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써보는, 직장인 이무용의 이야기
SL 인터내셔널 본사 건물 옥상. 희미한 담배 연기가 하늘로 흩어졌다.
그 연기 사이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다.
"너, 네 부모님도 니가 이렇게 일하는 거 아냐? 어?"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담배 한까치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말끝마다 혀를 차는 소리가 섞였다.
젊은 남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잔뜩 움츠러든 어깨와 초췌한 얼굴,
그의 모습은 폭우에 꺾인 나무처럼 초라해 보였다.
가슴에 걸린 사원증엔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무용.
"이게 네가 만든 자료야? 이따위로 일할 거면 그냥 그만둬!"
남자는 바닥에 담배를 비벼 끄며, 한참을 더 무용을 몰아붙였다.
그러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울리자,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었다.
"아, 네네 상무님! 지금 당장 가겠습니다. 네, 잠시 화장실에 있었습니다."
전화를 끊은 그는 무용을 흘겨보더니,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넌 반성 좀 더 하고 내려와라."
문이 쾅 닫히며 옥상엔 적막이 흘렀다.
무용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잿빛 구름이 가득한 하늘은 그의 마음처럼 답답했다.
손끝은 미세하게 떨렸고, 땀이 스며나왔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고 있는 거지?"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스스로도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발걸음을 옥상 난간 쪽으로 옮기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빽빽한 빌딩 숲과 그 사이를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처음엔 단순히 ‘적당히 하다 그만두자’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게 내 손을 벗어나버렸다.
이제는 단지 생존이 목적이 되어버렸다.
무용은 자신을 설득해본다.
"너 아직 괜찮아. 이렇게 끝낼 정도는 아니야."
하지만, 난간 위에 올라선 발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회사라는 거대한 늪 속에서 허우적대며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도 그를 세상과 연결짓는 건 이 얇은 난간 하나뿐이었다.
"무용아, 정신 차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면 좋았을까. 하지만, 결국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혼자였다. 언제나 혼자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난간에서 내려왔다.
발밑이 흔들릴 것처럼 느껴지는 건 오히려 그가 살아 있음을 증명했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무용은 스스로가 회사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서 얼마나 무의미한 부품처럼 느껴지는지 깨달았다.
24층 높이의 빌딩 속에서 그를 제외한 모두가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책상에 도착해 억지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그는 마음속에서 문득 떠오른 질문 하나를 삼켰다.
"나는 정말 무용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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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용은 뱀띠였다. 89년, 황금 뱀띠.
황금이 붙었음에도, 무용은 본인의 간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12간지 중에서도 유독 부정적인 이미지로 꼽히는 뱀.
성경에서는 교활함의 상징, 동화와 소설에서도 야비하고 위험한 존재.
심지어 이무용이란 그의 이름마저 용이 될 수 없다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무용은 일반적인 뱀과는 정반대였다.
나름 머리가 좋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약삭빠르지 못했고,
오히려 우직하게 상황에 부딪히다 미련하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
이무용이란 사람과 뱀이란 동물은 그닥 어울리지 않았다.
"내 이름은 무용이지만, 무용하지 않다."
그는 가끔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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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용은 미련할만큼 우직하게 달려온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 내내 장학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했고,
안해본 알바가 없을정도로 쉼 없이 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스스로 충당했다.
그러나 그는 졸업을 위해 군대를 미루는 선택을 했다.
그 결과, 졸업 후 취업 준비는 더 힘들어졌다.
나이는 또래보다 많았고, 경쟁은 치열했다.
매일 카페와 집을 오가며 자소서를 쓰는 날들 속에서 그는 스스로의 열정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우직한 무용은 아무도 강요하지 않은, "책임감"을 어깨에 지고 살아왔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내어 지원한 SL 그룹에서 합격 소식을 받았을 때,
그는 한동안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기쁨도 컸지만, 어딘가 텅 빈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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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근 날, 이무용은 정장을 차려입고 SL 인터내셔널 본사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토록 바라던 첫 직장, 그리고 대기업.
간절히 바라던 회사가 맞는진 모르겠지만,
SL그룹이 주는 상징성이 무용의 자존감을 왠지모르게 올려줬다.
