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돈 때문에도 힘들다고 하지만 인간관계 때문에도 많이 힘든 것을 경험한다. 인간관계가 틀어지면 정신을 갉아먹는다. 결국 몸에도 안 좋은 영향을 주어서 건강을 해친다. 일과 후에는 그 인간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으면 좋겠는데, 자꾸 떠오른다. 그렇다고 모든 것들을 잊을 수 있는 취미 생활을 계속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냥 일상적인 상황에서 그 인간이 자꾸 떠올라서 정신을 갉아먹는다.
일과 후에는 절대적으로 잊어버려야 한다. 그래야 살아난다. 그렇지 않으면 더 깊은 수렁 속에서 헤매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깊은 수렁 속에서 헤매게 되고 몸은 병들어 간다.
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한 것을 많이 하면 좋다. 예를 들면, 텃밭을 가꾸며 무의식적으로 밭을 갈군다든지, 아니면 마늘을 아무 생각 없이 깐다든지, 멍하니 불을 바라보든지 하는 것들이 정신 건강에 좋다. 그때는 뇌가 진심으로 쉬는 시간이다. 아무런 생각 없이 만드는 것이 나쁜 생각의 무한 반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가능하면 자연과 같이 하면 좋다. 양재천을 걸어 보았다. 너무 좋았다. 그냥 밖에 걷기만 해도 안 좋은 생각들은 사라진다. 집 밖으로 나와야 한다. 햇빛을 보고 기분전환을 하면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의도적으로 안 좋은 생각들은 지워버려야 한다. 정말 이 나쁜 생각을 하면 내가 죽는구나 라는 마음가짐을 갖고 안 좋은 생각들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훈련이 필요하다.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자신의 내면에 있는 안 좋은 생각들을 부숴버려야 한다.
그리고, 안 좋은 사람을 욕하는 글을 써보자. 실제로 욕을 하면 품격이 떨어지니 그 자식을 글쓰기로 매도를 해버리자. 자신만의 비망록에 글을 써서 남기면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들은 정리가 되고 더 이상 생각이 나지 않게 된다. 글쓰기를 하지 않고 나쁜 놈에 대한 생각만 한다면 머릿속에 나쁜 생각은 무한 반복을 하며 나쁜 생각이 눈덩이 처럼 불어나서 결국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 자신만의 일기장에 그놈에 대한 욕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서 나쁜 생각을 죽여버려야 한다. 글쓰기를 통하면 마음이 정리가 되고 스트레스가 풀리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사람과 다시 만났을 때는 다시 전투적인 태세를 갖춰서 계속 이겨내야 한다. 인간관계에도 분리수거가 필요하다. 쓰레기 같은 인간은 아예 쓰레기통에 집어넣어야 한다. 재활용이 가능할 것 같은 인간은 다시 관계를 맺을 여지는 남겨놓아야 한다.
인간관계의 분리수거를 잘하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다. 자신만의 나쁜 사람을 대하고 일과후에는 잊어버리는 노하우를 찾는 사람의 정신이 건강하다. 그래야 내일 다시 일해나갈 힘을 얻는다.
나쁜 생각의 무한 반복의 고리는 끊어 버려야 한다. 정신과 치료 받지 않으려면 나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그래야 산다. 일과 후에는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타인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방법 중 하나는 ‘선 긋기’다. 미셸 엘먼은 저서 ‘가끔은 이기적이어도 괜찮아’에서 선 긋기에 대해 신발을 신고 내 침대에 올라오거나, 꽃병을 던지는 사람을 가만히 둘 수 있겠냐고 되묻는다. 중요한 건 어떤 집에선 신발을 신고 거실에 들어와도 되지만, 안 되는 집이 있듯 ‘선 긋기’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것이다. 선 긋기는 내가 무엇을 받아들일 수 있고, 없는지를 타인에게 밝히는 행위로,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외모 비하나 거짓말이 마지노선인 사람이 있고, 예의 없음이나 시간 엄수가 그 선인 경우도 있다.
사람들에겐 사랑받고 칭찬받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 덕분에 우리는 이런 욕망, 즉 칭찬받기 위해 하는 행동을 ‘이타적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타성이 종종 ‘서운함’을 남기는 건 내 욕구보다 타인의 필요를 먼저 살펴서라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이타성의 이면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 긋는 것’을 이기적인 것, 나만 아는 것이라는 편견을 바꿔야 한다. 선 긋기는 타인을 무시하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 ‘타인’이 아닌 ‘나’로 삶의 순서를 바꾸겠다는 자기 선언이자, 타인에게 나를 알리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너와 나는 ‘우리’로 공존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이 내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그것’을 남에게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지금까지 쌓아온 숱한 오해를 작은 이해들로 바꿀 수 있다. 우리가 남이가? 우리는 남이다. 가까울수록 ‘남’이라는 것을 때론 서늘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아름다운 거리 안에서 ‘친밀한 타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