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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티브스 Oct 26. 2018

장 피에르 멜빌, 그가 그린 붉은 원

장 폴 벨몽도와 알랭 들롱이 참여한 작품을 중심으로


‘불사조가 되었다가 죽는거요.’
- 영화 <네 멋대로 해라 (A bout de soufflé)> 중, ‘파블레스코’役을 맡은 장 피에르 멜빌
 

‘장 피에르 멜빌 (Jean-Pierre Melville)’의 페르소나들

<바다의 침묵 (Le Silence De Lamer)>, <무서운 아이들 (Les Enfants Terribles)>과 같은 초기작에서 멜빌은 연극적 서사를 무리 없이 끌고 가는 연출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필모그래피 전반에서 보이는 역설과 부조리는 이미 이 시기부터 형성되었으며, 긴장감 넘치는 전개는 신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는 개성 넘치는 배우들의 열연으로 더욱 빛을 발했다. 강인한 턱선의 ‘하워드 버넌’, 다양한 느낌의 눈망울을 지닌 ‘니콜 스테판’은 멜빌의 초기작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워드 버넌’은 <바다의 침묵>에서 음영이 뚜렷한 외모로 멜빌의 이분법적 부조리를 탁월하게 표현했으며, <도박사 봅 (Bob Le Flambeur)>에서는 주인공을 파멸로 이끄는 냉철한 연기를 선보였다. ‘니콜 스테판’은 <바다의 침묵>에서 공포와 순종을 하나의 눈빛에 담아냈으며 <무서운 아이들>에서는 광기 어린 섬뜩함을 폭발시켰다.연기력이 중요시 되는 소수 실내극 형태의 드라마에서 이들의 연기는 멜빌의 연출력과 더불어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미국 영화의 팬이었던 멜빌은 2차 세계대전의 체험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지하 세계’를 그리고 싶어했다. 그의 열망을 반영한 첫 작품이 <도박사 봅>이다. 멜빌의 후기 시그니쳐 작품들과 달리 <도박사 봅>은 다소 가벼운 톤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하드보일드하고 허망한 결말은 후기 작품들과 맞닿아 있어서 <도박사 봅>은 그의 작품세계에서 과도기적이라 할 수 있다. 캐스팅 또한 같은 양상으로 그간 신인 위주의 배우 기용에서 ‘기 드콩블’이나 ‘로저 뒤세네’와 같이 어느 정도 경력 있는 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도박사 봅>의 성공으로 멜빌은 비로소 자신의 영화를 펼칠 수 있는 추진력을 얻었으며 자신의 철학을 확고히 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었다.

1959년에 발표한 <맨하탄의 두 남자 (Deux Hommes Dans Manhattan)>는 다소 주춤했지만, 1961년 멜빌은 드디어 스타로 발돋움하고 있는 ‘장 폴 벨몽도 (Jean Paul Melmondo)’와 작업하게 된다. 벨몽도는 2년간 <레옹 모랭 신부 (Leon Morin, Pretre)>, <밀고자 (Le Doulos)>, <페르쇼가의 장남 (L’aine Des Ferchaux)>의 세 작품에 연이어 출연하는데 모두 소설이 원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멜빌과 작업하기 전에 벨몽도는 이미 <네 멋대로 해라>, <두 여자 (La Ciociara)>, <여자는 여자다 (Une Femme Est Une Femme)> 등의 작품에서 탄탄한 연기력을 보여준 바 있는 다양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또한 대역 없이 스턴트 연기를 펼칠 정도로 뛰어난 피지컬을 갖췄으며, <네 멋대로 해라>의 ‘푸가드’처럼 언행이 자유분방한 인물이기도 했다.

