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빗구미 입니다!
아침마다 같은 길을 걷는다 보면, 익숙한 풍경 속에서도 어떤 날은 공기가 조금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사람들 사이에 미세한 긴장이나 거리감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 그 작은 틈이 왜 생기는지, 저는 종종 걸음을 멈추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볼 때, 과연 그 사람 자체를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미 마음속에 만들어둔 틀로 읽어버리는 건지—그 질문이 늘 마음 한쪽에 남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 질문이 더욱 또렷해집니다.
<주토피아2>에서 주디가 먼저 맡아내던 불합리의 냄새,
<헬프>에서 이름조차 존중받지 못한 이들의 따뜻한 손길,
<겟 아웃>에서 친절한 얼굴 뒤에 숨겨진 공기의 차가움.
세 영화는 서로 다른 장면을 보여주지만, 결국 같은 마음의 움직임을 건드립니다.
다름을 불편해하는 사회,
침묵 속에 스며든 차별,
그리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밀려나는 누군가의 자리.
그렇다면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우리는 정말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보고 싶은 방식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걸까요?
이 글들은 그 질문에 선명한 답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함께 잠시 멈춰 생각해보자는 마음이 더 담겨있습니다.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정직하게 타인을 바라보기 위해서요.
2025년 12월 첫번째
-<주토피아2>, <헬프>, <겟아웃>
다름의 냄새를 먼저 맡는 존재들에 대하여 - <주토피아2>
몇 개월 전, 강아지 산책을 시키다가 골목에서 길고양이들에게 공격을 당했다. 왜 그때 나는 고양이가 무섭고 미웠을까. 왜 어떤 존재에게는 본능적으로 마음이 열리고, 또 다른 존재에게는 알 수 없이 닫히는 걸까. 강아지와 다른 고양이라는 존재를 크게 좋아해본 적이 없다. 특히나 그 일을 당하고 나서는 고양이가 더 미워졌다. 하지만 다시 그 길고양이들을 만났을 때, 나를 쳐다보는 고양이들의 눈빛을 보며 측은함을 느꼈다. 그 다른 존재들을 보고 나는 왜 이렇게 다른 감정을 느끼는 걸까. 나는 지금도 그 질문 앞에서 맴돈다.
<주토피아2>를 보면 그때가 자꾸 떠오른다. 도시의 바람은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안에 섞여 있는 오래된 편견의 냄새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서로를 향한 경계, 어딘가에 눌러둔 불신, 그리고 말하지 않지만 다 알고 있는 차별의 공기. 영화는 그 공기를 가만히 들추어낸다.
주디는 그 냄새를 누구보다 빨리 맡는 캐릭터다. 빨리 달리고, 빨리 판단하는 토끼가 아니라, 먼저 눈치채는 존재. 어떤 곳에서, 어떤 말 속에서, 어떤 정적에서 비합리의 냄새가 나는지 감각적으로 알아차린다. 반면 우리는 어떠한가. 익숙한 분류표 안에 서로를 욱여넣으며, 그 표가 조금이라도 편리하면 기꺼이 거기에 기대어 버린다. 그러면서도 '나는 차별하지 않아'라는 말로 양심을 다독인다.
영화 속 새로운 갈등 역시 그 익숙함에서 출발한다. 한 번 고정된 관념은 거의 바위처럼 굳어버린다. 흑인을 향한 역사적 폭력도 그랬고, 아시아인을 향한 편견의 오랜 층위도 그렇다. 시대가 달라졌다고 하지만, 편견은 작은 형태로 계속 변주된다. 한국 안에서도 동남아 이주 노동자들을 향한 시선이 완전히 바뀌지 않은 것처럼. 이 도시에서 그 도시로, 그 거리에서 이 거리로, 차별은 얼굴만 바꿔 다시 나타난다.
<주토피아2>는 바로 그 얼굴 바꾸기의 순간들을 따라간다다. 명확한 악당보다 더 위험한 건, '나는 아무 문제 없어'라며 자기 확신으로 굳어진 시민들이다. 실제 차별이 일어나는 순간은 폭력보다도 더 작은 움직임에서 비롯된다. 엘리베이터에서 살짝 몸을 빼는 제스처, 시선을 피하는 방식, 혹은 '그런 애들 원래 그래'라는 무심한 한마디. 영화는 이런 작은 풍경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누구도 악을 자처하지 않는 사회가 어떻게 서로를 해치게 되는지를 조용히 보여준다.
닉은 이번에도 주디의 균형추 역할을 한다. 그는 도시의 냉소를 오래 들이마신 존재지만, 그렇기에 편견의 작동 방식을 깊이 알고 있다. 상처받는 자의 마음을 먼저 읽고, 피해를 가하는 자가 무슨 계산으로 움직이는지도 훤히 본다. 그래서 둘의 여정은 늘 흥미롭다. 주디는 다름의 냄새를 맡고, 닉은 그 냄새가 생겨난 사람들 사이의 동질감을 짚어낸다.
