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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비건조 Dec 02. 2021

<23화> CG 지옥에 빠진 영화들

김도훈 영화칼럼니스트




   나는 CG를 믿지 않는다. 아직은.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직감한 것은 1993년이었다. 브라키오사우르스가 두 발로 포효하는 순간, 나는 영화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은 할리우드의 새로운 발명품인 CG가 아날로그 특수효과의 시대를 역사 속 유물로 만들 거라는 예언과도 같았다. 그리고 30여 년이 흘렀다. CG는 영화를 진화시켰나?


   새로운 <스타워즈> 에피소드 1, 2, 3을 내놓으며 조지 루카스는 말했다. “영화적 경험에 있어서 우리는 다른 시대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석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서둘러 그림을 완성해야 했던 15세기 프레스코화의 시대는, 예술가에게 더 많은 시간과 통제력을 부여한 유화의 시대가 오자 사라졌습니다.” 프레스코화의 시대가 한순간에 사라졌듯이 고전적인 아날로그 특수효과의 시대는 거의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러나 조지 루카스의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의 감흥이 오리지널 시리즈보다 더 발전했던가? 그럴 리가. 


   <스타워즈 에피소드2: 클론의 습격>을 예로 들어보자. 조지 루카스는 CG로 요다를 새롭게 만들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5: 제국의 역습>에서 인형술의 대가 프랭크 오즈가 창조해낸 요다는 무시무시한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니 루카스가 CG 요다의 창조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거다. 그러나 광선검을 쥐고 박카스를 들이킨 개구리처럼 뛰어다니는 CG 요다는 오리지널의 아우라를 무너뜨릴 만큼 경박했다. 발전된 인형술로도 근사한 요다를 창조할 수 있다면 대체 왜 굳이 CG로 요다를 만들어야 했던 걸까. 다시 한번 질문해보자. 과연 CG가 영화예술가의 창조력에 날개만 달아주는 만능 도구일까. 오히려 손쉬운 CG 만능주의가 영화를 창조적 퇴화로 몰아가는 건 아닐까. 


   90년대 초반 CG가 본격적으로 블록버스터에 활용되기 시작했을 땐 우리 모두 무한한 가능성을 떠올렸다. 물론 CG는 <쥬라기 공원>의 공룡이나 <반지의 제왕>의 크리처들, <터미네이터 2>의 액체 금속 로봇 등 기념비적인 창조물들을 빚어냈다. 하지만 지나친 CG 과용은 오히려 블록버스터(그리고 영화)의 발목을 잡았다. 우리는 단순히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아날로그 특수효과로도 충분한 부분들을 CG로 덮어버리고 있다. CG 맹신으로 자신의 영화를 망가뜨린 대표적인 예술가가 새로운 <스타워즈> 시리즈의 조지 루카스라는 건 재미있는 사례 아닌가. 


   숙련된 조교들마저 CG의 함정에 빠지고 있다. 지금 할리우드에서 조지 루카스의 반대말을 찾으라면 그건 바로 크리스토퍼 놀런이다. 크리스토퍼 놀런은 아날로그 특수효과를 고집하기로 유명하다. 당신이 놀런의 영화에서 본 대부분의 놀라운 스펙터클은 CG가 아니라 진짜, 혹은 아주 약간 CG의 도움을 받은 물리적 스펙터클이다. <다크 나이트>에서 트럭이 통째로 엎어지는 장면은 실제로 트럭을 엎은 것이다. 배트맨이 타고 다니는 배트포드 역시 실제로 주행이 가능한 오토바이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하늘을 나는 배트윙은 물론 CG의 도움으로 고담시 상공을 날아다니지만, 도로 추격 장면에서는 기체를 매단 크레인 차가 거리를 질주하면서 촬영했다. CG로는 와이어와 차량만 슬쩍 지워낸 것이다. 대부분의 블록버스터들이 아예 모든 것을 CG로 창조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사례는 끝이 없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시작 부분에서 C-130 허큘리스 수송기가 프로펠러기를 공중 납치하는 장면 역시 스턴트맨을 활용해 정말로 찍어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장면들은 모형을 이용해서 촬영했다. <인셉션>에서 당신이 가장 놀라워했을 몇몇 장면도 아날로그로 찍었다. 360도 돌아가는 호텔 복도에서의 액션 장면은 아예 기다란 복도를 세트로 만들어 진짜로 돌렸다. 파리 카페에 앉아있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변으로 물건들이 터져나가는 장면 역시 압축 공기를 이용해 실제로 물건들을 터드리며 찍었다. 


