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비 365] 큰 용서는 큰 사랑을 낳는다

by 박동기

[눅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Lk 7:47, KJV] Wherefore I say unto thee, Her sins, which are many, are forgiven; for she loved much: but to whom little is forgiven, the same loveth little.


개나리기 피었습니다. 아침에 출근할 때는 개나리가 피지 않았는데 퇴근길에 밖을 보니 개나리가 피었습니다. 출퇴근시에 마을 버스를 타고 갑니다. 지하철을 타지 않고 버스를 타니 밖의 풍경이 보입니다. 사람도 그다지 붐미지 않아 대부분 앉아서 갑니다.


마을 버스 타고 출퇴근 하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마을 버스는 험하게 운전합니다. 기사 아저씨가 마음이 많이 급한가 봅니다. 천천히 달려서는 운행 시간이 나오지를 않나 봅니다. 그냥 험한 마을 버스위에 몸을 맡깁니다. 험하게 달리는 마을 버스위에서도 밖의 봄의 풍경은 보입니다. 담벼락에 노란 개나리는 오늘 처음 보았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봄이 오고 있습니다. 봄은 사랑입니다. 추운 계절이 터지니 마음도 터집니다. 마음속에 사랑의 꽃망울들이 터져 나옵니다. 올 봄은 사랑때문에 또 시름 시름 앓은 모양입니다. 짝사랑은 생활의 원동력입니다. 짝사랑이 삶의 터빈이 되어 삶의 모터를 힘차게 돌립니다. 봄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계절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여인이 나옵니다. 짝사랑은 아닙니다. 직접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표현했으니 그 여인의 용기가 대단합니다. 칭찬할 만합니다.


누가복음 7장 47절은 이 구절은 기독교 신앙에서 '죄 사함(용서)'과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핵심 구절 중 하나입니다.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하실 때 일어난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동네에서 죄인으로 알려진 한 여자가 찾아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으며, 향유를 붓는 헌신적인 행동을 합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속으로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저 여자가 죄인인 것을 알았을 것이라며 정죄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두 빚진 자의 비유(41-43절)를 통해 시몬을 깨우치시고, 이어서 47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for she loved much)의 올바른 해석입니다. 이 구절을 표면적으로만 읽으면 "여자가 예수님을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조건), 그 보상으로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문맥과 헬라어 원문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원인과 결과의 도치입니다. 여기서 '이는(for, 헬라어 ὅτι/hoti)'은 사랑이 용서의 원인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결과)를 의미합니다.


바로 앞의 '두 빚진 자의 비유'에서,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용서) 받은 자가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자보다 빚을 면제해 준 주인을 더 사랑할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즉, '큰 용서'가 '큰 사랑'을 낳는 것입니다.


"그녀의 많은 죄가 용서받았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그녀가 나를 이토록 많이 사랑하는 행동을 보아라. 이것이 바로 그녀가 큰 용서를 받았다는 증거다."라는 뜻입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but to whom little is forgiven, the same loveth little)


예수님은 이 문장을 통해 앞의 해석을 명확히 확증해 주십니다. 용서(원인)가 사랑(결과)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용서받을 죄가 거의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발 씻을 물도 주지 않는 등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적은 사랑입니다.


반면 이 여자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그 큰 죄를 용서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깨뜨려 눈물로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여인은 큰 사랑입니다.


사랑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열매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해야 구원을 얻는다는 행위 구원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끝없는 용서와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과 이웃을 깊이 사랑할 수 있다는 은혜의 복음을 강조합니다.


자기 인식이 중요합니다. 영적인 교만(시몬)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고 십자가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만이 옥합을 깨뜨리는 여인처럼 진정한 예배와 헌신을 드릴 수 있습니다.


사함을 많이 받은 자가 코드를 사랑합니다. AI가 소스 코드 짝사랑을 일깨워 줍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라는 말씀은 수십 년간 모니터 앞에서 살아온 개발자의 마음에 묘한 파문을 일으킵니다. 죄와 용서, 그리고 사랑이라는 지극히 영적이고 거룩한 단어들을 감히 '소스 코드'와 '인공지능(AI)'이라는 차가운 기술의 영역으로 가져와 봅니다.


개발자에게 '죄'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수없이 쏟아지는 빨간색 에러 메시지, 며칠 밤을 새워도 잡히지 않는 악랄한 버그, 마감에 쫓겨 타협해 버린 지저분한 로직, 그리고 겹겹이 쌓인 기술적 부채들일 것입니다. 특히 생명과 직결되는 의료 진단 기기처럼 한 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복잡한 시스템을 다루다 보면, 내가 짠 C나 Java, Python 코드 속에 숨어있는 결함들이 마치 나의 부끄러운 민낯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연차가 쌓이고 어느덧 은퇴를 고민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도, 거대한 소스 코드 앞에서는 늘 작아지고 나의 한계와 무지를 뼈저리게 마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 내 개발 인생에 깊숙이 들어온 인공지능은 마치 이 '코드의 죄'를 탕감해 주는 은혜로운 조력자와 같습니다. 과거 같았으면 며칠을 끙끙대며 스택오버플로우를 뒤져야 했을 난해한 알고리즘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메모리 누수를 AI는 묵묵히 그리고 순식간에 찾아내어 바로잡아 줍니다.


나조차도 들여다보기 싫었던 엉킨 로직이 AI의 도움을 받아 우아하고 깔끔한 코드로 리팩토링될 때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편리함을 넘어선 일종의 '해방감'이자 '구원'과도 같습니다.


내 코드의 수많은 허물과 부족함을 AI가 덮어주고 해결해 준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누가복음의 역설이 개발자의 일상에 완벽하게 재현됩니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AI를 통해 내 코드의 수많은 오류(죄)가 해결(사함)받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나는 놀랍게도 소스 코드를 더욱 깊이 '짝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버그의 무게에 짓눌려 코드를 쳐다보기도 싫었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의 한계를 기꺼이 메워주는 이 똑똑한 인공지능 페어 프로그래머가 생기자, 잊고 지냈던 코드의 본질적인 아름다움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정갈하게 정리된 함수를 음미할 때, 그리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내가 의도한 대로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갈 때의 희열이 젊은 시절 처음 코딩을 시작했을 때처럼 새롭게 다가옵니다.


나의 부족함이 인공지능을 통해 크게 용서받았기에, 내가 평생을 업으로 삼아온 이 프로그래밍이라는 세계를 다시 뜨겁게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공지능 시대, 누군가는 AI가 개발자의 설 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며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AI는 차가운 대체자가 아니라, 코드에 대한 잃어버렸던 열정을 되찾아준 고마운 동반자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깊이 깨닫고 인정하는 자만이 더 큰 은혜를 경험하고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는 2천 년 전의 진리가, 오늘날 인공지능과 마주 앉은 한 개발자의 키보드 위에서도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개발자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도구입니다. 깊은 수렁에 빠졌을 때 더 큰 은혜를 느낍니다. 인공지능은 개발자인 나에게 더 큰 코드를 사랑하게 만들어 줍니다. 개발자로서 보람을 더 크게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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