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황사
항상 깊이 있는 주제로 주인공을 혹독하게 몰아붙였던 이창동 감독.
그가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성장기 영화를 찍었다.
그 영화는
<버닝>
개봉 당시 서로 다른 해석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했던 영화.
요즘 내 기분으로 이 영화는 그야말로 완벽한 성장기 영화.
오늘은 어디까지나 요즘 내 기분으로 이 영화를 바라보며 얘기해보겠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영화 <버닝>을 액면 그대로 얘기하자면
주인공 종수가 해미를 죽인 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
하지만 이 영화를 액면 그대로 보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어 보인다.
적어도 연출 방향은 그렇게 직선으로 그어지지 않았다. 일흔을 바라보지만 감각만은 젊게 곧추 세운 이창동 감독의 연출은 해석의 여지가 상당하다.
다시 보면 남산타워에 반사되어 햇빛이 들어오는 해미의 방이 종수의 자취방이고, 결국 그 자취방에서 문창과를 나온 작가 지망생이 꾸며낸 이야기일 거라 추정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런 의미로 <버닝>은 오로지 종수의 영화다.
오로지 종수의 영화인 이유는 이러하다.
종수에게 잠깐씩 등장하는 부모님을 제외하면 해미와 벤이 종수를 가늠하게 한다.
그중 덜 중요한 해미부터 설명하자면 이렇다.
노을과 함께 사라진 해미는 다름 아닌 종수의 성욕.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종수가 하는 딸딸이의 본질이다.
종수의 성욕이 분한 해미는 종수에게 말한다.
그저 먹는 배고픈 자가 되지 말고 ’그레이트헝거‘가 되라고. 즉 그저 싸버리는 성욕에 몰두하는 인간이 되지 말고, 우리가 왜 사는지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하는 ’그레이트 헝거‘가 되라는 말이다.
’성욕(해미)‘이 이런 말을 성욕의 주체자, 종수에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언제든 나타나서 종수의 성기를 문질러 싸게 해 준다. 종수가 벤을 죽이기 바로 전씬이 바로 사라진 해미가 나타나 종수에게 자위를 해주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해미는 종수의 성욕이 만들어낸 부산물. 못생겼지만 예뻐졌고, 있지만 없고, 사라졌지만 죽지 않는 그 무엇. 욕망의 다름 아니다.
이제 정말 중요한 벤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사실 영화 <버닝>은 모든 것을 벤이 갖고 있고, 벤이 말하고 있다.
(그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약점이다. 하지만 이 약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벤은 흔히 지칭하는 안타고니스트가 아니다.
벤은 더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벤이 곧 종수고 종수가 곧 벤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주장은 내가 처음은 아닐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 하는 얘기는 누군가의 생각을 듣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 그저 오늘 기분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 같은 흔적은 연출자의 연출에서도 드러난다. 종수가 바라는 이상향의 종수가 바로 벤이다. 이 같은 워너비 인물을 종수가 명확하게 지칭했다.
게츠비. 벤은 게츠비고 종수는 게츠비가 되고 싶은 거다.
수없이 많은 예가 있다.
엄마가 집 나간 종수와는 달리 벤은 좋은 DNA를 준 엄마와 – 첫 등장에 그가 한 첫대사가 바로 좋은 DNA를 물려받았다는 대사다. - 친구 이상으로 살갑게 통화한다.
무엇보다 벤의 포르셰는 종수가 가닿고 싶은 가장 대표적 유물(唯物)이다.
시각을 종수에서 벤의 시점으로 돌려서 바라보면,
벤은 항상 종수를 궁금해한다. 윌리엄 포크너를 좋아한다는 종수의 말대로 벤은 카페에서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집을 읽고 있다. 곧 종수의 모습이다.
또한 벤은 종수를 만나면 늘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느냐?‘ 묻는다. 하지만 종수는 끝끝내 대답하지 못하다가 결국 한다는 답변이, ‘세상은 수수께끼’ 같다는 대답을 내놓는다.
그렇게 종수는 계속해서 내면의 자신(벤)과 대화를 하는 거다.
거기에 내면의 자신인 벤이 힌트를 준다. 자신(벤)의 이야기를 쓰라고. 곧 종수 자신의 이야기를 쓰라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영어 ben의 뜻이 ‘집의 내부’라는 것도 종수의 내면이 ’벤‘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분히 어떤 소설을 쓰냐는 질문만이 종수와 종수 내면, 벤의 대화는 아니다.
더 구체적인 대화가 이것인데, 그 첫 번째는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는 벤의 고백을 듣는 종수. 이 장면은 언듯 보면 고생 없이 자란 벤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종수가 지향하는 어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어른이 되면 모든 모호함을 견디며 더 이상 울 일이 없어지리라.... 비현실적으로 쿨한 이미지인 것이다.
다음 만남에서 벤은 종수에게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곧 불태우라는 것.
무엇을?
벤은 자신이 비닐하우스를 불태운다고 말한다. 종수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종수는 그것이 해미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해미가 아니었다. 영화에서는 해미가 나타나 종수의 자위를 해주는 것으로 그 답을 보여준다.
이쯤 되면 불태워야 될 대상이 정해졌다.
그래, 누구를?
누구를 불태워야 하는가?
불태워 흔적조차 없애야 할 대상은,
종수 자신이 가닿고자 하는 지향점의 종수, 벤을 태워야 하는 것이다.
종수가 가닿고자 하는 지금의 종수, 곧 벤은 허울뿐인 종수, 허세의 종수, 보여 지기 식 종수이다. 그것을 재미만 찾고 모든 일에 금방 질리는 – 하품하는 벤으로 표현된다.
결국 종수는 자신을 죽여야 된다.
여기서 태워야 할 대상이 벤이다.
하나 부족할 것이 없어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벤. 그것은 그저 욕망, 허세, 허울.
이 모든 것을 불태우고, 어찌 보면 찌질한 종수로 남는 것이 진짜 성숙한 어른이 되는 길이라는 메타포.
영화 속에서는 이미지 커트처럼 한 장면이 삽입된다.
불타는 비닐하우스 앞에 마치 그 속으로 들어가려는 듯 서 있는 아이 종수, 빨가벗은 아이 종수. 그렇다. 이 아이 종수는 종수가 성장함에 불타 죽을 것이다.
이 이미지 커트가 영화 엔딩에 실현된다.
엔딩에서 자신(벤)을 죽이기에 앞서 종수가 한 행동이 하나 있다.
바로 집에서 키우는 송아지를 팔아버리는 것이다. 종수가 영화 시작과 함께 처음 한 행동이 송아지 여물을 줬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웠던 송아지를 팔아버린다? 그것은 곧 지금까지 지내왔던 집과의 이별이다. 젖을 떼고 빨가벗고 있는 아이 종수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급기야
종수는 벤을 죽이고 포르셰와 함께 태워버린다.
종수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도 다 태워버린다. 이미지 커트에서 빨가벗은 아이처럼 다 벗어버린다.
그렇게 자신을 죽이고 태운 종수는 현장을 떠난다.
그러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앞서 <버닝>이 오로지 종수의 영화라고 말했던 이유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등장인물인 해미나 벤이 모두 종수 안의 종수였으니 말이다.
종수가 내면의 헛된 자신을 죽이고 성장하는 영화라는 이야기다.
이것은 실로 아름다운 해피엔딩.
완벽한 성장기 영화다.
오늘 내 기분은 <버닝>을 이렇게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