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통학길은 정말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서울 노원구에서 신촌까지 통학길은 1시간 30분이 걸렸다. 1교시라도 있는 날에는 매번 수업에 간신히 들어가 꾸벅꾸벅 졸다가 교수님께 혼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너무 힘들어서 자취를 해볼까 생각을 해봤지만, 철없는 스무살에게도 신촌의 자취방 월세는 언감생심일 뿐이었다. 그때쯤 눈밭에 파묻혀 있던, 고장난 빨간 오토바이가 눈에 들어왔다. 과 선배가 타고 다니다 군대에 가면서 버리고 간 바이크였다. 눈을 툭툭 털고 남문에 있는 바이크 수리 센터로 끌고 갔다. 방전된 배터리와 고장난 클러치를 갈았다. 그게 시작이었다.
수리센터 사장님은 수리비 외에 이륜차 등록을 도와준답시고 20만원을 요구했다. 그저 이 물건만 있으면 일단 지긋지긋한 통학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던 나는, 꼬깃꼬깃 모은 과외비를 부여잡고 냉큼 승낙해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달 오토바이를 탄 할아버지 법무사가 쪼르르 달려왔다.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더니 인감을 찍으라 했다. 능숙한 척 했지만 벌벌 떨면서 인감을 찍은 나는, 스물한살이 머리를 짜내 던질 수 있는 최상의 딜을 던졌다. "저.. 오늘 점심 짜장면 먹고 왔는데 만원만 빼주시면 안 될까요..." 법무사 할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며 만원을 빼주었다. "하하하 센터 사장님 이 학생이 점심값 만원 빼달랍니다 하하하... 아이고... 허허"
사실 그 바이크는 타면 안 될 바이크였다. 2014년에도 벌써 02년식이었던 오토바이가 심지어 버려져 있었는데 멀쩡할 리가 없었다. 시동이 걸리지 않아 밀어서 시동을 걸거나, 킥 스타터를 밟아야 시동이 걸렸다. 체인은 늘어질대로 늘어지고, 타이어도 펑크가 몇 번씩 났다. 무엇보다 등록을 도와주는 비용으로 20만원이나 든 것도 적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땐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엉망진창이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통학시간이 30분으로 줄어서 좋았고, 새내기를 보러 60km를 달려 송도에 가다가 소나기를 맞아도 즐거웠다. 영하의 날씨에 엑셀 스로틀을 감은 손이 꽁꽁얼어 감각이 없어져도 즐거웠다. 아무것도 몰라서 즐거울 수 있었고, 그래서 참 아찔할만큼 무모했다.
1년쯤 지나니 02년식 바이크는 타고 다니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는 물건이 되었다. 엉망인 바이크를 폐차장에 묻어주고, 봉사 장학금을 탈탈 털어 훨씬 튼튼한 05년식 스쿠터를 매입했다. 대학교 졸업하고 광주에 올 때도 화물로 실어 가져왔다. 그렇게 스쿠터는 묵묵히 서울과 광주에서 나의 훌륭한 발이 되어 주었다.
나름 꽤 튼튼하던 05년식 스쿠터도 16년이 지나니 더 이상 손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마침 로스쿨 졸업이 2달밖에 남지 않아 2달 후 광주를 떠날 때 처분하기로 했다. 그런데 폐차장에서도 너무 오래된 바이크라고 받아주지를 않았다. 고물상에서도 고철값도 안 나온다며 받질 않았다. 버릴 수도 없는 폐기물이 된 스쿠터를 누가 받아주기나 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당근마켓에 올렸다. 굴러만 가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사겠다며 난데없는 경매판이 되었다. 어리둥절한 사이 누군가 내가 올린 가격의 2배가 넘는 15만원을 제시했다. 그와 거래하기로 하고 약속시간에 찾아갔다.
여드름도 마르지 않은, 앳된 얼굴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등학생, 잘 봐줘야 군대 갓 전역한 21살쯤 되었을까. 그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브레이크가 득득 갈려나가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50cc만 타다 단돈 15만원에 100cc 스쿠터를 탈 수 있다니 너무 좋다며 환희에 가득찬 얼굴이었다. 세워 놓고 수리해야할 부품과 고장 상태를 알려주었지만 알아들은 것 같지도 않았다. 고장상태를 듣고 잠깐 고민하던 사내는, 이내 무언가 결심한듯 비장한 표정으로, 만원만 빼달라고 했다. 7년 전 수리센터에서 벌벌 떨며 인감을 찍던, 스물한살 어린 학생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나는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쓰던 헬멧을 쥐어주며 꼭 안전하게 타라고 일러주고 돌아왔다.
로스쿨을 졸업하니 어느새 20대의 끝자락에 서있다. 바이크를 정리하고 나니, 지나온 20대의 거의 모든 시간을 바이크와 함께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처분하고 온 지 1달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집을 나설 때 스쿠터 키가 없는 주머니가 허전해 주머니를 만지작거린다. 21살부터 28살까지, 4년간 서울에서 38000km를, 3년간 광주에서 5000km를 탔다. 이제는 바이크에 대한 에피소드를 풀라면 하루종일 쉬지 않고 떠들 수 있는 별종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바이크는 내 20대의 모든 것이었다. 때로는 패기로웠고, 때로는 궁상스럽고, 때로는 아찔할 만큼 겁 없이 무모했다. 세상을 다 아는체 했지만 정작 하나도 알지 못할 만큼 순박했고, 고작 몇십만원의 스쿠터로 세상을 호령할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젊음이라 부르고 청춘이라 부르는 모양이었다.
어른들은 겉으로는 그런 것들을 청춘이라 불러주며 띄워주는 체 했지만, 실은 청춘의 순박함과 무지를 간편하게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취했다. 그래놓고는 또다시 젊은이들의 순박함과 무모함을 청춘이라 탐하며 부러워했다. 나는 그런 어른들이 정말 싫었다.
여전히 세상에 모르는 것이 투성이인 순박한 20대다. 하지만 그런 나보다 더 순박하고 패기롭고 무모하게 눈동자를 똘망똘망 빛내는, 앳된 얼굴들을 마주할 때마다, 꽤 당혹스러워진다. 7년 전 그 날 나를 두고 호탕하게 웃던, 그들 웃음소리의 비루함이 귓전을 때린다.
요사이 위를 쳐다보며 욕만 실컷하고 살았다. 정작 나도 아래를 내려다볼 땐, 그들과 똑같이 순박함과 무모함을 빼먹으며 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늘 위보다는 아래를 보고 살아야 한다. 말은 쉬운데 정말 어렵다. 사내의 14만원은 고스란히 이사비용에 충당되었다. 차라리 팔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