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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Oct 12. 2019

건전한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여정의 시작과 끝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오픈 시네마: 영화 <마틴 에덴> (2019)


제76회 베니스국제영화제 볼피컵 남우주연상 수상작이며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오픈 시네마 섹션 초청작인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의 영화 <마틴 에덴> (2019)은 미국 소설가 잭 런던의 동명소설을 20세기 이탈리아 배경에 맞게 바꾸어 고친 작품이다. 시대 배경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밝히자면, 이 영화는 이탈리아의 불안을 대변하는 1870년대에서 출발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4년으로 끝난다. 1870년대 이탈리아는 통일을 했지만, 불완전한 통일로 인해 공업 중심 북부와 농업 중심 남부 간의 경제적 격차가 극심했을뿐더러, 로마 교황청이 이탈리아의 통일을 인정하지 않아 국가 자체가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마틴 에덴(루카 마리넬리)’이 작가로 성공하고자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부르주아가 밀집한 도시를 떠나 남부 지역으로 내려간 장면과 그의 스승인 ‘브리스덴(카를로 세키)’이 성경에 숨겨놓은 권총으로 자살할 것임을 암시하는 장면으로 1870년대 이탈리아를 함축해서 보여 준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먹고살기 바쁜 노동자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강제 징집하려는 국가와 이에 반발하는 글이 담긴 벽보를 클로즈업으로 담아낸 장면으로 영화가 마무리될 때 시대상을 드러낸다. 



마틴 에덴의 삶의 시작과 끝은 영화 속 시대적 흐름과 맞물려 있다. 마틴 에덴은 어느 날 부르주아 계급인 ‘엘레나(제시카 크레시)’를 만나 작가로서의 삶을 꿈꿨을 뿐만 아니라, 불안한 시국임에도 가난을 극복하고 진정한 부르주아로 거듭나겠다는 사회 신분 상승의 꿈을 갖게 된다. 비록 삶의 모델로 설정한 엘레나가 자신에게 의무교육을 넘어 의무취학을 강요하는, 즉 국가 시스템에 순응하는 삶을 강요하고, 현실을 외면한 이상향만 이야기하지만, 마틴 에덴은 이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는다. 게다가, 적극적으로 흑백 푸티지와 컬러 푸티지를 활용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유명한 작가의 삶과 엘레나와의 행복한 삶을 모두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마틴 에덴의 여정을 그려낸다. 하지만, 스승의 죽음 이후 선박이 침몰하는 푸티지가 삽입되면서 여정의 어두운 결말이 가시권 안으로 들어온다. 마틴 에덴은 본인과 같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피상적인 목적과 이유만으로 전반적인 개혁과 더불어 격렬한 사회주의 운동을 펼치는 광경을 보며, 그리고 보수주의자와 자본주의자가 내놓는 모순적인 논리와 태도를 지켜보며 환멸을 느낀다. 더 나아가, 작가로서 성공했지만, 자기 책의 심층에 깔린 의도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채 열렬히 환호하는 군상을 보며 같은 민족으로부터 배신감을 느낀다. 



후반부에서 마틴 에덴은 신간을 소개하는 기자 회견장에서 마틴 에덴이라는 인물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대중들은 이를 농담으로 받아들이지만, 사실 이 고백은 건전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없는 고국의 상황을 저격하는 말이자 지금까지 이어간 여정을 포기하는 선언이다. 마틴 에덴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어디론가 향하는 젊은 시절 자기 모습의 환영을 창문 밖으로 보게 된다. 환영을 급하게 따라간 중년의 마틴 에덴은 바닷가에 도착한다.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는 전쟁의 공기가 짙게 깔린 이탈리아를 뒤로 한 마틴 에덴의 시선은 오로지 바다에만 쏠려 있으며, 그의 시선은 초반부에 버즈 아이 뷰 숏으로 포착된 프롤레타리아의 암담한 현실에 지친 동료의 공허한 시선과 중첩된다. 영화는 끝나기 전 총명함을 잃은 텅 빈 눈으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뛰어 들어가 헤엄치는 마틴 에덴의 모습을 담는다. 바다로 뛰어 들어간 마틴 에덴의 모습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을 아틀란티스처럼 사라졌지만 어딘가에 있을 거로 여겨지는 낙원에서라도 달성하겠다는 절박한 심정이자 마지막 발악을 의미한다. 이는 맥락상 장 비고 감독의 영화 <라탈랑트> (1934)와 레오 까락스 감독의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1991)의 결말을 연상시키면서도, 두 작품보다 더욱더 짙게 깔린 번민의 감정은 배반의 역사 속 개인의 삶을 처량하게 포착한다.  



* 해당 글의 원문은 아트렉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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