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빗구미 Oct 04. 2019

자신의 삶을 인정받지 못한 그의 이야기

-<조커>(2019)




누구나 자신만의 삶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각자의 삶은 어쩌면 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살아가는 것일 수도 있다.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성장하여 학교 생활을 시작하면 그곳에서 자신만의 무언가로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으려 한다. 그렇게 자신을 이해해주고 사랑받을 누군가를 찾고 삶을 영위해나간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는 구조적으로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가지는 못한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가 세계에 정착해버린 지금 우리는 사회적 불평등, 빈곤, 사회적 증오, 범죄 등 다양한 문제점과 마주하고 있다. 특히나 그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청년들은 성인이 되어 자신의 힘으로 정착을 해나가는데 많은 노력과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사회가 고도화되고, 자본주의가 고착화되어 갈수록 그 체제에서 소외된 사람은 많아진다. 

특히 신체적인 장애가 있거나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회 구조 속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삶을 이어가는 주인공 아서 플렉의 이야기


영화 <조커>의 주인공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은 자신의  감정과 다르게 나오는 웃음을 조절하지 못해 문제를 겪는 일종의 정신 질환 환자다. 그는 어머니 페니 플렉(프란시스 콘로이)과 같이 살면서 광대 분장으로 소규모 가게들의 광고를 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다. 또한 자신의 정신 질환의 치료 차원에서 국가가 지원하는 상담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 전반에 다루어지는 아서의 삶엔 웃음이 없다. 그 자신조차 진심으로 웃지 못하고, 그가 다른 사람을 웃길 수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전혀 웃기지 않은 상황에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린다. 그가 의외의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릴 때 주변의 타인은 공감하지 못하며, 반대로 다른 사람이 모두 웃는 상황에서 그는 웃음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 그저 인위적인 큰 웃음소리만 낼뿐이다. 아서 자신의 꿈이 코미디언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사람에게 웃음을 줄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이 진심으로 웃지도, 다른 사람에게 웃음을 주지도 못하는 외로운 존재다. 


아서라는 캐릭터는 현재 우리들이 겪고 있는 사회의 온갖 병폐들을 모두 겪고 있는 것 같다. 사회 취약계층으로서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에서 위태롭게 걷고 있는 그는 그가 가진 장애 덕분에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 없다. 그나마 하고 있는 일을 잃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 일부로 웃음을 보이기도 하지만 조금 이상해 보이는 그에게는 진심으로 잘해주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영화 내내 아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거나 핍박받는다. 


그가 유일하게 받는 사회적 복지혜택인 상담은 매우 형식적으로 이루어진다. 무표정한 얼굴의 담당자는 그에게 아주 형식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아서에게 희망을 주지 않는다. 담당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무시할 때도 갑자기 찾아오는 웃음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는 힘든 상황에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큰소리로 웃음을 뱉을 수밖에 없다. 사실 상 그가 그 웃음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래서 그는 늘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주변 상황


또한 편모가정에서 자란 아서는 어머니를 아끼지만 어머니에게 조차 그 자신에 대해 인정받지 못한다. 그가 자신의 꿈이 코미디언이라고 말하자 어머니는 이야기한다. 


"아서, 넌 웃기지가 않잖아"


어머니뿐이 아니다. 그의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코미디언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그저 무시한다. 그를 모르는 타인들에게 그는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웃는 미친 사람일 뿐이다. 사람들이 던지는 웃기지가 않다는 그 한 마디는 아서가 가진 자존감을 무너뜨리고 마음 깊은 곳의 분노를 조금씩 쌓이게 만든다. 무엇보다 그에게서 삶을 온전히 이어갈 수 있는 힘을 빼앗아 버린다. 아서는 그 모든 경험을 하면서 정상적으로 살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다.


그가 영화 중반 예의 없는 엘리트 회사원 세 명을 죽인 이후부터 영화는 계급적인 문제도 이야기한다. 광대 살인마로 불리는 그에게 사회 지도층인 토머스 웨인(브래트 컬렌)은 엘리트 세 명을 죽인 악당으로 묘사하며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시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는 중상류층 뿐이다. 오히려 취약 계층들은 그런 발언들에 혐오를 느끼고, 아서의 살인을 의로운 살인 또는 사회적 혁명으로 추켜 세운다. 그런 상황 속에서 고담시는 취약계층을 위한 사회적 상담 서비스를 취소시켜버리고, 그 직격탄은 아서가 맞는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할 공간이 없다.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는 인정받지 못하고 점점 좁은 공간으로 몸을 움츠린다. 


계급적인 문제까지 파고드는 심오한 이야기


이런 아서의 상황은 사회 빈곤계층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남들과 조금 다르거나, 몸이나 정신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환경과 구조는 그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다. 많은 장애인들이 사회적으로 소외되면서 힘겹게 삶을 이어나가고, 그중 몇몇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들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받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 시선이 부정적인 것이든, 긍정적인 것이든 그것이 빈곤계층을 구원하고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 속 아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이 부정적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가 웃음이 터졌을 때, 그가 상대방에게 건네는 작은 메모에는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이 먼저 쓰여있다. 그는 그가 의도하지 않은 그 행위에 대해서 먼저 사과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평생 그렇게 먼저 사과를 하면서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아서의 삶에서 자신은 점점 깊은 구렁텅이로 숨어버리게 된다. 