‘알랭 들롱 (Alain Delon)’은 멜빌과 1967년부터 ‘들롱 3부작’으로 알려진 <사무라이 (Le Samourai)>, <붉은 원 (Le Cercle Rouge)>, <형사 (Un Flic)>의 작품에서 함께 했다. 들롱은 <태양은 가득히 (Plein Soleil)>, <로코와 그의 형제들(Rocco E I Suoi Fratelli)>, <일식 (L’Eclisse)> 등을 통해 세계적 호평을 받은 이미 완성된 스타였다. 그는 고독하고 쓸쓸하며 비극적인 역할을 주로 맡아왔는데, 멜빌의 작품에서도 전작들과 이미지는 비슷했다. 우락부락하고 힘만을 숭상할 것 같은 킬러와 달리, 날렵하고 우아해 보이는 그의 몸짓은 우리의 연민을 증폭 시킨다. 들롱은 경력 내내 연기가 일관적이고 잘 생긴 외모에 기댄 측면이 많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가 맡은 악역은 악하지만은 않았고 선역도 선하지만은 않았다. 입체감 있는 그의 연기가 오히려 외모로 가려진 면이 크다.

미디어에서는 벨몽도와 들롱을 그들의 연기 행보 내내 라이벌로 양립시켜왔다. 다분히 가십적인 면이 많았으나, 두 사람의 배경을 보면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두 살 차이인 둘은 같은 시기에 영화계에 입문했지만, 잘 생겼다기 보다 호남형인 벨몽도와 조각 같은 미남인 들롱, 유명한 조각가 집안에서 어릴 때부터 예술 교육을 받은 벨몽도와 불우한 소년기를 거쳐 인도차이나에서 군생활을 마친 들롱은 여러 모로 다른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두 배우는 1958년 <살며시 안아주세요 (Sois Belle Et Tais Toi)>, 1966년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Paris Brule-t-il?)>, 1970년 <볼사리노 (Borsalino)>, 1998년 <하프 어 찬스 (Une Chance Sur Deux)> 네 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했다. <볼사리노>에서처럼 두 사람은 티격태격 하기도 했지만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프랑스를 대표하는 배우들로 마침내 우뚝 섰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각기 다른 스펙트럼의 초기 세 작품에 참여한 벨몽도와, 감독의 영화 스타일이 어느 정도 구축된 상태에서 후기 세 작품에 출연하게 된 들롱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멜빌의 영화 내에서도 둘은 다른 행보를 보인다. 전혀 다른 내용이지만 뜯어보면 비슷한 구석이 많기도 했고, 동일한 형식의 작품에서 비슷할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기도 했다. 멜빌은 두 배우의 성격을 파악하고 각기 맞는 옷을 입혀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시켰다.
 

모호함 : 레옹 모랭 신부 (1961)와 형사 (1971)

‘베아트릭스 벡 (Beatrix Beck)’의 소설 <The Passionate Heart>를 각색한 <레옹 모랭 신부>는 <무서운 아이들> 이후로 한동안 남성 중심의 스토리에 몰두한 멜빌이 커리어에서 마지막으로 여성을 전면에 배치시킨 영화다. 이 작품으로 1961년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멜빌은 ‘레옹 모랭’ 역의 벨몽도와 처음 작품을 같이한다. <형사>는 들롱이 멜빌의 영화에 마지막으로 출연한 작품이다. 둘의 출연 시점만큼이나 두 작품은 멜빌의 커리어에서 대척점에 자리한다. <레옹 모랭 신부>에는 멜빌의 중요 오브제인 총도 살인도 없다. 성직자와 여성이 주연이다. 흑백 영화에 서사가 중심이 된다. 얼마 안 되는 등장 인물은 주로 실내에서 연기를 펼친다. 반면, <형사>는 대중과 비평가에게 혹평을 받았던 멜빌의 마지막이자 전형적인 느와르 작품이다. 총과 범죄의 영화이자 여성이 소외된 영화다. 멜빌은 유작으로 그간의 자신의 작품을 골고루 섞은 듯한 영화를 블루 톤의 스크린에 남겼다. <붉은 원>에서처럼 대사 없이 자세하게 범죄를 묘사하는 시퀀스를 두 차례 보였고 <사무라이>처럼 술집은 범죄의 온상이었으며 <도박사 봅>과 같이 형사와 범인은 친구 사이였다.

