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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용한가 - 2

그냥 써보는, 직장인 이무용의 이야기

by wordsbyme

입사 후, 무용의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SL인터네셔널 마케팅 1팀은 식음료를 전담하는 팀으로, 크게 에너지, 건강 파트로 나뉘었다. 이종수는 두 파트를 모두 아우르는 파트장이었고, 김동수와 이미주는 기존 운영 중인 건강 브랜드와 신규 브랜드 발굴의 업무를 맡고 있었다. 신입인 무용은 두 파트 중, 에너지 파트에서 기존 운영 중인 자양강장제 브랜드, "큐린"을 담당하게 되었다.


무용이 담당하는 자양강장제 제품은 시장 점유율이 탄탄한 SL인터네셔널의 대표 브랜드다. 시장에서 2~3위권에 꾸준히 드는 강한 브랜드지만, 오랜 역사를 대변하듯 제품 종류가 상당히 많아서 공부가 필요한 브랜드이기도 했다. 무용은 본인의 첫 담당이 큰 브랜드라 뿌듯하기도 했지만, 조금만 실수해도 큰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초조해지기도 했다.


입사 후 일주일 동안, 무용은 이종수에게 회사의 전반적인 시스템과 업무에 대해 인수인계를 받았다. 그리고 그간 동수가 하던 팀 매출, 회의자료 취합 업무를 건네받았다. 숫자가 조금만 틀려도 귀신같이 눈치채는 종수에게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으며, 무용은 하루하루 버텨가고 있었다. 그리고 김훈기가 무용을 호출했다.


"무용, 큐린이 시장에서 어떻다고 생각해?" 김훈기가 가느다란 눈을 더 얕게 뜨며 묻는다.

"매출은 꾸준히 오르고 있고, 경쟁사 신제품이 계속 나오지만 점유율도 방어가 잘 되고 있습니다."

잔뜩 긴장한 표정의 무용이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한다.

"다 아는 내용이잖아. 내가 말하는 건 큐린이 젊은 층한테 먹히냐는 거야" 김훈기가 한숨 쉬며 말한다.

"우리 브랜드 리뉴얼하게 플랜 좀 짜와 봐. 너 이거 제대로 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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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좋은 기회이지만, 이제 갓 입사핞 무용에겐 다소 무겁게 느껴지는 업무.

한참을 고민하던 무용은 먼저 인수인계받은 자료부터 정리하기 시작한다. 매출, 시장점유율, 디자인, 제품군, 가격... 어느새 얼음이 다 녹아 밍밍해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머릿속에 큐린의 정보를 욱여넣어본다.


큐린은 연평균 2~3% 매출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다. 시장 점유율은 29~30% 수준. 숫자만 보면 나쁘지 않지만, 소비자 연령대가 다소 높다. 자양강장제보다, 에너지 드링크를 선호하는 젊은 층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브랜드가 되어가고 있다. 리뉴얼이 필요한 이유를 먼저 정리하며, 무용은 어떻게 리뉴얼하면 좋을지 방향을 잡아본다.


3일 정도 지났을까. 훈기가 무용의 어깨를 툭 치며 묻는다. "큐린 리뉴얼, 언제 보여줄 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무용은 엉겁결에 '내일까지 보여드리겠다'라고 말한다.

파티션 너머로 보이는 이종수의 표정이 어딘가 좋지 않다는 걸, 무용은 알지 못했다.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 혼자 남은 무용은 괜히 내일까지 보고하겠다고 말한 자신을 자책한다.

"이게 맞는 방향일까?" 무용은 머릿속에서 끝없이 되풀이되는 질문에 밤새 뒤척였다.

종수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고민했지만, '이 정도는 혼자 해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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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 한숨도 제대로 못 잔 무용이 퀭한 눈으로 훈기의 앞에 앉아있다.

무용은 미리 프린트해 둔 자료와 함께, 큐린의 리뉴얼이 필요한 이유와 방향성에 대해 설명한다.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자료를 보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훈기. 무용은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는 리액션에 더 심장이 뛴다.


다소 장황한 무용의 설명이 끝나고, 훈기가 묻는다.

"이거, 종수랑도 이야기한 거야?"


무용은 한 시간 동안 훈기에게 혼이 났다. 종수, 하다못해 동수나 미주에게도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는 게 괘씸하다고. 신입의 태도에 대한 일장 연설을 들었다. 보고라인을 스킵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과 함께.


한숨도 못 자고 탈탈 털린 무용은 조심스레 종수에게 면담을 요청한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회의실에 들어온 종수는, 무용이 만든 자료에 대한 촘촘한 피드백을 쏟아낸다.

정신없이 피드백을 받아 적는 무용에게, 종수는 무언가 말하려다 말고 자리를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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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은 종수와 오랜 논의 끝에, 큐린의 패키지 디자인에 젊은 감각의 색감을 추가하고, SNS 이벤트와 새로운 광고 캠페인을 제안했다. "큐린을 단순한 자양강장제가 아니라, '하루의 활력을 더하는 브랜드'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결론지었다.


그 후 종수와 몇 번씩 자료를 다듬고, 무용은 훈기에게 보고를 완료했다.

"고생했어, 리뉴얼 안은 상무님 보고 드리고 보자고."


드디어 끝났다는 후련함. 무용은 종수에게 찾아가 고마움을 표시한다.

"파트장님 덕분에 보고 잘 마무리했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종수는 무용을 살짝 바라보고 말한다.

"무용 씨, 회사에는 보고 체계가 있어요. 앞으론 나하고 먼저 이야기하고 팀장님께 보고 드려요."


무용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입사 후 가장 큰 고비였던 보고가 끝났다는 것, 그리고 곧 SL그룹의 신입사원 연수가 있다는 사실에 설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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