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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주 Jan 11. 2019

황홀한 잠영

    김윤아의 음악이 자의식 과잉이라는 글을 읽었다. 자의식 과잉. 이 문구는 언제든 나에게 감정적 동요와 눈을 질끈 감게 하는 아찔함을 갖게 한다. 스크린 밖의 유쾌하고 생각 없는 사람들을 볼 때면 멀어지는 아득함과 나만 스크린 안에 있다는 외로움, 그리고 멍한 정적감을 느낀다. 가장 밑에서는 나를 잘근잘근 씹어먹는 수치심이 눈물짓게 한다. 


  아마 자의식 과잉은 일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지독하게 우울해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의 소유물일 것이다. 그녀의 천재성은 자의식 과잉과 우울에서 왔을까. 자기 안으로 침잠하다가 침잠하다가 결국 토해내는 음악이었을까. 세상 찬란하게 빛나는 김윤아도 자의식에 갇힌 채 여기서 꺼내 달라고 아우성을 질렀던 시절이 있었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 위안이 된다.  


    이따금 찾아오는 우울감은 짧으면 1주일, 길면 석 달 정도 찾아오고는 한다. 웅성대는 회오리 속에 침잠해 있다보면 시간은 사막같이 흐르기도 하고, 멀미같이 붙잡히기도, 아침같이 지나가 버리기도 한다. 그럴때 마다 나의 우울은 마치 내 삶에 내려진 낙인이자 저주같다고 생각한다. 그때가 가장 슬프다.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우울을 위로할 방법으로 최고는 역시 예술이다. 완벽한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그 안에 합일될 때 느끼는 격한 감동은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예술이 싫다. 아니, 예술을 사랑하는 내가 싫다. 내가 저주 받은 사람이라는 반증이 되어버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Queen의 음악을 들으면서도 데면데면하게 감상하는 그들이 부러울 때가 많다. 하지만 또 격하게 감동을 느낀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싶어진다. 너희들은 이런 감동을 느낄 줄 아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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