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새 없이 가슴을 내리치는 이 고통은
어째서 나를 죽일 수 없나.
최근에 나온 김윤아의 신곡 『키리에』의 시작부분이다. 그녀는 이 곡의 탄생을 저 verse로 풀어낸다. 삶이 고단하고 유난히 세상의 지악함에 신물이 날 때 문득 저 한 줄을 자연스레 썼다한다. 한 문장을 쓰고 나니 걸릴 것 없이 멜로디가 나오고, 자연스레 다음 소절이 나오고, 정신차려보니 전체가 구성되어 곡이 완성되어 있었다고. 작사, 작곡을 전혀 모르는 나에게는 약간 신화같은 이야기이다. 그녀가 저 한줄에 끌려 곡을 만들어버린 것 처럼『키리에』의 저 도입부에 나 역시 곡에 빨려 들어가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죽어지지 않는 고통이랄게 의심스러울 정도로 괴롭고도 지독한 고통을 그녀는 겪고 있었구나. 그 고통의 크기를 감히 어림잡기도 어렵다.
우연한 기회에 그만한 고통을 받은 삶을 산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하루 아침에 아들을 잃었다. 의경이었던 그녀의 아들은 선임인 경위의 총에 맞아 죽었다. 경위는 총에 실탄이 들어 있는지 몰랐으며, 장난치다가 우연히 총알이 나갔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그리고 그는 사람을 죽인 대가로 고작 6년형을 받았다. 그녀는 아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분노, 극심한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으며, 남편이 곁에 있지 않으면 30분도 혼자 견디지 못했다. 피부는 탁하게 검어졌다. 언제든 모든 사람이 다 떠나버릴 것 같다는 말을 반복하며 사회와의 소통을 격하게 저항했다. 김윤아의 심정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 처럼 그 모습을 목격하면서도 그녀의 심정도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순간에 변해버린 그녀의 삶은 이상하게도 섬뜩하고 허무했다.
사람마다 그 사람마다의 상식이란게 있다. 이 정도의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저 정도의 일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다는 식의 형태를 가진 기본적인 신념이다. 세상에 대한 상식은 생활을 영위하는데 기본적인 안녕감을 제공한다. 우리나라에 서 오후 3시에 어디를 돌아다니던 우리는 죽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우리는 그 상식들로 다져진 틀 안에서 한발자국 조금씩 상식의 범위를 넓혀간다.
하지만 누군가의 삶 속에서는 상식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날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이 상식밖의 이유로 이별을 선고한다던가, 하루 아침에 내 가족이 죽임을 당한다던가하는 사건은 단 한번으로도 그가 사는 세상을 바꿔버린다. 일생에 걸쳐 구축해놓은 안전한 세계의 상은 무너지고,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 경계하는 삶으로 진입하게 된다. 얼마던지 나의 연인은 불시에 떠날 수 있고, 나의 자식은 죽임을 당할 수 있고 나는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런 불예측성과 무기력함과 싸워야한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며, 단순히 남에게 그러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그들의 안전한 상식의 세계를 무너뜨릴 마음이 없다. 마음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다. 경계하는 삶을 온전히 이해하는 능력은 오로지 겪어본 자의 것이다. 안녕감이 무너진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이 그 안녕감을 회복하기란 굉장히 어렵다. 힘을 내라고. 한 번 운이 나빴다고. 기운 차려서 예전으로 돌아가라고 가볍게 뱉는 안녕한 세계의 사람들은 잔인하다.
"나를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성장시킨다"라는 말이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정확하게는, 나를 죽일 뻔한 고통은 나를 망가트린다. 상처를 받고 성장한 사람은 성장을 도모할 정도로 적당한 크기의 상처를 받은 사람은 사실 운이 겁나게 좋은 사람일 수 있다. 고통과 상처로 삶이 망가진 사람 앞에서 저 문구는 가히 폭력적이다.
철철흐르는 피를 틀어 막는데만 힘을 쏟는 사람들을 볼 때 세상의 불공평함을 실감한다. 그들이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기에 남은 삶을 지혈하는데 남은 인생을 써야할까. 그들이 처절함과 상처에 익숙해진 뒤 담담함 모두 아름다울 정도로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