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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도 노력이다.

여지없이 본 대로 자라는 것을

by 윤귀희

"우와, 여기 싹이 났어 !!" 화분을 보며 좋아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스물 셋이었던 나는 그 순간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고, 서른여덟의 나에게도 그 생경한 느낌이 남아있다.

익숙하지 않은 다정함이었다. 나의 엄마는 언제나 헌신적이고 부지런하셨지만, 자주 피곤해 하셨다.

한가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엄마와 감정을 나눈 경험이 내 기억속에 희미하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온종일 두 아이를 위한 집안일에, 생계를 위한 출퇴근에, 지칠대로 지쳐있을 수 밖에.

아빠와 싸운 날은 화를 내셨고, 어느 날은 소리내어 엉엉 울기도 하셨다. 밤새 그렇게 속상한 엄마의 고통을

어린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끝나기만을 바랐다. 그땐 무서워서 그랬는데, 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때 엄마를 안아줄 걸.


내 아이에게 나는 어떤 장면으로 기억될까. 요즘의 나는 그렇게 지친 얼굴을 하고 아이를 보고 있나보다.

"엄마, 왜 안 웃어?" 라고 물어보는 아이의 물음에 힘껏 입꼬리를 올려본다. 10살이 된 아이에게 나의 모습은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고, 나의 말과 행동은 아이에게 일부 각인이 되어 성인이 되어서도 영향을 미칠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말과 행동에 엄마가 가끔 묻어나는것처럼.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딸 아이 금명의 상견례 자리. 금명이가 국자로 국을 뜨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국물과 건더기를 듬뿍 담아줘 놓고 자기 그릇에는 건더기 없이 국물만 휑하니 뜨는 모습을 보고, 엄마인 애순의 내래이션이 이어진다.

"그러지 말걸, 그러지 말걸. 여지없이 본 대로 자라는 것을. 귀한 자식에게 귀한 것만 보여줄 걸 그랬다.

내 거울 같은 자식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애순 역시 식사시간, 언제나 건더기들은 가족에게 양보했기 때문이고, 금명이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며 자랐다. 여지없이 본 대로 자라는 것을, 그 문장이 마음에 콕

박혔다. 우리 아이는 나의 어떤 모습을 보며 자라고 있는걸까.


나는 다정한 엄마이고 싶다. 하지만 다정함은, 나에게 노력의 영역이다.

요즘 들어 부쩍 소녀같아진 우리 딸 아이의 소소한 학교생활 이야기에 이런저런 조언을 앞세우기보다

함께 공감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다정한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매번 다짐하면서도 쉽지가 않다.

아이의 말과 행동을 가르쳐줘야한다는 생각이 꿈틀거리고,

아이가 원하는 걸 다 들어주면 버릇이 들까봐 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가 친정 엄마의 얼굴을 하고 단호하게 굴면, 감정을 교류하고 싶었던 딸 아이는 서운해할 때가 있다.

그런 딸 아이의 표정에서, 친구같은 엄마를 원했던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을 만나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기도 하고 딸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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