이 보였다. 다가가보니 핸드폰 거치대위에 작은 액자처럼 놓인 것은 생일 기념일에 내가 건넨 엽서였다.


"당신은 꿈


잠들지 않아도 꿀 수 있는 꿈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는 꿈


당신은 꿈보다 환상이었고

비루한 날들을 견딜 수 있었던 환영이었죠


깨지 않은 꿈으로 살아온 첩첩한 46년을

당신과 함께 오고 싶었던 곳에서 뒤돌아봅니다


마침내 배웅 없는 곳에서

전설 같은 시간 속 당신을 마중했던 시간에 감사합니다


어느 하나 갖고 싶은 것 없이 충분한 것은

당신이 그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은 당신이라는 꿈속에 있음을...


2025년 3월 1일

결혼기념일의 꿈속에서

이안수 당신을 꿈"


이렇게 잠시 정주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 키친 사용이 가능한 숙소를 선택하게 된다. 이런 기회를 통해 매식에 의존해야 했던 혀의 갈망을 충족할 수 있다.


한국식 밥을 해서 한국식 양념의 찬을 곁들일 수 있게 된다. 고춧가루나 된장만 구할 수 있어도 현지의 채소로 한국식 나물무침이나 겉절이 정도는 가능하다.


길 위에서의 삶에서 역할은 자연스럽게 분담되었다. 조리의 담당은 아내이다.


어제 기상했을 때 내 책상에 도시락이 놓여있었다. 아내는 정기적으로 열리는 재래시장에 간 듯했다. 양배추와 비트를 재료로 한 겉절이를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물컹했다. 최근 이빨과 잇몸이 악화되어 잘 씹을 수 없는 나를 고려해 재료를 쪄서 무친 것이었다.


사는 맛은 혀의 미뢰로부터 오기보다 말 없는 마음씀으로부터 비롯됨을 새삼스럽게 확신하는 길 위의 날들이다.


나는 아내의 책상 위 엽서를 뒤집어 놓았다. 엽서의 앞면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구입한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와 마르스(Venus and Mars)'중 비너스 부분이다. 굳이 이 엽서에 '당신은 꿈'을 써서 내밀었던 것은 비너스를 비롯한 로마 신화 속 신들의 다양한 상징과 해석 중에서 '아름다움'만을 떼어낸 마음의 형상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상대의 처지를 염려하는 마음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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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를사는힘 #마음씀 #배려 #안티구아 #과테말라 #모티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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