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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운 Jun 19. 2023

박시백 - <35년>

가보지 않은 길을 갈 용기

1. 가의 전작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전반적으로 썩 만족스럽지 않은 책이다. 단 한 명이라도 친일파의 죄악을 낱낱이 알려내고 독립운동가의 운동을 알려내겠답시고, 아주 지엽적인 독립운동까지 시시콜콜 일일이 다 설명한다. 전반적인 흐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작가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과한 것은 부족함만 못하다. 지루하고, 맥이 뚝뚝 끊겨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기억에 남는 부분이 거의 없다.


어쩌면 독립운동이 단일한 전선을 이루지 못했고, 독립운동 내에서도 분열과 갈등이 심했다는 방증일지도 모르겠다.




2. 흔히들 한반도의 분단은 순전히 외세에 의한 분단이라는 견해가 있다.  동의하기는 어렵다. 처지가 비슷했던 중국만 봐도 그렇다. 장제스는 일본과 전쟁 중에도 공산당 토벌을 서슴지 않았고 마오쩌둥은 중일전쟁 중에도 미래의 국공내전을 준비했다. 이승만과 김일성(특히 김일성)에게, 서로 타협해 하나의 조선을 이룰 생각이 있었을까?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그래서 여운형과 김구가 돋보인다. 좌익이건 우익이건 사소한 견해 대립과 이념의 차이를 - 하지만 그들에게는 어마어마한 간극이었을 - 이유로 독립운동 판을 여러 번 깬다. 하지만 이 둘은 절대 판을 깨지 않았다. 여운형은 좌익, 김구는 임시정부에서 모두 존재감이 매우 미미했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켜낸 이들도 둘 뿐이었다. 결국 해방 직후 정국에서 단단한 입지를 가진다. 하지만 모두 암살된다. 냉전이라는 세계사의 전환기, 이념대립의 최전선이 된 동아시아에서 이들은 그 파고를 넘기 어려웠던 것이 아닐까.


김구와 여운형



3. 역사를 한국사에만 국한시켜 바라보는 것이 위험한 이유다. 거부하기 어려운 세계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 한반도가 어떻게 자리했는가, 제3자적이고 냉철한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


일제강점기 초기 독립운동가들의 세계정치 인식은 순진하다 못해 마음이 아플 정도다. 1차대전 종전 직후 인식은, '파리 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불쌍한 입장을 설명하면 독립되지 않을까?' 이상에 이르지 못한다. 당시 일본은 1차대전 승전국이자 상임이사국이었는데 말이다. 좌익 역시 소련 코민테른의 강령에 따라, 일사분란한 국제연대 속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꿈꿨지만, 소련은 자국의 이익에 따라 철저히 몸을 사렸다. 국공내전에서는 국민당을 따라다니기 급급했고 한국전쟁에서도 중공과 같은 적극적인 지원을 꺼렸다.


정전협정 당사국에 소련이 없는 이유.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결국 승인했지만 수십차례나 반려했다. 소련은 한국전에 무기만 우회하여 지원했을 뿐 중공처럼 파병은 하지 않았다.


4. 더 나아가보자. 흔히 근현대사에서 일본제국은 '악독한 착취자'로만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들이 식민지에서 자행한 범죄는 요만큼도 옹호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이들도 세계사적 흐름에 세워 놓고 낯설게 봐보자는 취지다.


그들도 시작은 우리와 똑같았다. 병인양요처럼 미국인들이 포를 쏘며 시위하자, 반강제로 항구를 열었다. 하지만 동아시아 3국 중 중화질서에서 가장 비껴나 있어 제국의 침략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 사이 선진 문물을 폭발적으로 흡수했다. 결국 제국주의 시대 최후발, 유일 비유럽 제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운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려는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운은 그냥 오지 않는다.

일본의 개항을 묘사한 일본 민화. 페리 제독이 이끌었던 미국 전함이 귀신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들도 시작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원군은 근 100년간 해묵었던 조선의 병폐를 10년도 안 되어 모두 해결한, 조선사에 몇 되지 않는 성공한 개혁가다. 세도정치를 끝장내고 삼정의 문란을 일부 해결했다. 뛰어난 개혁가였지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갈 용기까지는 없었다.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고도 결국 망국을 막지 못했다.