하지만 자존감과 긴장감은 별개.
잔뜩 긴장된 마음을 진정시키며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무용.
손에는 작은 화분이 들려있다.
책상 위에 놓고 키우기로 결심한 이 식물, 스투키.
괜한 의미부여를 좋아하는 무용은, 출근 전날 집 앞 꽃집에서 화분 하나를 샀다.
꽃집 주인의 영업용 멘트가 무용의 귓가에 맴돈다.
"그거 아세요? 그냥 잎사귀같지만, 스투키의 꽃말은 '영원한 생명'이에요"
자리 배치가 끝나자 SL인터네셔널 마케팅 1팀의 팀장 김훈기가 그를 불렀다.
"무용 씨, 첫날인데 긴장되겠지? 우리 마케팅 1팀은 편하게 지내는 분위기니까 걱정 말고 잘 따라오면 돼."
무용은 긴장한듯 고개를 끄덕이며 팀 분위기를 살핀다.
무용을 반기는듯한 누군가, 그리고 심드렁해보이는 누군가.
김훈기는 한명 한명, SL 인터내셔널 마케팅 1팀을 소개했다.
“여기는 우리 종수, 아마 무용씨가 가장 많이 배울 사람일거야.
종수, 무용씨 잘 키워볼 수 있지?”
마른 체구에 날카로운 눈빛의 이종수는 “잘 부탁해요”라는 짧은 말과 함께
시선을 노트북으로 돌렸다.
“그리고 우리팀의 꽃, 미주씨. 남자친구 있으니까 괜히 치근덕대면 안되고”
김훈기가 미소 지으며 이미주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미주는 티나지 않게 김훈기의 손길을 피하며 무용에게 살짝 미소지으며 인사했다.
“이미주라고 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마지막으로 우리 동수.
무용씨랑은 6개월 차이지만 그래도 선배니까, 깍듯이하고”
동그란 안경을 쓴 동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무용에게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우리 잘해봐요, 무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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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우리 팀 매출 자료고,
이건 주간회의, 이건 시장 리서치 자료. 얼른 읽어보고 궁금한거 있으면 물어봐요.”
이종수가 두툼한 A4용지 더미를 한가득 들고와 무용에게 건넸다.
순간 당황했지만, 무용은 생각한다.
’가만히 앉아있는것 보다는 뭐라도 하는게 낫지’
무용은 가만히 앉아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잔뜩 긴장한 탓에 눈에 들어오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지만,
어떻게든 머리에 내용을 우겨 넣으려 노력해본다.
점심시간, 무용의 생각과 달리 팀원들은 모두 '선약이 있다'라는 말과 함께 흩어진다.
팀장 김훈기가 말했다.
"무용이 못먹는거 있나?"
점심 메뉴는 김훈기가 정했다.
메뉴는 추어탕. 회사 근처 오래된 맛집이란다.
식사 내내 무용은 훈기가 물어보는 시시콜콜한 질문에 답하느라,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무용씨 여자친구 있어? 없지? 신입들은 맨날 없대”
그 이후에도 부모님은 뭐하시는지, 술은 좋아하는지… 훈기의 질문이 이어졌다.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무용.
김훈기는 ‘재미없는 놈’이라고 평가했다.
식사 후 그는 담배를 피우며 무용에게 조언과 훈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멘트를 남겼다.
"일이라는 건 미리미리 해야 해.
그리고 무용이 너, 놀 수 있을때 놀고 해야지 너무 재미없더라"
잔뜩 긴장한 무용, 긴장과 불편을 구분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식사 후 나른함을 느낄새도 없이,
무용은 종수에게 업무를 배우고, 동수와 미주가 담당하던 데일리 업무를 인수인계 받는다.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동수와 미주를 시작으로 하나, 둘 퇴근하기 시작했지만,
잔뜩 받은 서류와 업무인수인계 파일 속, 무용은 퇴근하지 못한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무용은 어느새 꼬깃해진 정장 자켓을 들고 회사를 나선다.
비슷한 처지의 직장인들로 가득찬듯한 을지로의 지하철-
정신없이 졸던 무용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못한채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