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소년이 온다』

우리가 끝내 외면할 수 없는 기억

by motifnote


썩어가는 내 옆구리를 생각해.
거길 관통한 총알을 생각해.
처음엔 차디찬 몽둥이 같았던 그것,
순식간에 뱃속을 휘젓는
불덩어리가 된 그것,
그게 반대편 옆구리에 만들어 놓은,
내 모든 따뜻한 피를 흘러나가게 한
그 구멍을 생각해.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광주를 배경으로 하지만, 단순히 그날의 사건을 재현하는 역사소설은 아니다. 이 작품은 날짜와 연표, 정치적 분석을 나열하지 않는다. 대신 한 소년의 시선에서 시작해, 죽은 자의 목소리와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남겨진 가족의 침묵을 따라가며 ‘그날 이후’를 말한다. 우리는 흔히 5·18을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소년이 온다』는 그것을 한 사람의 삶으로 끌어내린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가’보다 ‘그날 이후 한 인간의 삶은 어떻게 부서졌는가’를 묻는다. 국가 폭력이라는 거대한 단어 대신, 이름을 가진 소년과 친구, 누이와 어머니를 보여준다. 읽는 내내 숨이 막히지만, 끝까지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이야기. 그래서 우리는 이 소설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





5·18은 왜 아직도 현재인가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시민들이 군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진압당했다. 총성이 울렸고, 체육관에는 시신이 쌓였으며,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역사책에서 배운다. 하지만 『소년이 온다』는 묻는다. 그날 이후는 어떻게 되었는가. 폭력은 물리적인 순간에 끝나는 사건이 아니다. 한 번의 총성은 한 사람의 삶 전체를 파괴한다. 그리고 그 파괴는 세대를 건너 이어진다. 이 소설은 ‘그날’보다 ‘그 이후’를 보여준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시간은 정상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어떤 이는 매일 밤 그 장면을 다시 겪고, 어떤 이는 자신의 생존을 죄처럼 짊어진 채 살아간다.


폭력은 육체를 찢어놓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언어를 앗아가고, 감각을 무디게 만들고, 삶의 의미를 붕괴시킨다. 더 잔혹한 것은, 그 폭력이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는 점이다. 명령과 복종이라는 구조 속에서, 국가라는 이름 아래, 질서 유지라는 명분 아래 이루어진 폭력이라는 사실. 그 구조 안에서 인간은 얼마나 쉽게 타인을 사물처럼 대할 수 있는가. 얼마나 쉽게 고통을 보지 않으려 할 수 있는가. 한강은 이 질문을 직접적으로 외치지 않는다. 대신 차분하고 건조한 문장으로 장면을 보여준다. 그 절제된 문장이 오히려 더 큰 공포를 만든다. 괴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평범한 인간이 등장한다. 그래서 더 무섭다. 이 소설은 말한다. 폭력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지 않는 순간 언제든 반복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그래서 5·18은 과거가 아니다. 기억이 현재에 머무는 한, 그것은 여전히 지금의 이야기다.



기억은 누구의 책임인가

그러나 『소년이 온다』는 폭력의 기록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 폐허 속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시신의 얼굴을 닦아준다. 누군가는 이름을 적어 남긴다. 누군가는 마지막까지 곁을 지킨다. 그 행동들은 거창하지 않다. 혁명도 아니고, 선언도 아니다. 그저 “당신은 사라질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작은 몸짓들이다. 나는 이 장면들에서 오래 멈췄다. 존엄은 거대한 이념이 아니라, 타인을 끝까지 인간으로 대하려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폭력은 인간을 숫자로 만든다. 하지만 기억은 다시 이름을 불러준다. 그래서 이 소설이 결국 말하는 것은 잔혹함의 깊이가 아니라 존엄의 끈질김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질문은 독자에게 넘어온다. 기억은 누구의 몫인가. 고통을 직접 겪은 사람들만이 짊어져야 할 짐인가. 아니면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우리도 함께 나누어야 할 책임인가. 우리는 흔히 “그건 지나간 일”이라고 말하며 안도한다. 과거라는 단어 뒤에 안전하게 숨는다. 하지만 한강은 말없이 보여준다. 기억되지 않는 고통은 두 번 죽는다고. 읽는 동안 나는 몇 번이나 책을 덮고 싶었다.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느꼈다. 이 불편함을 견디지 않는다면, 나 역시 침묵의 편에 서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소년이 온다』는 독자에게 감동을 주려 하지 않는다. 대신 책임을 건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상,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이 소설의 가장 큰 힘은 여기에 있다. 폭력을 묘사하는 데 있지 않고, 독자로 하여금 기억의 자리에 서게 만드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소설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견디며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그 통과의 끝에서, 조금은 더 조심스럽게 조금은 더 쉽게 잊지 않으려는 사람이 된다.





『소년이 온다』를 읽는 일은 결코 편하지 않다. 숨이 막히고, 마음이 오래 가라앉는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고통을 이해했다고 착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쉽게 잊지 않기 위해서. 이 책은 거대한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를 묻는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책을 덮고 나면 기분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대신 오래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건 지나간 일”이라는 말을 조금은 망설이게 된다. 아마 그 망설임이, 이 소설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변화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