둘이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변화는 가능해진다. 다름을 인정하는 일은 단순히 네가 그런 걸 이해한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구조의 틈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서로의 몸이 어떻게 구겨지는지를 함께 확인하는 과정이다. 영화가 아름다운 건 이 여정이 결코 단번에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번 화해한다고 해서 도시가 금세 유토피아로 바뀌지는 않는다. 진짜 변화는 매번 조금씩, 어떤 날엔 후퇴하며, 어떤 날엔 되돌아오는 방식으로만 진행된다.
나는 영화를 보며 오래전의 경험이 떠올랐다. 편견을 갖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경계심이 몸에 남아 있던 때. 내 안에 숨긴 줄도 몰랐던 거리감이 불쑥 튀어나오던 순간. 그때의 나는 그 감정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동시에 어떻게 없애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 중간 지점에서 머뭇거릴 것이다.
<주토피아2>는 그 머뭇거림 자체를 비추는 영화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일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과 역사의 문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또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그 감정들의 오래된 뿌리를 빼고 새 흙을 덮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걸.
공존에 대한 열망은 있지만, 편견의 습관은 그보다 더 오랫동안 체류한다. 그래서 모두가 잘 사는 유토피아는 늘 한 발짝 멀리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디는 계속 냄새를 맡는다. 어떤 불의가 소리 없이 퍼지고 있는지, 어떤 존재가 밀려나고 있는지, 어떤 말이 누군가의 등을 살짝 밀어 밖으로 내모는지. 그녀의 후각은 때로 단호하고, 때로 서글프다. 주디는 다음에 또 어떤 편견의 냄새를 맡게될까.
말할 수 없던 사람들에게서 세상을 다시 배운다는 것 - <헬프>
비가 그친 오후였다. 집에 앉아 있는데 요리하는 냄새가 서서히 방 안으로 번졌다. 어쩐지 오래전 누군가의 손길이 떠올랐다. 말수가 적었지만 늘 나보다 먼저 밥을 챙겨주던 어떤 이의 손등. 그 사람의 이름을 나는 끝내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사회가 붙여준 호칭 뒤에서 나는 그 사람을 너무 쉽게 하나의 역할로만 기억했고, 그런 찜찜함이 나를 <헬프> 앞으로 다시 데려왔다.
영화 속 미국 남부는 잔잔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흑인 가정부들은 마치 집안의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밥은 차리지만 식탁에는 앉지 못하고, 아이를 키우지만 그 아이가 자신을 어떻게 기억할지조차 알 수 없다. 역할은 있지만 이름은 없다. 친절해 보이지만 결코 대등해질 수 없는 거리, 계급이 아니라는 가면을 쓰고 유지되는 계급. <헬프>가 더 아프게 다가오는 건 이러한 폭력이 큰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자잘한 결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작은 균열을 보여준다. 그 균열의 시작은 스키터다. 백인 청년, 특권의 자식, 그러나 사회의 결과 어딘가 미세하게 맞지 않는 사람. 그는 배운 대로 따라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면서도 그 질감이 낯설고 불편하다. 어쩌면 모든 변화는 바로 그런 작은 감각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스키터가 흑인 가정부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로 결심하는 장면은 동정이 아니라 존중의 선택이다. 그는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 말하려 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게 하는 사람. 그 차이를 아는 태도이기에 그의 움직임은 조용하지만 단단하다.
아빌린이 아이를 안고 속삭이던 '넌 착하고, 넌 똑똑하고, 넌 소중하다'라는 말은 아이에게 건네는 문장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그리고 같은 처지의 여성들에게 오랫동안 반복해온 주문처럼 들린다. 존중받지 못하는 자리에서 존중을 잃지 않는다는 것, 자신을 하대하는 세계에서 누군가를 따뜻하게 돌보는 태도는 약함이 아니라 존엄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사회도 바로 그런 사람들이 밑바닥에서 지켜낸 따뜻함 위에 만들어진 것인지 모른다. 거대한 혁명보다 더 중요한 건 버텨낸 삶들의 총합이니까.
영화가 끝날 즈음 나는 한 가지 생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헬프>는 영웅의 서사가 아니라, 오래도록 ‘보이지 않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지탱해왔는지에 대한 기록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존중했던 단 몇 명의 선택이 역사의 방향을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바꿔왔다는 사실도. 지금 우리가 누리는 변화들 역시 그들이 남긴 온기의 흔적 위에서 가능해진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문득 이런 질문이 따라붙는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고 있는가. 오늘의 사회는 여전히 누군가를 조용한 자리로 밀어 넣고 있는 건 아닐까. 인정받지 못한 따뜻함들이 또다시 사라지고 있는 건 아닐까. 여전히 우리사회에 '헬퍼'들이 다른 이름과 직업으로 존재하고, 그들을 경시하는 풍조는 여전하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들리는 공기의 경계선 - <겟아웃>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주변을 보는데 낯선 표정 하나가 눈에 오래 걸렸다. 누군가를 노려보는 건 아니었지만, 묘하게 굳은 얼굴. 그 사람의 시선을 따라가니 건너편에 동남아 노동자로 보이는 남성이 서 있었다. 이상한 긴장. 아무도 말하지 않았는데 공기만 먼저 굳어 있었다. 나는 그 순간이 종종 무섭다. 표정 뒤에 숨어 있는 감정들, 말하지 않아도 이미 만들어져 버린 거리.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말보다 표정이 먼저 말해버리는 사회. 그런 순간엔 늘 <겟 아웃>이 떠오른다.