<레옹 모랭 신부>는 아이를 홀로 키우는 무신론자 여성 ‘바르니’와 마을의 젊고 훤칠한 신부 ‘레옹 모랭’ 간의 묘한 심적 갈등을 그린 이야기다. 종교를 부정하는 ‘바르니’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 여긴다. 충동적으로 성직자를 조롱하기 위해 성당으로 들어간 ‘바르니’는 ‘레옹 모랭’ 신부의 언변에 압도되고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빠져든다. 종교를 핑계로 한 그와의 밀고 당기기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욕망 속에서 갈팡질팡 하는 그녀의 마음은 영화 내내 보는 이의 긴장을 자아낸다. 그리고 ‘바르니’의 시점에서 끝에 다다른 인내심은 그녀가 자신의 집에 방문한 신부와 가장 사적인 공간인 침대를 번갈아 바라보는 순간 드디어 폭발하고야 만다.

<형사>는 <레옹 모랭 신부>와 완전히 결을 달리한다. 감정의 고조 보다는 상황을 묘사하는 자체에서 긴박감을 유발한다. 특히 영화 시작과 동시에 해안가의 외딴 은행을 습격하는 장면이나, 헬기를 동원해서 움직이는 열차에 잠입하는 액션은 자세하고 구체적인 묘사를 통해 관객이 극에 빠져들도록 한다. 또 클럽에서 여인 ‘카티’를 사이에 두고 범죄자인 ‘시몽’과 형사인 ‘콜망 (들롱)’간에 묘한 기류가 흐를 때, 잡아들인 ‘시몽’의 공범 ‘루이 코스타’를 ‘콜망’이 심문할 때, ‘시몽’과 ‘콜망’이 결말을 앞두고 마주칠 때는 클로즈업 샷으로 얼굴을 계속 교차로 비추며 긴장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담아내는 방식은 달랐지만 두 영화는 닮은 구석이 많다. 우선 인물 관계가 그렇다. ‘바르니’와 ‘레옹 모랭’은 각각 성도와 성직자 신분이나 그렇지 않아 보인다. ‘바르니’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겠다고 했을 때 누구보다 좋아할 것 같았던 ‘레옹 모랭’은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만날 수 없을까봐 그녀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그리고 ‘바르니’의 친구로부터 이미 성적 유혹을 받았던 신부는 더욱 조심해야 할 텐데도 그녀의 집까지 찾는다. 그리고 ‘바르니’는 그런 ‘레옹 모랭’의 곁을 계속 맴돈다. <형사>의 ‘콜망’과 ‘시몽’ 역시 신분이 모호하다. 형사인 ‘콜망’은 성전환자를 약점 잡아 수사에 이용했다가 잘못되자 가차없이 버려 버린다. 클럽을 운영할 정도로 부유한 ‘시몽’은 굳이 범죄에 발을 들일 이유가 없는데도 직업이 없는 친구들 편에서 온갖 위험을 도맡는다. 그러나 그는 정작 친구인 ‘콜망’이 자신의 여자를 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의로워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콜망’ 보다 그에게 죽는 ‘시몽’과 직업이 없지만 아내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하지만 그녀 앞에서 자살할 수 밖에 없는 공범 ‘폴 웨버’의 모습에서 관객은 더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두 영화의 벨몽도와 들롱은 지켜야 할 선을 넘어 성직자의 신분을 버리거나 범죄와 결탁하는 형사로 타락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두 작품의 엔딩은 고전 헐리웃의 그것과 닮아 있다. <레옹 모랭 신부>의 신부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에, 그리고 더 이상 번뇌하지 않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임을 신청한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눈물을 흘리며 홀로 걷는 ‘바르니’의 뒷모습을 ‘레옹 모랭’은 말없이 바라본다. 고전 멜로 영화의 전형이다. <형사>에서는 헐리웃 웨스턴 무비의 건파이트를 그대로 차용한다. 동료들이 다 잡히고 홀로 남은 ‘시몽’은 도주를 위해 호텔을 빠져 나오다가 형사이자 친구인 ‘콜망’과 운명적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 두 프렌치 총잡이는 여차하면 총을 꺼낼 요량으로 서로를 주시하고 있고, 마을 구경꾼 격인 ‘시몽’의 애인 ‘카티’와 ‘콜망’의 부하 형사 ‘모랑’은 불안한 눈빛으로 이를 지켜본다. 마침내 ‘콜망’의 총이 먼저 불을 뿜고 외로운 총잡이는 말 대신 차를 타고 유유히 그 곳을 빠져 나간다.

