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냐? 배포를 좀 키워라, 응? 세상 모든 좋은 게 다 내 거. 응? 왜 내게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데? 세상 제일 좋은 남자도 내 거. 어? 세상의 모든 돈도 다 내 거.
미정
시끄러워.
기정
나중에 나 돈 좀 꿔주라. 아, 뭘 꿔줘? 그냥 줘.
이 장면은 미정이 현실 캐릭터가 아닌 걸 보여줍니다.
미정이 말하는 ‘추앙’에 좋은 차 같은 건 없나 봅니다.
그보다는 미정을 거슬리게 하는 건 직장 내 빌런입니다.
최준호
(미정의 바지를 보며) 그런 바지는 어디서 사? 아, 언제 샀냐고 물어봐야 되나?
아, 그 바지 끝단이 무거운 여자 간만이라. 그 보기에도 답답하지 않아?
답답.. 아유. 패션이나 디자인이나 다 디테일인데, 디테일.
이 빌런과 퇴근길 엘리베이터에 함께 타게 되는데요,
최준호
해방클럽은 뭐하는 데야? 뭐에서 해방되는 건데? 일?
미정
인간한테서요, 지겨운 인간들한테서요.
미정은 구씨와 한잔해요.
미정
개새끼. 촌스러운 게 무슨 상종 못 할 불가촉천민을 상대하는 것처럼. 내가 싫어하는 새끼 나 싫어하는 거 당연하지. 내가 훨씬 더 싫어할걸. 나는 그 새끼 경멸해. 조직에 있을 때나 있어 보이지 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인간. 회사에서 인원 감축하려고 희망퇴직자를 받는데 있어 줬으면 하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먼저 나갔어. 여기저기 오라는데 많으니까. 나가 줬으면 하는 사람은 안 나가 갈 데가 없으니까. 그렇게 남은 인간이 그 인간이야.
구씨
원래 약한 인간일수록 사악해. 그래서 사악한 놈들이 좀 어, 짠한 면이 있어. 초대 한번 해. 어? 한번 불러. 들에 풀어놓고 종일 잡자. 니가 이겨.
미정
당연히 이기지. (술 한 모금) 화내서 한 번도 기분이 나아진 적이 없어.
화를 안 내고 넘어가면 이삼일이면 가라앉을 거 화내고 나면 열흘은 넘게 가.
구씨가 끓여온 라면을 먹는 미정입니다.
미정에게 가장 맛있는 라면은 구씨라면이에요.
구씨
저녁이 되면 이쪽에서 바람이 들어와. 밤이면 풍향이 바뀌는 집도 달이 보이는 집도 여기가 처음. 창문에 달 뜨는 집은 동화책에나 있는 줄 알았지.
달빛이 좀 뭔가 이상했어.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가로등이 나갔더라고. 가로등 고치고 나니까 그 맛이 안 나.
가로등 아래 서 있는 미정과 구씨가 가로등 아래 서 있는데,
구씨가 돌을 집어 단번에 가로등을 깨버립니다.
이제 달빛이 맛이 나는 거 같네요.
미정
인간은 쓸쓸할 때가 제일 제정신 같애. 그래서 밤이 더 제정신 같애.
미정과 구씨는 가로등 하나 깬 것으로는 성에 안 차는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갑니다.
미정
어려서 교회 다닐 때 기도 제목 적어내는 게 있었는데 애들이 쓴 거 보고 이런 걸 왜 기도하지? 성적, 원하는 학교, 교우관계 고작 이런 걸 기도한다고? 신한테? 신인데? 난 궁금한 건 하나밖에 없었어. 나 뭐에요? 나 여기 왜 있어요? 91년 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50년 후면 존재하지 않을 건데 이전에도 존재했고 이후에도 존재할 것 같은 느낌 내가 영원할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에 시달리면서도 마음이 어디 한 군데도, 한 번도 안착한 적이 없어. 이불 속에서도 불안하고 사람들 속에서도 불안하고. 난 왜 딴 애들처럼 해맑게 웃지 못할까? 난 왜 늘 슬플까? 왜 늘 가슴이 뛸까? 왜 다 재미없을까? 인간은 다 허수아비 같애.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어떻게 보면 건강하게 잘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질문을 잠재워 두기로 합의한 사람들일 수도 인생은 이런 거야, 라고. 어떤 거짓말에 합의한 사람들. 난 합의 안 해. 죽어서 가는 천국 따위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 볼 거야.
언덕 위에 어둠 속에 올라가 가로등 불빛을 내려다보는 미정과 구씨가 키스합니다.
그러고 보니 ‘미정’의 이름이 괜히 ‘미정’이 아닌 겁니다.
