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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건조 Sep 27. 2021

<13화> 스필버그에게 보내는 영화광의 반성문

김도훈 영화칼럼니스트




   나는 영화광이라는 말을 싫어했다. 영화광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사서 볼 책에서 왜 이렇게 신성모독적인 문장으로 글을 시작하냐며 짜증을 내는 분들이 벌써 눈에 선하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도 영화광이었다. 영화광이다. 영화광일 것이다. 다만 나는 한국에서 이 ‘영화광’이라고 불리는 어떤 스테레오타입을 약간 건드리면서 나 자신도 반성을 하기 위해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누가 “영화광이세요?”라고 묻는다면 “후훗 저는 20년째 영화광입니다"라고 말할 자신은 당신에게도 없을 것이다. 2010년대 한국에서 영화광이라는 단어는 무언가 ‘희귀한 아싸'에 가까워졌다. 그들은 대개 아트시네마와 영상자료원에서 매주 모이지만 절대 서로를 아는 척하지 않는 종족이다. 모 평론가의 두 시간이 넘는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침 삼키는 소리도 내지 않고 참가하는 종족이다. 많은 영화 게시판이 멸종한 지금 그들은 대게 왓챠에 모여 서로의 별점을 가지고 맹렬하게 대결을 벌이는 모습을 종종 바깥 세계에 들키곤 한다. 그러니 이것은 30년을 넘게 영화광으로 살아온 영화광의 인류학적 농담으로 간주해주시길 바란다. 


   90년대의 영화광들은 모두 영퀴방에 모였다. PC 통신이 생겨나자 가장 크게 치솟아 오른 커뮤니티는 영화 동호회인 ‘시네마천국’이었다. 80년대를 거치며 스스로를 영화광으로 자각한 나에게 시네마천국은 정말이지 굉장한 장소였다. 전국 방방곡곡의 영화광들이 모조리 그곳으로 모였다. 모두가 영화 리뷰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중 읽을 만한 것은 10% 정도였다. 내가 사랑하는 SF 작가 씨어도어 스터전은 “SF의 90%는 쓰레기다. 그러나 어떤 분야든 90%는 쓰레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법칙은 영화 리뷰에도 당연히 아름답게 적용된다. 나도 시네마천국에 영화 리뷰를 매주 올렸다. 그중 90%는 쓰레기였을 것이다. 다행히 PC 통신은 사라졌고 그 시절에 내가 쓴 리뷰들도 광대한 네트의 세계 속으로 사라졌다. 누구도 그걸 찾아보지 못하게 된 것은 정말이지 축복에 가깝다. 


   시네마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채팅방은 영퀴방이었다. 영화퀴즈방이었다. 게임의 방식은 간단했다. 해당 영화와 관련된 단어를 하나씩 이야기하면 빠르게 어떤 영화인지 맞히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1. 시계’ ‘2. 옥수수밭’이라고 쓰는 순간 당신은 ‘인터스텔라!’라고 가장 외치면 된다. 너무 쉬운 예를 들었지만 어쨌든 방식은 그러하다. 하여간 팔도 영화광들은 부모님이 전화를 사용하지 않는 밤 12시쯤 되면 PC 통신 특유의 ‘삐비비비비비’ 하는 접속 소리를 감추기 위해 컴퓨터에 이불을 뒤집어씌우고 시네마천국으로 들어왔다. 영퀴방에는 지금도 이름을 거론하면 누구나 알만한 영화인들, 영화광들, 영화평론가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누가 더 난이도가 높은 문제를 내고, 누가 더 난이도가 높은 문제를 푸느냐에 따라서 보이지 않는 등급이 나누어졌다. 당시 가장 난이도 있는 문제를 내던 사람은 지금도 정체를 숨긴 채 영화평론가 및 특급 트위터리안으로 활동하는 DJUNA(듀나)였다. 나는 아직도 그가 발전한 테크놀로지를 가진 미래의 누군가가 보낸 인류 최초의 AI라고 믿는다. 


