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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Feb 28. 2018

이기적인 성스러운 사슴 죽이기 <킬링 디어>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기 위한 ‘대속(代贖)’, 폭력적인 균형 잡기


유예기간 45일 안에 사랑하는 짝을 찾지 못하자는 유죄이기 때문에 동물이 되어야 한다는 특이한 설정으로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사랑의 허구성을 다룬 <더 랍스터> (The Lobster, 2015)로 한국에서 점차 많은 관심을 받은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킬링 디어> (The Killing of a Sacred Deer, 2017)라는 새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그리스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작가주의 감독인데, 놀라운 점은 할리우드 자본이 투입되고 유명 배우들이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 랍스터>뿐만 아니라 <킬링 디어>에서도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잃지 않고 철학적인 사유를 굉장히 심오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킬링 디어>는 에우리피데스가 쓴 희곡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모티프로 삼고 있으며 원제 'The Killing of a Sacred Deer'는 큰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하는 아가멤논의 비극을 떠올리게 만든다. 하지만 희곡과 달리 <킬링 디어>는 끊임없는 카메라 무브먼트, 귀를 거슬리게 하는 사운드, 그리고 감정이 삭제된 듯한 톤을 통해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부모의 슬픔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그래서 현대사회로 넘어온 '성스러운 사슴 죽이기'는 굉장히 이기적이며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기 위한 '대속(代贖)'은 대단히 끔찍하고 폭력적인 균형 잡기로 보이게 만든다.



인간은 죄를 짓기 마련이고, 누군가는 죄를 지은 사람을 심판한다.


<킬링 디어>의 오프닝 시퀀스는 한동안 암전 상태였다가 수술대 위에서 박동하는 심장에서 죽은 심장을 떠올리게 하는 쓰레기 통에 버려진 수술 장갑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는 성공한 심장전문의 스티븐(콜린 파렐)이 과거에 술을 몇 잔 마시고 수술하다가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의료사고를 저질렀음을 설명한다. 수년이 지나 죽은 환자의 아들 마틴(배리 케오간)이 스티븐 앞에 나타난다. 처음에는 스티븐은 마틴에게 시계 선물을 해주면서까지 잘해주려고 노력을 하지만, 점차 만나는 횟수가 증가하자 그는 마틴이 자신을 옥여 바싹 죄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멀리하려고 한다. 하지만, 마틴은 끈질기게 스티븐과 그의 가족 주변을 서성거린다. 그리고, 어느 날 마틴은 스티븐에게 네 가지 저주를 경고한다. 첫 번째는 사지가 마비되고, 두 번째는 거식증이 진행되고, 세 번째는 두 눈에 피가 흐르고, 마지막에는 죽게 될 것이라고 한다. 스티븐은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 구성원들이 전부 다 죽는 것을 막기 위해 누군가를 선택해 죽여야만 한다.



이 순간 누가 스티븐을 심판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사용된 시점 쇼트와 극단적인 부감 쇼트를 미루어 볼 때 신이 스티븐을 심판한다고 볼 수 있거나, 전지전능한 능력을 소유한 마틴이 스티븐을 심판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마틴의 존재가 의심스럽게 다가온다. 과연 마틴은 그저 전지전능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아이인지 아니면 인간의 형태로 존재하는 신인지 의문을 던지게 된다. 스티븐의 딸 킴(래피 캐시디)을 오토바이로 집에 바래다준 다음 어둠 속에서 그의 집을 응시하는 모습, 앞으로 벌어질 상황들을 예언하는 모습, 그리고 애나(니콜 키드먼)가 지하실에 묶인 마틴의 양 발에 키스하는 모습을 고려해 보면, 마틴은 후자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특히, 마틴을 보여주는 장면은 줌 인을 통해 그려지는데, 이는 마틴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심판하는 느낌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마틴이 스티븐을 심판하려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아마도 마틴은 고통을 균형 잡기 위해 그를 심판하려고 한 게 아닐까 싶다. 스티븐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으니, 마틴은 똑같이 그의 가족 구성원을 죽임으로써 고통의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마틴이 스티븐의 팔에 상처를 입히고 바로 자신의 팔을 물어뜯음으로써 균형을 맞추는 장면에서 명확해진다.