이 사진이 무슨 척화의 상징마냥 치트키처럼 쓰이지만 대원군은 당시로서는 명백히 개혁가에 가까웠다.


5. 중공으로 불리던 중국이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지위로 올라오기까지, 핑퐁외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남순강화)를 빼놓을 수 없다. 핑퐁외교로 국제무대에 데뷔한 중공은 대만으로부터 '중국'의 이름을 되찾고, 90년대부터는 자유세계의 공장이 되어 폭발적인 성장을 거둔다. 공산국가가 단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이다. 하지만 그렇게 가지 않았다면 지금의 중국도 없다.

90년대 초에 공산당 내 개혁개방 반대가 극심했다. 덩샤오핑은 중국 남부 특구를 순방하며 정면돌파했다. 개혁개방으로 발전된 모습이 TV에 대서특필되자 반대파도 거스를 수 없어졌다.


한국도 한국전쟁 후 독특한 길을 걸었다. 한강의 기적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뤘다. 하나만 이뤘다면 선진국일 수 없다. 둘 모두를 이뤘기에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역시 세계 어느 나라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이었다.


지난 선조들이 해왔던 대로, 외국이 해본대로 따라해서는 지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지나온 역사를 붙들며 재탕을 반복하는 일은 용기없는 나약함의 다른말로 보인다. 가보지 않은 길이 막막할 순 있지만, 두려워 가지 않는다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망해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용기다.



P.S. 1. 일본 제국이 최후발 제국주의 열강으로서, 매우 수세적인 모습이 많이 비치는 것이 흥미롭다. 선발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열등감도 많이 비친다. 사실 그들의 시작도, 그들이 수탈한 조선, 중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잔악했는지도 모르겠다.


조선 침략의 근거였던 정한론도 결국 '생존'에 맥이 닿아있다. 일본 제국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위협하는 단검과도 같은 조선을 침략해야 한다. 논리부터 매우 수세적이다. 일제 말기 수탈의 근거로 쓰였던 '대동아공영권'. '귀축영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선 아시아가 단결해야 한다'. 정한론과 매우 유사하다. '귀축영미'같은 단어선택은 오히려 그 뒤에 숨은 열등감과 두려움이 비치기도 한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뿌렸던 삐라


조선의 병합은 매우 전광석화같이 진행됐다. 조선도 여느 식민지처럼, 1800년대 말 야금야금 열강들이 이권과 자원을 포섭해간다. 반식민지로 취하는 이득보다 직접통치인 민지로 취하는 이득이 더  임계점을 돌파하면 식민지가 되는데, 보통은 이 기간이 무척 길다. 인도도 영국으로부터 수탈은 150년 가까이 당했지만 실제 식민지 시기는 89년에 불과하다. 그런데 조선은 불과 1900년대 초에 외교권을 뺏기고 병합이 된다.


아무리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이겼고, 미국 영국이 모두 승인을 해줬다지만 지나치게 조급한 모습이 눈에 띈다. 일제강점기 잔악하기만한 통치는 그 조급한 마음의 발로였는지도 모르겠다. 일본에선 자국의 역사에 대해 '러일전쟁을 운좋게 이긴 일본 제국은 분수도 모르고 폭주하다 망했다'는 해석도 있다 하니, 특기할 만 하다.


P.S. 2. 중국에 통일 중화제국이 재등장한건 원나라 때부터다. 이 이후 중국은 중화제국의 주인만 바뀌었지 천년간 결코 분열하지 않았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한반도의 급변사태나 전쟁은, 오직 중화제국의 주인이 바뀔 때만 일어났다.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설 때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섰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설 때 왜란과 호란이 일어났다.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설 때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됐다. 중화질서가 소멸한 현대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다. 국공내전으로 중화민국이 패주하고 중공이 들어설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중국의 영향력이, 시대를 초월한 것임을 시사한다.


유튜브에 '중국이 분열해야 우리가 산다'는 식의 댓글이 많이 보인다. 그건 어디까지나 제3자인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일종의 기도나 주술에 가깝다. 중국이 분열할지, 주인이 바뀔지는 그들이 결정할 문제다.


다만 우리를 비롯한 모든 국가를, 끊임없이 세계 질서의 흐름 속에 제3자로 놓고 관찰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 활짝 열릴 때, 그 길을 뛰어갈 수 있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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