이 영화의 공포는 피를 흘리거나 괴물이 튀어나와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너무 친절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인종차별 같은 거 안 해요' , '난 흑인을 정말 좋아해요'. 이런 문장 뒤에 감춰진 기묘한 열광, 과도한 배려, 상대를 ‘특별한 존재’로 올려놓는 방식. 모두 호의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호의는 결국 차이를 더 두껍게 만든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는 눈치챈다. 그들이 좋아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당신이 가진 어떤 속성’이라는 걸. 영화 속에서 백인 가문이 흑인들의 몸을 욕망하는 방식은 노골적이면서도 또 너무 일상적이다. 인간 자체가 아니라, 그 인간에게 덧씌워진 상징을 탐한다. 그 지점에서 나는 한국 사회를 떠올린다.
한국인이면서도 동남아 이주노동자 앞에서는 갑자기 우위를 점하려는 사람들. 필요할 때만 따뜻한 척하다가, 권력이 흔들리면 곧바로 하대를 선택하는 사람들. 또 중국인이나 일본인에 대해 이유 없는 적의를 품고 사는 마음들. 겉으로는 '나라 문제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지만, 그 말 뒤에는 국가가 아니라 ‘사람’을 겨냥한 감정이 숨어 있다. 이런 분위기를 볼 때마다 <겟 아웃>의 미세한 불편함이 스르륵 살아난다. 아무도 대놓고 차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침묵하고, 웃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런데 그 표정들 사이사이에 사람을 분류하고 순위를 매기고 배제하는 감정이 조용히 흘러들어간다.
<겟 아웃>에서 가장 무서운 장면은, 크리스가 느끼는 이상하게 친절한 세계다. 누군가가 나에게 호의를 베푸는데, 그 호의가 왜인지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왜 이렇게 나를 살피지? 왜 이렇게 나를 칭찬하지? 왜 모든 말이 나를 향한 과한 호감으로 덧칠되어 있지? 그 과잉의 온도는 결국 사람을 잡아먹는 장치로 드러난다. 나는 이 장면들이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감각과 닮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차별 안 해요'라는 문장으로 모든 불편함이 덮여버릴 때, 차별은 오히려 더 조용하고 오래 지속된다.
배제는 큰 폭력보다 작은 호흡에서 먼저 시작된다. 지하철에서 살짝 멀어지는 몸짓, 같은 회사지만 다르게 대우하는 손길, 농담처럼 던져졌지만 눌러앉는 말 한마디. <헬프>가 일상의 폭력을 천천히 보여주었다면, <겟 아웃>은 그 폭력이 얼마나 기만적인 친절로도 등장할 수 있는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주토피아2>의 세계처럼, 우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분류표를 들고 서로를 바라본다. 너는 저쪽, 나는 이쪽. 이 구분이 편하니까 계속 쓰는 세계.
영화 속 백인 가문은 결국 흑인의 신체를 ‘업그레이드’의 대상으로 삼는다. 무섭다고 느끼는 순간도 잠깐, 이내 욕망이 덮는다. 그들은 인종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탐한다. 한국 사회의 혐오 역시 그 기묘한 양가성이 있다. 외국인의 힘을 빌리고 싶어 하면서도, 가까워지면 갑자기 불편해한다. 노동은 원하지만 관계는 원하지 않는다. 도움은 받지만 존중은 생략한다. 나는 이런 태도 속에서 <겟 아웃>의 숨겨진 메시지가 더 크게 들린다. 차별은 대놓고 폭력적일 때보다, 이렇게 모순과 자기합리화 속에서 번식할 때 더 끈질기다.
크리스가 끌려 내려가는 장면은 오래 남는다. 몸은 있지만 목소리는 제거된 곳. 보고 있지만 말할 수 없고, 들리지만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그 감각. 이 장면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사회에서 타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느끼는 지속적인 상태 같다. 한국에서도 많은 외국인들이 그 자리에 놓인 채로 살아간다. 말이 들리지 않고, 말해도 귀 기울여지지 않고, 다만 있어주는 기능만 요구받는 자리.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런 질문이 생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누군가를 그 ‘깊은 곳’에 밀어 넣고 있는가. 그리고 그걸 모른 척하고 사는 것은 아닌가. 나조차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향해 과도한 선의를 연기하며, 사실은 그 사람을 편리한 상징으로만 소비한 적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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