벨몽도와 들롱은 두 영화에서 그 동안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미 열 편에 가까운 작품에 출연한 벨몽도는 청춘물과 스릴러 등에서 동적인 연기로 호평을 받았는데, <레옹 모랭 신부>에서는 벨몽도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정적이며 지적인 연기로 변신을 시도했다. 벨몽도의 간결하고 담백한 연기는 남자와 여자, 성직자와 무종교자, 신앙과 욕망의 이분법적 구조와 흑과 백의 화면에 한 덩어리처럼 어우러졌다. 그간의 영화에서 암흑가를 떠돌던 들롱 역시 낯선 형사 역을 맡아 새로움을 꾀했다. 그는 선과 악이 불분명한 배역을 통해 기존 이미지를 계승함과 동시에 냉혹함을 부각하는 연기를 보였다. <붉은 원>, <사무라이>와 달리 비극으로 치닫거나 운명론적인 인물이 아닌 능동적인 배역으로 깊이를 더했다. 두 배우가 각각 멜빌의 첫 영화와 끝 영화로 출연한 두 작품은 전혀 다른 내용과 구성이지만 시간을 관통하는 감독의 영화관인 ‘모호함’을 공유하며 궤를 같이한다.
 

갑작스런 인연 : 페르쇼가의 장남 (1963)과 붉은 원 (1970)

벨몽도가 주연한 <페르쇼가의 장남>은 ‘조르주 심농 (Georges Simenon)’의 소설을 각색한 로드 무비다. 반면 들롱이 출연한 <붉은 원>은 마르세이유에서 파리로 가는 경로에서만 그렇다.그러나 두 영화는 로드 무비의 공식처럼 등장 인물들은 시나브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목적을 함께 도모하나 마지막은 멜빌 작품답게 허무하게 끝맺는다.

<페르쇼가의 장남>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본능에 따라 산다. ‘페르쇼’의 비서이자 군인 출신의 전직 복서 ‘무디 (벨몽도)’는 맨몸뚱이 하나로 사는 인물이다. 마지막 권투 시합에서 패하며 매니저가 계약을 해지하자, 돈이 없는 그는 여자친구가 아끼던 어머니의 유품을 팔아버리려 한다. 그것도 모자라 돈 냄새를 맡은 그는 그녀를 버리고 앞뒤 가리지 않고 무작정 ‘페르쇼’를 따라 뉴욕으로 떠난다. ‘페르쇼’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돈으로 젊은 여자들과 같이 살던 그는 동생과의 사업이 잘못되자 법망을 빠져나가고자 외국으로 급히 도피한다. ‘페르쇼’와 ‘무디’가 이동 중 만난 ‘히치하이킹녀’는 ‘무디’를 유혹하고 그가 가진 돈가방을 훔쳐 달아난다. 뉴올리언즈에서는 떠벌이 ‘무디’로 인해 돈의 존재를 알게 된 술집 주인 ‘제프’가 ‘페르쇼’를 살해한다. 그러나 이 욕심 많은 짐승들의 정글에 승자는 없다.