   <인터스텔라>도 다르지 않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거대한 옥수수밭을 영화적 무대로 만들기 위해 정말로 수만 평의 대지를 사서 지난 3년간 옥수수를 길렀다. 영화 속의 황사 먼지 역시 인체에 해가 없는 골판지로 만든 인공 먼지를 강풍기를 이용해서 정말로 쏟아내며 찍은 것이다. 그럴 필요가 뭐가 있냐고? 옥수수밭 따위야 CG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데 지나치게 시대착오적이라고? 크리스토퍼 놀런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다. 자본과 시간이 허락되어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것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더 실제 같기 때문이다. 


   CG는 아직도 완벽하지 않다. 만약 놀런이 <인터스텔라>의 옥수수밭과 황사먼지를 CG로 구현했다면, 그건 현실이라기보다는 ‘하이퍼리얼리즘적인 CG’에 불과했을 것이다. 진짜처럼 보이긴 하지만 역시 완벽하게 진짜는 아니라는 걸 관객들은 눈치챈다. 놀런은 그걸 원하지 않는다. 그는 영화라는 환상을 창조하지만 거기에 최대한의 물리적인 쾌감을 집어넣고 싶어 한다. 그는 <인터스텔라>에서도 행성에 착륙하는 탐사선을 실제 크기로 만들어서 크레인에 매달고 찍었다. 배우들과 탐사선이 함께 카메라에 잡히는 장면이 놀라울 정도로 실제 같은 것도 그 덕분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매튜 매커너히가 5차원 테세락에 갇힌 장면에서도 CG에 완벽하게 기대지는 않았다. 그는 테세락을 아예 세트로 만들었고, 그 속에 매튜 매커너히를 와이어로 매달아 집어넣은 뒤 촬영했다. 이럴 필요가 있냐고? 여기에는 두 가지 효과가 있다. 먼저, 페인팅을 활용한 장면은 완벽하게 CG로 구축한 것보다 미학적으로 더 고전적인 질감을 부여한다. 애초에 놀런이 바랐던 것이 매트 페인팅 시대에 만들어진 고전 SF영화에 바치는 일종의 오마주였다는 걸 생각해보라. 놀런은 또한 이에 대해서 “이 장면을 완전히 CG로 만든다면 관객이 속았다는 기분을 느낄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영화 속 대부분의 장면을 아날로그 특수효과로 창조한 상황에서 테세락 장면을 온전히 CG에 기댄다면 눈썰미가 좋은 관객은 분명히 물리적인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놀런은 그런 역효과의 발생을 막고 영화 전체의 톤과 매너를 하나로 맞추고 싶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효과는 ‘배우의 연기’다. 놀런은 이미 배우의 연기를 보다 현실감 있게 끌어내기 위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보여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는 멍하니 블루스크린을 바라보며 연기한 배우들의 멍한 눈동자를 종종 목도한 바 있다. <인터스텔라>에서 배우들이 보여주는 경이로운 반응은 거의 실제다. 실제하는 것을 보고 연기했기 때문이다. 앤 해서웨이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만약 여러분이 우리가 우주선에 타고 있는 걸 본다면, 우리는 정말로 우주선에 타고 있는 겁니다. 캐릭터들이 우주선 창밖으로 우주를 보고 있다면, 배우들은 실제로 세트 바깥의 스크린에 실제로 우주가 투사되고 있는 걸 보고 있는 겁니다. 저는 배우들에게 그런 방식으로까지 영감을 주는 감독을 놀런 외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 크리스토퍼 놀런의 영화에서 배우들이 보는 것은 정말로 ‘거기’에 있다. 놀런의 영화에서 당신이 보는 것은 정말로 ‘거기’에 있다. 모든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것이 ‘거기’에 있다. 작고한 미국 영화평론가 로저 애버트는 CG를 과신하고 남용하는 감독과 제작자들에게 네 가지 조언을 던진 바 있다. “첫째, CG는 뭘 새롭게 창조하는 것보다는 뭘 지우는 데 더 적합하다. 둘째, 할리우드의 수많은 감독들은 그저 CG에 도취되고 만다. 그들은 CG로 자신의 비전을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보다는 CG가 뭘 할 수 있는가에만 신경을 쓴다. 셋째. 나쁜 CG 장면들은, 그것만 빼면 제법 좋은 영화조차 완전히 망가뜨린다. 넷째. CG 기술은 같은 효과를 두 번 이상 쓰면 안 된다는 기본적인 법칙으로부터 감독들을 면제해줄 만큼 아직 충분히 좋지는 못하다.”


