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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Jun 17. 2024

학원 안 가는 아이, 못 가는 아이

'체험수업 무료' 아파트 상가에 사고력 수학학원이 새로 생겼다는 전단지가 크게 붙어 있었다. 사고력은커녕 현행 교과과정이라도 구멍 없이 잘 따라갔으면 하는 마음에 보고도 나와는 상관없는 곳이겠거니 싶어 지나치려는 찰나 문맹과는 거리가 먼 둘째 아이가 갑자기 목소리를 내어 발길을 멈추게 만들었다.


"엄마! 무료래 무료! 나 이 체험수업 시켜줘!"

얘가 사고력수학이 뭔지나 알고 하는 말인가 싶어 대꾸하지 않고 지나치려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원하면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전단지에 적힌 전화번호로 체험수업 신청 문의를 드리자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셔서 방문 예약을 잡았다. 어쨌든 미션 하나 수행 완료.


기다리던 체험수업 날. 공간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아이가 신나는 마음으로 의자에 착석한 것을 보고 40분 후 피드백을 들으러 다시 오기로 했다. 어떤 시간이 보냈을지 궁금한 어미는 아이가 어떤 반응일지 가장 궁금했지만 제일 먼저 마주한 반응은 체험수업을 진행한 선생님의 반응이었다.


"어머니, 잘하는데요?"

초등 1학년 아이의 교과과정은 서술형 문제까지 잘 수행해 주었고, 공간지각력을 요하는 사고력 문제들만 가정에서 다루어보지 않아 아리송한 느낌이라 힌트를 주며 진행해 보았다고 알려주셨다. 아이의 능력이 또래 누구와 함께 수업을 진행해도 무리 없을 정도라 반색을 하며 재빠르게 인적사항을 요구하셨다.


해당 사고력 학원의 수업은 최소 2명부터 최대 4명까지 한 그룹으로 묶어 수업을 진행한다고 하셨다. 같은 나이에 한해 비슷한 수준의 아이들을 그룹으로 배치하는데 수준을 알기 위해서는 체험수업이라는 이름의 레벨테스트가 필수였던 것이다. 그러니 체험수업 무료를 내걸었던 것은 학원 생존을 위해 어쩌면 당연했다.


여러 교구를 만져보며 제법 어렵지 않은 수준의 문제들을 풀어낸 둘째 아이는 나올 때 기분이 꽤 괜찮아 보였다. 그리고 재미있었다는 후기까지 덧붙였다. 이 순간을 놓칠 리 없는 첫째 아이와 막내는 안에서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추측하기 시작했고, 본인들도 어서 체험수업을 해보고 싶다며 야단이었다.




일주일 뒤로 잡힌 막내의 체험수업을 잠시 상상해 보았다. 언어지연으로 인해 듣고 지시사항을 수행하는 능력이 부족한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지만 어미가 예견되는 일이라고 해서 아이가 해보고 싶다는 것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막을 권리는 없었다. 그러기엔 여러 교구들로 무언가 만들어내는 집중력은 좋은 편이었다.


체험수업 이후 아이가 원하고 학원에서도 원생으로 받아주신다면, 추후 있을 아이의 지능검사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희망회로를 돌려보지만 관건은 아이 수준과 비슷한 또래를 찾는 것이라는 점에서 생각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로부터 며칠뒤에는 초등 1학년 팀을 구성중이라며 체험수업을 완료한 둘째 아이가 정식으로 수업에 등록할 수 있는지 의사를 묻는 연락을 받았다. 본인의 의견을 최종 반영하여 결정하고자 아이에게도 묻자 어쩐지 체험수업한 날과는 달리 거절의 의사를 보여주었다.


체험수업 한 번으로 충분하다는 아이는 숙제가 많다는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본인이 지속하기에 버겁다고 여겼는지 혹은 집에서 엄마표로 하고 있는 것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정확한 속내는 알 수 없었지만 싫다는 말에 더는 묻지 않았다.


막내의 체험수업을 위해 방문한 날 선생님께 살짝 귀띔하여 아이가 조음부분과 화용언어가 아직은 미숙한 편이라 양해 부탁드린다는 말을 덧붙이고 후딱 사라졌다. 그리고 40분이 다 되어갈 즈음 선생님은 체험수업을 마치고 오히려 아이의 보호자인 나를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아이는 여러 교구들을 만져보며 즐거워했고, 반가이 나를 맞았다. 아이와 공간을 잠시 분리한 채 마주한 선생님의 피드백은 둘째 아이 때와는 달리 짧고 간결했다. 눈동자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는 선생님은 난감한 표정으로 느린 속도의 아이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입을 떼기 시작했다.


"아이가 빠르진 않아요."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올 뻔했다. 얼마나 말을 꺼내기가 어려우셨으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싶어 느린 편이라고 편하게 웃으며 반응해 드렸다. 선생님은 그룹수업이 어려울듯하니 가정에서 여러 도움을 주면 좋을 것 같다고 덧붙이셨다. 그리고 아이가 어떤 면에서는 집중력이 좋다는 마무리 인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든 피드백이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잘하는 아이를 발견해서 더 상위권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지금까지의 한국사회처럼 학원은 보통의 아이 혹은 더 잘하는 아이를 찾는 것만 같다. 느리고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싶은 아이는 비싼 일대일 수업이 아니고서야 보통의 학원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느린 아이가 정상발달 속도가 되기 위해서 배움의 시간을 보낼 곳은 가정뿐이라는 느낌을 또 한 번 받았다. 0.1초 정도 아이를 세상에 내놓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 소중한 시간과 감정을 소모한 것에 대해 씁쓸한 마음이었지만 이런 순간이 또 찾아온다면 결국 아이 편에 서서 용기를 내고 세상 밖으로 나올 시도를 할 것이다.


그렇게 집안에서만 갇혀 지내지 않고, 희희낙락 광대처럼 웃으며 아이 손을 잡고 걷는 미래가 자꾸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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