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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Feb 22. 2024

무늬만 어른

이른 아침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무심코 받았다. "엽뗴여?" 내 한마디에 여론조사를 위해 발신한 상대방은 목소리만으로 미성년자임을 감지하고 미안하다며 바로 통화를 종료했다. 설문조사 따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가도 30대 아줌마를 학생인 줄 알고 강제종료되는 해프닝이 벌어지니 어안이 벙벙해졌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챙겨 먹고 다가오는 신학기 준비를 위해 아이들과 집 앞 미용실로 출동했다. 첫째 딸은 긴 머리라 일 년에 한두 번 머리를 다듬는 편이고, 둘째 아들의 커트주기는 한 달에 한 번인데 방학이라 어느새 두 달이 다되어갔다. 단발 스타일인 셋째를 포함해 어린이 세명 커트가 오늘의 목적이다.


들어가자마자 익숙한 첫째와 둘째가 미용사분께 맡겨져 의자에 앉혀졌고, 원하는 스타일을 말씀드렸다. 동시에 분위기를 파악한 셋째는 커트를 하지 않겠다고 수십 번째 발언하고 있었다. 머리를 감는 것도, 묶는 것도 모두 싫어하는 막내는 앞머리라도 자르자고 간식으로 달래 보았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미 혼자 마음먹은 이날의 목표 스코어는 2명 성공, 1명 실패로 끝이 났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쓰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다른 기질의 어린이 세명을 양육 중인 사람으로서 미션을 온전히 해결하지 못해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전화기를 확인해 보니 막내가 입학예정인 유치원에서 부재중 전화 2통이 와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정보육을 했던 막내는 취학을 앞둔 마지막 1년 동안 유치원 생활을 경험해 보고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었다.


곧장 유치원에 전화해서 선생님과 통화하니 당일 유치원 오리엔테이션인데 내가 참석하지 않아서 연락을 주셨다는 것이었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학교로 사이트에 등록된 전화는 배우자의 번호로 사전에 문자 알림이 발송되었음에도 바쁜 일정 때문에 깜박 잊고 나에게 일정 공유를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다행히도 불참에 대해 양해해 주시고, 추후 있을 입학식 일정에 대해서 구두로 안내해 주시며 오리엔테이션 자료를 따로 이메일로 보내주시기까지 하셔서 감사한 마음이었다. 모든 것이 표면적으로는 잘 마무리되었으나 마음 깊숙이에서는 여전히 무언가가 요동치고 있었다.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때가 떠오르면서 곧 정신없이 밀려올 3월이 미리 예상되기도 했다. 둘째 아이는 초등학교, 셋째 아이는 유치원 입학을 앞두었는데 그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네 사람 중 유일한 어른인 나만 교감신경이 더욱 활성화되고 있었다.


아침식사를 차리고 정리하고, 미용실에서 막내만 커트를 하지 못한 채 돌아와서 점심을 차리고 정리했다. 유치원 오리엔테이션 불참사실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이들과 나가기로 한 약속을 지키려 외출준비를 하면서 자꾸만 중얼거렸다. '진정해, 난 할 수 있어.'


첫째 아이를 수영강습에 보내놓고 둘째와 셋째 아이는 쿠션감 좋은 실내놀이터에 잠시 뒹굴고 있었다. 몸으로 이리저리 낄낄대며 노는 모습을 그저 안전요원처럼 한편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둘이 부딪치면서 둘째 아이가 애매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얼마 전부터 흔들린다고 알려주었던 유치를 보여주며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어미에게 묻고 있었다. 흔들리던 유치는 이미 각도가 많이 꺾인 채 피가 나고 있어서 치과에 가지 않아도 금방 빠질 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문제는 안전요원으로 서있던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유치를 빼본 경험이 있는 유일한 어린이인 첫째 아이는 함께 있지 않아서 도움을 구할 수도 없었다. 가방 속에서 두툼한 휴지를 한 장 꺼내서 들고만 있는데 아들은 갑자기 화장실로 가자고 나를 이끌었다. 거울로 상태를 확인한 후 흔들리던 유치를 휴지로 감싸더니 몇 초 후 휴지 안에 유치가 담겨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휴지로 솜을 만들어 물고 아들은 사진을 찍어달라며 브이 포즈를 지었다. 안전요원 흉내를 하고 있던 나는 놀란 토끼눈을 한채 머리를 무한대로 쓰다듬으며 고맙고 자랑스럽다며 연신 말하고 있었다.


이날 저녁메뉴는 유치가 빠진 기념으로 아들이 좋아하는 식당에서 함박스테이크를 먹기로 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올 때까지도 나는 그저 멍해있었던 것 같다. 입이 짧은 아들은 새로운 경험을 해서인지 좋아하는 메뉴를 먹어서인지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천천히 정말 1인분을 다 먹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은 밤 너무나도 졸리고 피곤한 하루였지만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여론조사는 학생이냐며 미안하다고 하며 끊겼고, 미용실에서는 막내와 실랑이만 했으며 유치원 OT도 빠지고, 아들 유치도 빼주지 못했다. 딱 무늬만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도 나에게 이렇게 용감한 어린이들이 태어나주어 정말 다행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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