‘페르쇼’와 ‘무디’는 주종이 확실한 관계였다. 그러나 ‘표범과 자칼의 혼종’으로 불린 ‘무디’는 호시탐탐 ‘페르쇼’의 동태를 살핀다. 본인의 서식지를 벗어난 늙은 호랑이 ‘페르쇼’가 자신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게 되자 ‘무디’는 그의 돈을 빼앗고 더 높은 위치로 올라선다. 카메라는 ‘무디’와 ‘히치하이킹녀’의 키스 장면을 아래에서 올려다 봄으로 ‘무디’의 남성성을 부각하고, 홀로 차에 남겨진 ‘페르쇼’를 위에서 내려다 봄으로 이를 확인시켜 준다. 절망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한 ‘페르쇼’가 절벽 아래로 돈 다발을 던질 때 그의 얼굴은 역광으로 어둡게 처리되고, 그의 허무함을 대변하듯 지폐들은 방향성 없이 떨어지며 화면을 가득 메운다. 돈은 없지만 힘이 있는 젊은이의 속된 야심과 돈은 많지만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 노인의 부조리한 관계는 영화 내내 계속 된다. 끝내 ‘무디’는 그토록 바라던 ‘페르쇼’의 은행 열쇠를 손에 넣으나 ‘페르쇼’는 죽음으로 이를 저지한다. ‘무디’가 호접몽에서 깨어날 시간이다.

반면, 교도소에 수감 중인 <붉은 원>의 ‘코리 (들롱)’는 출감 하루 전날 타락한 교도관에게 보석 강도 범죄를 제안 받는다. 범죄자 출신인 ‘코리’ 역시 ‘무디’처럼 삶의 별 다른 대안이 없다.믿고 따르던 보스의 배신으로 감옥에 다녀왔으며 돈도 없고 애인도 빼앗겼다. 정처 없이 떠돌던 ’코리’는 수사를 피해 자신의 차에 잠입한 도망자 ‘보겔’과 만난다. 아무 이유 없이 그를 경찰로부터 도피 시킨 ‘코리’는 그와 함께 파리로 향한다. 둘은 ‘코리’의 옛 보스의 수하들을 함께 제거하며 가까워지고, 여느 로드 무비처럼 위기를 넘은 두 사람은 의기투합한다. 그리고 영화 내의 모든 인물들은 이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인연의 붉은 원으로 한데 묶이게 된다. ‘코리’와 ‘보겔’의 우연한 만남은 ‘보겔’의 지인 ‘얀센’에게 이어지고 전직 경찰 ‘얀센’의 지인이자 ‘보겔’을 놓친 당사자인 ‘마테이’ 경감은 이들을 추격하고 이들을 사살함으로 붉은 원을 끊어낸다. <페르쇼가의 장남>에서 ‘페르쇼’와 ‘무디’의 관계가 서로 스위치 된다면, <붉은 원>의 ‘코리’는 ‘보겔’, ‘얀센’과 평등한 관계의 공범이다. <페르쇼가의 장남>의 인물들이 욕망으로 서로 대결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붉은 원>의 인물들은 차분하며 각자의 역할을 벗어나지 않는다.