 


또한 그가 사회 엘리트들과 겪게 되는 일을 통해 이 시대의 청년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들은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어 경제적으로 빈곤하다. 사회는 시스템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려하고,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유능한 엘리트들은 그들을 돕기 위해 다양한 조언을 준다. 미래의 청년들을 위해 조금은 자신의 권력을 놓을 법도 하다. 엘리트들이 조금씩 희생하면 젊은 청년들의 일자리도 만들 수 있고 사회의 유연성이 생긴다. 그런데 엘리트 집단은 그들이 얻은 그 권력이나 권리를 조금도 내려놓을 생각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조언이나 정치적 발언들은 청년들의 분노와 상실감만 더 높일 뿐이다. 이런 엘리트들의 행동은 최근에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는 이른바 '꼰대 문화'를 떠올리게도 한다. 권위적인 위치에 있는 엘리트들이 하는 모든 이야기는 아서와 같은 청년들에게는 그저 꼰대질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한국의 20대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궤를 같이 한다. 사회 지도층, 엘리트들이 자신의 가정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 온갖 편법을 이용해 자신의 가족과 자녀, 그 자신을 위해서 삶을 영위해 가는 모습이 드러났을 때, 아직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고 그다음 단계로 올라가기도 어려운 상황인 20대 청년들이 겪는 상실감은 영화 속 아서가 겪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 쌓아온 그 분노는 아직 터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아서가 조커가 되면서 터뜨린 분노의 행위처럼 폭발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꼰대질이 만들어낸 악마, 조커


엘리트 계층은 그저 화려한 수식어와 미사여구로 약한 이들을 설득하려 할 것이다. 그들이 잘못한 게 없는 것이라 느끼게 하고, 그렇기에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사회의 시스템을 바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영화 <조커> 속 아서에게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아서가 그의 우상인 코미디언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니로)을 만났을 때, 그 우상은 아서의 행위에 대해 최대한 설득하려고 한다. 그 설득의 방식은 사회 엘리트들의 방식과 동일하다. 아서가 영화 내내, 그의 삶 평생 동안 설득당했던 그 논리에 저항한 그 순간, 그는 조커가 되었다. 


어쩌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고 도움의 말을 하는 방식이 잘못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가 많은 사람들은 점점 더 큰 어둠의 골짜기로 빠져버린다. 각자가 가진 가식의 틈이 더욱 커지고 진정으로 각자의 옆에 있는 사람을 챙기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 정신 장애가 있다면 더욱더 그 사람은 멀리하려 할 것이다. 꼭 장애가 있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다. 사소한 상대방의 말에 속상해하고 상처 받는다. 때론 그것이 분노로 이어질 때도 있다. 어쩌면 이것은 사회 전반적인 구조와 맞물려 쉽게 변화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처럼 큰 분노로 만들지 않으려면 우리 각자가 서로 상대방을 살피고 배려해야 한다. 무엇보다 사회적 대립이 더욱 극심해진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더 그런 것이 필요하다.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영화 속 조커가 되는 것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아서는 그 자신의 삶을 코미디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삶은 전혀 웃기지 않는다. 그는 그의 삶 전체에서 오로지 부정당하고 비웃음을 당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가 광대 노릇을 하는 것을 멀치감치 볼 때, 특히 그가 분장을 하고 춤을 추기 시작할 때, 그의 삶이 오롯이 드러난다. 그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영화 전반에는 그의 삶이 비극이지만, 비로소 그가 그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며 춤을 출 때 그의 삶은 희극이 된다. 반대로 아서를 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서 영화 전반의 아서의 삶은 웃기는 희극으로 받아들여지지만, 그가 자신을 드러낸 이후에는 비극으로 보인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보고 난 이후에도 아서의 삶을 희극으로 바라봐야 할지, 비극으로 바라봐야 할지 선뜻 판단하기 어렵다.  


영화의 기승전결을 모두 책임진 배우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


영화 <조커>는 호아킨 피닉스의 영화다. 그는 영화 내내 이상한 웃음소리를 던지면서 때론 눈물을 보이고 괴로워한다. 같은 웃음소리지만 그의 눈과 미간에 지어지는 연기는 모두 다르다. 관객들은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가 짓는 눈과 미간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게 된다. 아서라는 캐릭터가 결코 행복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깊은 어둠의 캐릭터는 영화 내내 관객의 오감을 끌어당긴다. 일반적인 오락영화적 요소가 없지만, 이 영화에는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가 있다. 그의 연기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이자 액션이다. 관객들에게 그가 하는 최고의 연기를 감탄하며 볼 기회가 생겼다. 


 






매거진의 이전글 절박함으로 가족을 복제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