구씨는 아예 이름을 모르고 이름이 미정인 미정이 어둠 위에서 키스합니다.
‘미정’이 진짜 ‘미정’이 되는 순간입니다.
둘이 키스하는 이 어둠 위가 곧 천국입니다.
미정의 직장 빌런은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네요.
보람
언니 정말 이렇게 고칠 거예요?
저 인간이 지시한 것보다 언니가 한 게 백배 나아요. 저 인간은 그냥 팬시해. 인간 자체가 팬시해. 언니는 훨씬 기품이 있어요. 언니 디자인한 건 항상 가만히 보고 있게 만들어요. 그래서 내가 맨날 언니 거 보면서 질투하는데 하, 진짜 이렇게 고칠 거예요?
나 이거 브랜드 실에 그대로 갖다주고 싶어. 저 인간이 일을 얼마나 망치고 있는지. 좀 알려주고 싶어.
미정
(여유) 너 나 추앙하니?
이제 미정은 ‘미정’이지 않아요. 확실해요. 자존감이 확실히 올라왔어요.
하지만 기정은 지금 화가 나 있는 상태에요. 태훈에게 연락을 기다리고 있거든요.
아, 지금 연락이 왔네요.
기정
오늘?
김이사
오늘은 너무 했다. 며칠 미뤄 그렇게 기다리게 했는데.
박진우
여자한테 연락하면서 ‘오늘’은 매너 없는 건데. 일단 튕겨요. 한 방에 오케이 하면 재미없어요. 남자가 제일 애간장 녹을 때가 줄 듯 말 듯, 어? 올 듯 말 듯 그럴 때 그때가 죽음이에요. 릴랙스 하시고 괜찮아요, 미뤄요. 남자는 애타게 해봅시다. 염팀장님. 남자 좀 기다리게 해봐요. 어떻게 맨날 본인만 기다려?
김이사
언제 보기로 했어?
기정
내일요.
김이사
많이도 미뤘다.
박진우
에, 그게 염팀장님 매력이죠, 응.
기정
근데요, 애타는 게 좋은 거예요? 왜 좋아요, 애가 타는데? 익는 것도 아니고 타는데? 마음이 막. 그거 안 좋은 거잖아요. 불편한 거잖아요. 응? 남녀가 사귀는데 뭔가 가득 이렇게 충만하게 채워져야지 줄 듯 말 듯 찔끔찔끔 그게 뭐야? 밥도 그렇게 주면 살인 나요. 근데 왜 애정을 그렇게 얄밉게 줘야 돼요? 아니, 간질간질한 게 뭐가 좋아? 시원하게 박박 긁어 줘야 좋지. 애타고 간질간질하고 그게 다 불쾌 아닌가요? 유쾌가 아니라.
김이사
아니 유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쾌....
박진우
불쾌는 아니죠. 불만족 뭐 불.. 충분은 맞죠.
기정, 곧바로 일어나 급하게 나갑니다. 이를 본 김이사 바로 알아차리고 한마디 합니다.
김이사
오늘이네.
맞아요, 기정은 바로 뛰쳐나간 겁니다.
기정
머리만 밀면 해방될 것 같아요. 제가 머리를 민다는 건 그냥 동물이기로 한 거예요. 이름 없는 동물. 그렇게 살아도 될 거 같아요. 여태 죽기 기를 쓰고 산다고 살았어도 얻어진 것도 없고 왜 그렇게 살았나 몰라요. 그냥 머리 밀면 잘나 보이고 싶은 욕망, 남자에 대한 욕망, 다 한 방에 놔질 것 같아요. 그래서 결심했죠. 올겨울엔 아무나 사랑하든 머리를 밀든 둘 중 하나는 하자. 여기서 결정 보지 못하면 평생 머리칼 건사하면서 시달리다 죽을 거다.
태훈
머리 밀지 마세요.
이때 누나이자 기정의 동창 경선이 들어왔는데 태훈이 가달라고 말합니다. 단호하게.
경선은 둘 관계의 걸림돌 중 하나인데 태훈이 가볍게 걷어내고 다시 말해요.
기정이 잘 알아듣게.
태훈
머리 밀지 마세요. 제가 할게요, 아무나.
기정
예스.
한편,
구씨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일당이 백사장이 보낸 줄 알았지만 신사장이 보낸 거였죠.
신사장은 구씨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구씨는 거절합니다.
구씨는 미정 옆에 있습니다.
구씨
추앙한다.
동화책에나 있을 줄 알았던 달빛이 들어오는 집에 사는 구씨는 동화 속 기사처럼 공주님을 맘껏 추앙하기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