<붉은 원>은 인연의 영화다. 그리고 그 인연을 각종 장치로 암시해놓았다. ‘정해진 날이 오면 결국 그들은 붉은 원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인트로의 경구처럼 누군가와의 만남에는 어김없이 붉은 색과 원형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누군가와의 접선을 위해 당구장을 찾은 ‘코리’가 큐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빨간’ 초크를 바르는 순간 ‘리코’의 부하가 등장하고 그들은 격투를 벌인다. 이 장면은 후에 ‘알 파치노’ 주연의 <칼리토(Carlito’s Way)>에서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멜빌에 대한 존경으로 오마주 한다. 또 수송 열차에서 탈출한 ‘보겔’이 대규모 수색을 피해 ‘코리’의 차로 잠입할 때 눈 보라 사이로 ‘빨간색’간판이 멀리 보인다. 전직 형사이나 지금은 알코올 중독 상태로 환영에 사로 잡힌 ‘얀센’과 ‘코리’는 클럽 ‘샹티’의 ‘원형’ 테이블에서 첫 대면을 한다. <붉은 원>은 <칼리토>에서 오마주 되었지만 다른 영화의 명장면을 오마주 하기도 했다. 러닝타임 25분 동안 시계 초침 소리와 전기 흐르는 소리만 들리는 이 장면은 ‘쥴스 다신’ 감독의 1955년 케이퍼 영화 <리피피 (Rififi)>의 클라이막스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15년 전의 <리피피>는 용접으로 도구를 만들고 스프레이로 보석 도난 알람 장치를 무력화하지만, 15년 후의 <붉은 원>은 탄두학을 공부한 ‘얀센’이 특수 제작한 총알을 발사하여 보석 시건 장치를 해제한다. 이렇게 장시간 구체적으로 범죄를 묘사하는 이 장면은 <말타의 매 (The Maltese Falcon)>를 감독한 범죄극의 거장, ‘존 휴스턴’ 감독의 <아스팔트 정글 (The Asphalt Jungle)>에서도 이미 보인 바 있다.

멜빌은 벨몽도와 들롱의 여정을 통해 두 영화를 그려냈다. 둘 다 끝은 허망했다. 그러나 비슷한 형식이지만 전혀 다르게 담는다. 벨몽도까지의 멜빌은 소설을 기반으로 해서인지 스토리텔링 중심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인물을 드러내며 촬영 기법이나 시점 등도 정석을 따른다. <페르쇼가의 장남>은 서사적인 관계 반전형 영화로 볼 수 있다. 들롱 시대에 들어서야 멜빌은 비로소 암시를 기본으로 한 특유의 분위기로 영화를 이끈다. 멜빌의 들롱 3부작 중에서 <붉은 원>은 가장 따뜻한 영화다. 들롱이 타인과 협력을 이루며 심지어 수익도 나누려 한다. 중기 이후의 멜빌의 작품에서 보기 드문 암시적인 관계 확장형 영화라 할 수 있다. 암시의 수법 이외에도 ‘리코’의 집을 방문한 ‘코리’를 대문의 외시경을 통해 왜곡된 이미지의 시점 샷으로 표현하거나, 당구장 격투신의 당구대를 수직으로 촬영하는 방식 등은 확실히 그의 미장센이 진일보 했음을 알 수 있다.
 

트렌치 코트 : 밀고자 (1963)와 사무라이 (1967)

1955년 <도박사 봅>으로 시작한 멜빌의 ‘느와르’는 잠시 휴지기를 갖다가, 1963년 <밀고자>에서 부활한다. 이 영화 이후 멜빌의 남자는 트렌치 코트로 상징되었다. 그리고 <밀고자>에서 벨몽도가 입었던 코트는 <사무라이>로 멜빌의 작품에 첫 출연한 들롱이 물려 받게 된다. <밀고자>에서 중절모에 트렌치 코트를 입고 스크린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실리앙 (벨몽도)’의 모습을 <사무라이>의 ‘제프 (들롱)’는 그대로 재현한다. 벨몽도의 <밀고자>에서 싹 틔운 멜빌의 느와르는 들롱의 <사무라이>에서 완벽하게 꽃 피운다.