   종종 게시판에는 ‘베스트 리스트’가 올라왔다. 연말에 많이 올라왔다. 시기에 관계없이 ‘올 타임 베스트’를 올리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영화광들의 베스트 리스트는 꽤 재미있다. 기본적으로 모두가 상찬하는 역사적 걸작들과 개인적 리스트가 뒤엉켜 있다. 그 시절 나의 베스트는 언제나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였다. 사실 대학 영화동아리 면접을 볼 때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입니다”라고 말했다. 면접위원이던 선배는 아주 감탄한 표정으로 “캬. 그 영화를 봤어?”라고 했다. 나는 그 순간이 아주 자랑스러웠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그리 알려진 영화가 아니었다. 나는 진정한 영화광으로 평가받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스탠리 큐브릭을 알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졸지 않고 끝까지 본 드문 인재로서 동아리의 핵심 멤버가 될 재량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건 진심이었던가? 솔직하게 말하자. 당시 내가 가장 좋아했던 감독은 스티븐 스필버그였다. 70~80년대 유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티브이로 종종 방영하던 <죠스>(1975)와 <미지와의 조우>(1977)는 유년기 영화광들이 처음으로 마주한 할리우드 영화들이었다.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80년대 한국에서도 개봉을 했다. 당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개념을 창조해낸 그 시리즈는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의 쾌감을 완벽하게 변방의 소년소녀들에게 전달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사단’이라고 불리는 감독들의 영화도 있었다. 스필버그 제작하에 만들어진 그 영화들의 제목을 줄줄이 읊는 순간 지금 40대 독자들은 무릎을 치고야 말 것이다. 조 단테의 <그렘린>(1984)과 <이너 스페이스>(1987), 리처드 도너의 <구니스>(1985), 로버트 제메키스의 <백 투 더 퓨쳐>(1985), 베리 래빈슨의 <피라미드의 공포>(1985). 그렇다. 축하한다. 이 리스트에 잠시라도 흥분을 느꼈다면 당신은 정말이지 아름답게 ‘중년의 위기’를 느끼며 빨간 스포츠카라도 사야 하나 고민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1993)을 가장 좋아합니다!”라고 동아리 면접에서 말하지 않았을까. 왜 나는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좋아합니다”라고 말했던 것일까. 이유는 뻔하다. 영화광의 자의식을 가진 나에게 스티븐 스필버그는 너무 흔한 이름이었다. 할리우드 상업 영화의 상징이었다. 당대 스티븐 스필버그는 한국에서 매우 저평가받았다. 많은 초기 한국 비평가들은 스필버그의 영화들이 “너무나도 미국적인 가족주의에 봉사하는 전형적인 킬링타임 할리우드 오락영화”라고 평가했다. 하이텔 시네마천국의 영화광들 사이에서도 스필버그의 이름은 모두가 마음으로는 품고 있지만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볼드모트 같은 것이었다. 1993년 <쉰들러 리스트>가 개봉한 이후 조금씩 그에 대한 평가가 변하고는 있었지만 혁명적인 변화는 없었다. 게다가 솔직히 지금 와서 생각해보자면 그해 스필버그의 최고작은 <쉰들러 리스트>가 아니라 <쥬라기 공원>이었다. <쥬라기 공원>은 할리우드의 자본과 기술력이 현대의 히치콕을 만나서 아름답게 폭발한 마법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 영화에서 브라키오사우르스가 처음 등장하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장면은 영화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순간 중 하나로 꼭 역사책에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시네마천국과 동아리방의 우리는 스필버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는 스탠리 큐브릭을 말했다. 장 뤽 고다르와 프랑수아 트뤼포를 말했다. 구로사와 아키라와 오즈 야스지로를 말했다. 페데리코 펠리니와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말했다. 당시 나의 올 타임 베스트는 갓 보기 시작한 온갖 ‘공인된’ 걸작들로 가득했다.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1941)을 넣었다가 조금 더 영화광적 자의식이 깊어진 이후에는 “훗, 오손 웰스는 사실 <시민 케인>보다는 이거지”라고 삐딱하게 말하며 <악의 손길>(1958)을 넣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을 보기 시작하자 리스트는 곧 이탈리안 시네마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물론이다. 여전히 나의 올 타임 베스트에는 이탈리아 감독들의 영화로 가득하다. 안토니오니의 <태양은 외로워>(1962)와 루치노 비스콘티의 <레오파드>(1963)를 그 리스트에서 뺄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당시의 내 솔직한 리스트에는 분명히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이 들어가야 했다. 나는 그게 부끄러웠다. 아니, 생각해보자면 나의 지금 올 타임 베스트 1위는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인데 심지어 그 시절에는 데이비드 린의 영화를 넣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어린 영화광인 나에게 할리우드의 대작이라는 것은 결코 베스트 리스트에 넣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나는 종종 소셜미디어나 인터넷 게시판에 영화광들이 올리는 리스트들을 보며 그 시절의 나를 다시 떠올린다. 그 리스트들은 정말 마음 깊이 좋아하는 영화들이라기보다는 ‘남들이 보면 누구나 납득할 만한 걸작들과 ‘와 이런 영화를?’이라는 반응을 끌어낼 만한 약간 독특한 선택을 섞어서 공인된 영화광적 자의식을 내보이면서도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영화들’로 채워진다. 아니다. 나는 지금 그런 리스트를 두고 게시판에서 뽐내고 있는 당신을 비난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옳다. 나도 그런 방식으로 리스트를 만든다. 누구나 그런 방식으로 리스트를 만든다. 여전히 영화광들의 맹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프랑스 작가주의 영화잡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베스트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들이 2011년 베스트 10 리스트 8위에 J. J. 에이브람스의 <슈퍼 에이트>를 넣었을 때 깔깔깔 웃었다. 그건 분명히 ‘우린 초큼 다른 독창적인 선택을 보여주겠다’는 선언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익스큐제무아! <카이에 뒤 시네마> 필진 여러분. 당신들은 분명히 지금쯤 저 선택을 부끄러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긴데, 나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범작인 <미션 투 마스>(2000)가 <카이에 뒤 시네마> 베스트 리스트에 오른 뒤에야 갑자기 한국 비평가들이 이 영화를 재평가하기 시작한 것에 약간의 의문을 여전히 갖고 있다. 물론 나에게도 브라이언 드 팔마는 지금 현재 가장 사랑하는 감독 중 한 명이지만. <미션 투 마스>요? 여러분?


   나는 이 글을 쓰고 나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역사적인 후기 걸작 <레디 플레이어 원>(2018)을 다시 볼 생각이다. 8~90년대 유년기를 보낸 영화광들에 보내는 이 거침없는 헌사는 다시 볼 때마다 나의 영화광으로서의 코어를 뒤흔들어 눈물을 쏙 빼낸다. 나는 동아리 면접에서 스필버그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하이텔 시네마천국에 스필버그의 영화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영화잡지 면접을 볼 때도 스필버그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그 선택들을 후회하냐고? 그렇지는 않다. 원래 청년기의 자식들이란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내놓기를 꺼리게 마련이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은 20년 뒤에야 좋아하는 감독으로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이름을 말하기를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때 다시 이 글을 읽어 달라. 이 책이 그때까지 생명을 갖고 존재한다면 말이다. 




   <계속>



   김도훈   

   前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前 「GEEK」 피처디렉터 

   前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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