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가신 이후엔 쓸 수 없어서 지금 씁니다.
보통 11시 쯤 집에 돌아온다. 이른 기상 이른 취침이 거의 가훈인지라 우리 집은 컴컴하다. 어디 가서 말하기 조금 부끄러워 말하지 않지만, 가장 자부심 넘치는 나의 하루 일과는 집에 돌아온 후 할머니를 안아드리는 일. 낮과 밤을 구분하지 않고 주무시기 때문인지, 아니면 항상 이쯤에 손자가 돌아옴을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인지, 모두가 잠에 취한 밤에도 할머니는 깨어 계신다. 11시가 넘었는데도 배고프겠다고 저녁 먹고 자라고 하시는데, 우리나라 할머니들은 손자들이 조금이라도 배고프면 큰일 나는 줄 아시는 것 같다. 근데 또 그 시간에 뭘 먹기는 무리가 있지 않나. 그럼 나는 은근 슬쩍 뭐하나라도 집어 먹는 척을 한다. 그제서야 할머니는 안심하신다.
매일 밤 돌아와서 할머니를 안아드리는 일을 계획하고 시작 한것은 아니었다. 뭐, 평소에 별로 살가운 손자도 아니기도 하고, 오글거리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빨리 씻고 자고 싶기도 했으므로 그런 생각을 딱히 해본 적은 없었다. 근데 그 밤은 많이 지쳐있었고, 닳아 있었으며, 그래서인지 할머니의 "배고프겠다. 저녁먹어라."가 진하게 들려왔다. 뭔가에 홀린 듯 오늘 하루 잘 계셨냐고 누워있는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안아드렸는데... 왠 걸. 너무 따뜻한거 아니겠는가. 하루 종일 아프셔서 누워계셔서일까? 뜨끈한 할머니의 팔, 등, 배가 나를 안도감에 차게 했다.
할머니의 피부는 하얗다. 아흔을 넘은 노인치고 곱다-는 의미는 아니고, 원인불명의 백반증 때문이다. A4용지의 흰색과 크레파스 살색 중에 A4용지쪽에 좀 가깝달까. 젊은 시절 무수히 병원을 전전하며 병을 고쳐보려 집안식구들이 총출동하여 나섰다는데, 소용이 없었다한다. 추정하기로는 한이 맺히다 맺히다 돌이 되어버린 할머니의 심장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한다.
할머니의 손은 정말 우리 몸의 혈관이 정맥과 동맥으로 이루어져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손거죽이 얇고 투명해 그 속이 다 들여다보인다. 빨간 혈관 몇개, 파란 혈관 몇개,,,신기하다. 손 등에 90년의 삶이 투명하게 퇴적되어 있는가 싶다. 손끝을 올려다보면 마디마디 굵은 손가락이 보이는데, 내 남동생의 손가락보다 훨씬 굵다. 엄지, 제일 마음 아픈 엄지는 기형적으로 휘어있다. 엄지가 반 접혀 있는데 보통의 방식이 아니고, 가로로 접혀 있다고 하면 이해가 될까? 젊은 날 너무 많은 베를 짜서란다. 베짜기로 할머니는 5남매와 10명이 넘는 사촌집안 자식들을 길러내셨다. 휘어버린 엄지는 할머니의 훈장이다.
아래로 눈길을 돌려 다리를 보면, 앙상해진 하얀 종아리와 부을대로 부어 두배나 커진 무릎, 근육이라곤 전혀 없는 허벅지가 보인다. 평생의 골칫거리였던 관절염으로 이제는 다리를 쓰실 수 없기 때문에 집안 내 할머니의 이동반경은 1미터 이내. 미끄러운 방석을 엉덩이에 깔고, 팔힘으로 쭉쭉 밀고 다니신다. 할머니가 직접 고안하신 이동수단이신데, 그 기동성을 보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살짝 다가가 가볍게 껴안지만, 할머니의 두 팔이 내 목을 강하게 감는다. 들뜬 목소리로 "우리 착한 00왔냐"하며 반기신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고귀한 일이 없음을 할머니의 온기와 약한 떨림에서 새로이 느낀다. 껴안던 팔을 풀고 몸을 떼려 하는 순간에도 할머니는 팔에 힘을 놓지 않는다. 이런 강인함이 이 육체에 남아있었나 싶을 정도로 나를 계속해서 껴안는다. 떨어짐에 대한 약한 저항이 애잔하다. 내가 느끼는 온기에 대한 감탄을 당신께서도 느끼시는지. 밤낮의 분절없이 지루하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92세의 하루에는 손녀와의 짧은 포옹이 엄청난 이벤트인걸까. 모든 식구가 집을 나서고, 할머니는 홀로 하루를 견디고 이해되지 않는 TV채널을 수십번 돌리셨겠지. 그런 지진한 적막끝에 찾아온 손녀의 작은 애교가 너무 즐거우신듯 하다. 어린아이의 눈빛으로 나를 향해 웃는 할머니가 목을 메게 한다. 할머니의 눈빛은 아직 총명한 영혼을 반영하는 것일까. 아니면 생명을 담보로 얻은 마약 진통제 때문일까.
매일 기도하듯 할머니를 본다. "당신이 떠나시고 내가 덜 힘들게 도와주세요." 미열이 있는 듯한 할머니의 지금 이 온기에 이렇게나 마음이 미어지는데, 할머니의 부재 속 나는 얼마나 무너질지 암담하다.
하루하루 마음을 정리한다. 아주 당연하게도 당면하게 될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영원한 상실앞에서 가만-히 대기한다. 당신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아서, 쓸 자신이 없어서 지금 쓴다. 아마 나는 한 자도 못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