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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방울 Aug 05. 2024

어떤 노인이 될 것인가

어느 토요일 심심했던 여덟 살 아들이 할머니가 가꾸는 텃밭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간 김에 할머니댁에 놀러 가고 싶었던 아들은 출발함과 동시에 할머니께 연락했지만 외출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고, 내일 놀러 오라는 말씀을 하셨다. 덕분에 할머니 얼굴을 보는 대신 할머니의 텃밭에서 각종 채소를 수확하여 잘 돌아왔다.


다음날이 되었다. 아이는 언제나 어른들이 그냥 둘러댄 듯한 빈말을 잘 기억하고 있다. 일요일 점심이 되기 전 오전에 아들은 다시 할머니께 연락드리니 평소 자주 만나던 식당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에어컨 기능이 약해져서 아이들이 더울까 봐 배려해 주신 것인데 아이 입장에서는 또 한 번 거절당한 셈이다.


언제나 반갑게 우리 가족을 맞아주시는 부모님께 막내는 어쩌다 챙겨 온 동전지갑을 내밀었다. 매번 말없이 용돈만 쥐어주시는 덕분에 벌써 용돈 주는 할아버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서 살짝 당황스러웠다. 그럼에도 텅 빈 동전지갑을 보며 웃으면서 용돈을 주시고야 말았다.


식당에서 만난 우리는 가족수가 많아 테이블을 따로 앉게 되었다. 할아버지 옆에 앉게 된 아들은 조금 먹다가 속도가 느려졌고 저작운동이 멈추자 이내 예상했던 소리를 듣게 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만나자고 했으면 밥을 잘 먹어야지."


아이가 밥을 잘 먹으면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벌어진 상황만 바라보고 하신 말씀이라 안타까웠다. 생선가시가 잘못 들어가서 먹기 불편했던 점, 약을 먹고 있어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을 귀가 어두워 말을 잘 알아듣기 어려우신 것이다. 몇 해 전 보청기를 맞추셨지만 그럼에도 착용하신 것을 본 적이 없다.


다른 테이블에서 그저 바라보면서 아들을 대하는 지금의 태도와 똑같이 길러졌을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려보게 되었다. 아들이 원하는 것은 만나서 식사하는 것뿐만 아니라 함께 대화를 하는 것이었을 텐데 조용히 처먹어야 하는 것을 몇 번 경험하면 아이는 스스로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지 예측이 가능하면서도 두려웠다.


엄마와 같은 테이블에 자리한 나는 근처에 사는 동생네가 식당에 못 오게 된 사유를 듣게 되었다. 전해 듣기로는 어디 다녀오는 길에 아기가 차에서 잠이 들었는데 잠을 더 재워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덧붙이셨다.

"잠을 덜 자면 꼬라지 부리나 보지?"


꼬라지는 '성깔'의 전라도식 방언이다.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엄마로부터 어릴 때 숱하게 들어왔던 꼬라지라는 단어를 어른이 되어 아주 오랜만에 듣게 되자 단어선택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입을 열고야 말았다. 나 역시 기억나지 않지만 신생아 때 밤낮이 바뀌어 엄마를 힘들게 했다는 아기였으니 차고 넘치도록 들었다.


평소 같으면 내 의견 따위는 좀체 내세우지 않고 듣기만 하는 편인데도 수면의 질과 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어미라 아기에게 성깔이라는 표현이 거슬린 모양이었다. 어른인 나도 잠을 못 자면 화가 나는데 수면시간이 더 많이 필요한 두 돌 된 아기는 낮잠도 당연히 필요하며 말보다는 울음으로 표현할 나이라고 대변했다.


그 밖에도 노인의 삶의 질은 근육이 좌우한다는데 하루에 두 시간 넘게 걸어 다니는 엄마는 유산소 운동만 하는 셈이니 보기에 근육이 빠지고 있는 것이 보여 난감했지만 체중이 감소하고 있다며 좋아하셨다. 또한 휴가라는 것이 없어 여행은 가볼 수도 없는 부모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점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누군가 책을 읽는 이유를 물으면 우스갯소리로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만큼 노인이 되었을 미래에 젊은 시절과 다르지 않거나 혹은 쓸데없는 말이 많아지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지 두려워 애써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노키즈존 못지않게 노인혐오라는 키워드도 동시대에 화두가 되고 있다. 맘카페에 친정이나 시댁 부모님에 대해 3040세대의 여성이 어려움을 토해내면 동감을 하면서도 내가 만약 글 속의 노인이라면 어떤 심정일까 상상해 보니 딱히 편 가르기가 될 수 없다는 게 느껴졌다.


출산까지 경험한 기혼여성임에도 '아줌마'라는 호칭은 여전히 어색하다. 아줌마는 힘겹게 아기 키우는 것을 몰라주면 서운하고, 혼자 다닐 때 애가 있는 줄 몰랐다고 하면 기뻐한다. 청년에서 아줌마가 되어가는 과도기라는 것이 티가 난다.


아마도 아줌마가 조금이라도 적응될 즈음에는 중년이라는 타이틀이 기다릴 것이고, 진짜 중년이 되었을 즈음에는 노인이라는 단어가 코 앞에 와있을 것이다. 30대 여자 사람은 지금까지 길러진 대로 살아갈지, 다른 방식을 택하여 진짜 어른이 되어갈지 자꾸만 생각에 잠기는 나날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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