   이 조언을 가장 잘 실천하는 것이 크리스토퍼 놀런이다. 그는 뭘 새롭게 창조하기보다는 실제 모형과 세트를 이용해서 촬영한 뒤 불필요한 부분을 지우는 데 CG를 가장 잘 활용한다. 그리고 그는 CG가 뭘 할 수 있는가에 신경 쓰는 게 아니라 만들고 싶은 그림을 최대한 아날로그로 완성한 다음 CG를 보조로만 활용한다. 놀런은 CG 기술이 아직 충분히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물리적인 특수효과에 천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는 <테넷>에서도 보잉 747을 직접 건물에 충돌시켰다. 오랫동안 놀런과 작업해온 특수효과 감독 스콧 피셔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놀란의 영화에서 특수효과의 본질은 촬영 전에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는 항상 가능한 모든 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놀런과의 작업은 창의성을 한계까지 밀어내는 과정이다.” CG를 덕지덕지 바른 많은 지금의 블록버스터들은 2, 30년 후 조금 웃겨 보일 테지만, 놀런의 영화는 시간이 흘러도 우아함을 지켜낼 가능성이 크다. 


   물론이다. CG는 영화를 진화시켰다. 발전한 CG 없이는 ‘마블 유니버스’를 구현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임스 카메론도 CG 없이 판도라 행성을 창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CG는 많은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모든 감독이 크리스토퍼 놀런은 아니다. 모든 감독이 제임스 카메론은 아니다. CG를 잘 사용하는 감독들은 CG를 맹신하지 않는다. 혹은 CG로 해낼 수 있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훌륭하게 구분할 줄 안다. 나는 지금 그걸 가장 못해낸 영화로 21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프랜차이즈를 예로 들 생각이다. 바로 <패스트 앤 퓨리어스> 시리즈다. 초창기 이 시리즈는 진짜 자동차들을 물리적으로 파괴하는 쾌감으로 넘쳐났다. 편집의 마술로 이루어진 카체이스 장면들은 정말이지 근사했다. 하지만 이 시리즈의 최근작들은 CG의 지옥이나 다름없다. 빈 디젤을 비롯한 배우들은 마치 슈퍼히어로처럼 중력과 물리학의 법칙을 완전히 벗어던진다. 더는 이 시리즈에서 전통적인 카체이스 장면의 물리적 쾌감을 느끼는 건 불가능하다. 이걸 블록버스터의 진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조지 루카스의 말은 맞다. 유화의 시대가 오면서 프레스코화의 시대는 저물었다. 그러나 특수효과의 시대는 아직 유화에서 프레스코화로 완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언젠가 CG 기술이 지금보다 진화하는 날이 온다면 크리스토퍼 놀런 역시 아날로그 특수효과를 포기하고 CG의 세계로 완벽하게 귀의할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영화는 이제야 아날로그의 시대에서 CG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아직 CG를 온전히 믿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나는 믿지 않는다. 이게 아날로그 특수효과 시대에 성장한 꼰대의 불신지옥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셔도 좋다. 하지만 <그렘린>이 온전히 CG로 리메이크되는 날 나는 다시 한번 CG가 얼마나 믿음직스럽지 않은 기술인지에 대해서 소셜미디어에서 떠들고 있을 것이다. 




   <계속>



   김도훈 영화칼럼니스트


   前 「허핑턴포스트코리아」 편집장  

   前 「GEEK」 피처디렉터 

   前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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