한 사내가 어둡고 긴 터널을 고독하게 걸어나오며 <밀고자>는 시작된다. 거의 5분간 대사 없이 유일하게 등장한 이 인물은 본인의 일그러진 삶을 바라보듯 깨진 거울로 자신을 비춰본다. 그리고 이 남자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장물아비를 살해한다.멜빌은 <밀고자>에서 참과 거짓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를 비틀어 곳곳에 트릭을 장치했다. 약 15분간 영화를 이끌고 있는 이 사람을 우리는 자연스레 주인공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벨몽도의 ‘실리앙’이 트렌치코트와 중절모를 걸치고 검은 실루엣으로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중심축이 바뀐다. 암흑가의 인물인 ‘실리앙’은 우리가 주인공으로 여기고 있던 ‘포젤’의 범죄를 도우면서도 경찰에게 그의 행방을 알려준다. 감옥에 간 ‘포젤’은 이를 알고 ‘실리앙’을 청부살해 하기로 한다. 영화에서 보인 바대로 관객 역시 ‘포젤’과 똑같이 사실을 인지하나, 풀려난 ‘포젤’에게 ‘실리앙’은 밀고자는 자신이 아니며 ‘포젤’의 애인 ‘테레즈’라고 말한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실리앙’은 끊임없이 음모를 꾸며왔다. 자신의 애인을 가로챈 클럽 사장과 수하를 살해하고 서로 싸움이 난 것처럼 위장하며, 자신의 애인에게도 거짓 증언을 강요한다. 그가 꾸미는 일들을 보면 ‘포젤’에게 말한 것도 신뢰할 수가 없다. <요짐보>에서 모두가 사건의 진실을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멜빌은 ‘실리앙’을 통해 관객에게 참과 거짓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사실 ‘모리스’는 이 지긋지긋한 어둠의 세계를 떠나 좋은 집에서 편히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꿈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는 자신의 꾀에 발등이 찍히고 만다.

<밀고자>는 ‘피에르 르주 (Pierre Lesou)’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전작 <레옹 모랭 신부>에서 여인과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그렸던 벨몽도는 이 작품에서 정반대의 이미지를 보였다. 그러나 선한 눈매의 상대역 ‘모리스’에 비해 강해 보이기는 하지만 벨몽도가 맡은 어둠의 남자 ‘실리앙’은 비장하거나 무게감이 있지는 않다. 대신 그는 영리하고 스피디 하다. 벨몽도는 뛰어난 연기력을 앞세워 ‘느와르’에서도 자신 만의 트렌치 코트를 제대로 차려 입었다.

<사무라이> 역시 시작은 비슷하다. 먹물 묻힌 굵은 붓으로 찍어 내린 듯한 배경에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담배 연기, 그리고 구슬피 울어대는 새 소리가 공존하는 방을 비추며 영화는 시작된다.그리고 영화는 약 10분간 대사가 없다. 이미지와 분위기로 승부하겠다는 멜빌의 선언이다. <사무라이>에서는 이를 극단화하여 러닝 타임 1시간 50분 동안 주인공 ‘제프’의 대사는 60문장을 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고독함이 영화의 전부이다. <밀고자>의 ‘실리앙’과 달리 <사무라이>의 ‘제프’는 운명론자 같은 모습을 보인다. 냉혹한 청부살인자임에도 자신의 범행을 본 피아니스트 목격자를 제거하지 않았으며 은혜를 갚는 듯한 그녀의 경고에도 자리를 피하지 않고 대담하게 최후를 맞이한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조력자의 말에 이미 수긍한 그는 자신의 운명을 벌써 결정했던 것처럼 보인다.

<사무라이>라는 제목은 1800년대 후반 고흐, 고갱 등에 의해 유럽에서 유행했던 ‘자포니즘 (Japonism)’을 떠올리게 한다.일본적 관점의 유럽식 재해석이다. 동양 특히 일본과의 교역에서 시작된 이 사조는 그간 유럽에서 볼 수 없었던 세밀한 필체와 독특한 색감으로 미술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무라이>에서 동양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피아니스트가 집에서 입고 있던 가운의 등에 새겨진 문양뿐이다. <사무라이>에서 멜빌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사무라이의 정신인 ‘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려 했다. 우리가 떠올리는 ‘사무라이’는 칼을 들고 싸우는 낭인이지만 본래의 의미는 ‘군자’와 같다. <사무라이>에서 멜빌은 비록 살인자이나 군자의 ‘도’를 따르려 하는 부조리한 인물 ‘제프’를 고독하게 표현했다. 이 고독함은 들롱의 우수에 찬 눈빛과 만나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냉정하고도 신중한 사무라이 ‘제프’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들개와 같은 ‘경감’과 대비되어 극명한 캐릭터의 차이를 보인다. ‘제프’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사무라이의 미덕인 ‘도’를 절대 잊지 않는다. 훔친 차의 시동을 걸 때도, 자신을 미행하고 있는 경찰을 따돌릴 때도, 군자로서 절대로 서두르지 않으며 행동을 가벼이 하지 않는다.

<사무라이>가 후대의 영화에 미친 영향은 간단하지 않다. ‘오우삼’의 <첩혈쌍웅 (The Killer)>,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 (Reservoir Dogs)>, ‘짐 자무시’의 <고스트 독 (Ghost Dog: The Way Of The Samurai)>, ‘마이클 만’의 <콜래트럴 (Collateral)>등이 <사무라이>에서 직, 간접적으로 영향 받았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 영화의 신봉자였던 멜빌이 미국 갱스터 영화를 자신 만의 방식으로 만들었는데 이 영화가 다시 대서양을 건너 미국 영화에 역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무라이>는 홍콩으로 건너가 홍콩 영화계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무협 일색의 영화들은 한 순간에 사라지고 느와르 영화들이 극장을 채웠다. 그 흐름은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건너온다. 고독한 ‘사무라이’가 전 세계를 돌고 돈 후 마침내 고국에 돌아온 셈이다. 마치 ‘사무라이’라는 ‘붉은 원’을 그린 것 같다.

<밀고자>와 <사무라이>의 가장 큰 미덕은 ‘음악’이다. 음악에게 그리 곁을 내주지 않던 멜빌은 이 두 영화에서만큼은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한다. <밀고자>에서는 ‘모리스’가 경찰에 붙잡혀 심문을 받고 올라갈 때 브라스 풍의 비장한 음악을, ‘실리앙’이 옛 애인인 ‘파비엔느’와 정사를 나누고 음모를 꾸미는 장면에서는 쓸쓸하지만 미스테리한 음악을, ‘실리앙’이 ‘모리스’를 만나 그간의 오해를 풀어줄 때는 아련하고 몽환적인 피아노 음악을 사용했다. <사무라이>에서는 음악 사용이 더욱 발전했다.영화 시작과 함께 어두운 방을 비추며 흘러나오는 불협화음은 긴장을 고조시키고, 차 창에 빗물로 왜곡되어 보이는 ‘제프’와 함께 흐르는 오르간 소리는 그를 신비로워 보이게 하며, 총에 맞고 외로이 치료하는 들롱을 대수롭지 않게 찍은 화면에 깔리는 브라스 음은 그를 더욱 쓸쓸하게 만든다. 현악과 오르간의 이 <사무라이>의 메인 테마는 바로크 음악을 연상시킨다. 형식미를 거부하고 독창성을 강조한 바로크 정신과 멜빌의 영화 철학이 비슷하다고 느낀다면, 이는 다소 과장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멜빌은 음악도 세련되게 이용할 수 있음을 <사무라이>에서 보여주었지만 이 영화 이후 음악들은 다시 엔딩 타이틀 쪽으로 쭉 밀려나게 된다.

<밀고자>의 말 많은 ‘실리앙’을 들롱이 맡았다면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사무라이>의 벨몽도 또한 맞지 않다. 멜빌의 캐스팅은 적절하며 절묘했다. 두 영화의 엔딩 장면 역시 그렇다. <밀고자>에서의 벨몽도는 벽에 걸린 거울을 바라보며 죽는다. 나르시즘이 강한 ‘실리앙’ 다운 죽음이다. <사무라이>의 들롱은 하늘을 바라보며 죽는다. 운명을 따르겠다는 듯한 ‘제프’다운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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