<더 랍스터>는 사랑을 시스템 안에 가뒀다면, <킬링 디어>는 가족을 시스템 안에 가뒀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전작 <더 랍스터>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커플 메이킹 시스템 안에 가둬 통제한다면, <킬링 디어>는 가족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다루고 있다. 혈연의 정이 소거되고 그저 건조하게 그려진 스티븐의 가족은 수직적 계층으로 구성된 집단처럼 보인다. 마치 스티븐은 가족이라는 시스템을 다스리는 왕, 애나는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남편의 말을 따르는 왕비, 킴과 밥(써니 술리치)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이 제물이 되겠다는 자식으로 그릴 수 있다. 킴은 자신이 가족을 유지하는 제물이 되기 위해 피를 흘리면서까지 몸을 질질 끌며 집에서 나와 죽음을 맞이하려고 하고, 밥은 그동안 스티븐의 말을 듣지 않고 자르지 않던 머리카락을 자르면서까지 아버지에게 자신이 제물이 되겠다고 나선다. 애나는 신의 뜻을 거역할 수 없으므로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다만 누가 제물이 될지는 왕처럼 군림하는 스티븐이 궁리한 방법을 따르겠다고 의사 표현을 한다. 일반적인 가족이라면 부모가 자식 대신 희생하겠다고 나서지만, 스티븐의 가족은 오로지 가족이라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다. 가족 간의 정과 사랑이 배제된 대속(代贖)은 확연히 올바른 구원과 멀어지고 불행한 일로만 여겨진다.



어른의 나약함과 사악함이 드러나는 이기적인 성스러운 사슴 죽이기


자발적으로 제물이 되겠다는 아이들과 달리 어른들은 나약한 면모를 보인다. 결정권을 지고 있는 스티븐은 자유 의지를 포기한다. 우선, 그는 학교를 방문해서 교장과 함께 학부모 면담을 한다. 그는 교장으로부터 딸과 아들이 학교에서 어떤 학생이었는지 듣다가 교장에게 둘 중에 누가 더 가치가 있는지 물어본다. 스티븐은 가족이라는 체제 위에서 군림하는 위치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건 자신의 위신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보다 나약한 존재라는 걸 보여준다. 어른의 사악함이 드러나는 장면은 누가 제물이 '성스러운 사슴'이 될지를 러시안룰렛과 비슷한 방식으로 운에 맡기는 장면이다. 스티븐은 얼굴을 가린 채로 소파에 결박된 가족 구성원처럼 자신의 얼굴을 가린 다음 빙빙 돌다가 방아쇠를 당긴다. 스스로 선택의 권리를 포기하고 그냥 운에 맡기는 스티븐과 자식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애나의 침착한 자세에서 사악함이 드러난다. 이들의 모습은 Shirley Jackson의 'The Lottery'를 연상케 한다. 물론, 'The Lottery'는 신에게 농사가 잘되게 해달라고 비는 목적으로 추첨을 통해 죽일 사람을 정한다는 점에서 <킬링 디어>와 차이점이 있지만, 오로지 운에 맡긴다는 점에서 이들은 소름 돋을 정도로 끔찍하고 사악하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자식 한 명이 제물로 바쳐지자 스티븐의 가족은 마틴이 내린 저주에서 풀렸다. 하지만, 비극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의 가족은 전혀 슬픔에 잠겨 있지 않는다. 오히려, 스티븐과 마틴이 자주 만났던 레스토랑에서 만나 서로를 확인하고 가게에서 나선다.


 

스티븐은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직접 치르지 않고 누군가가 대속하게 만든다. 덕분에 그는 가족이라는 시스템을 유지했지만 가족 구성원 간의 관계는 분명히 예전만 못할 게 당연하다. 그러므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현대화한 대속(代贖)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시작해 비극으로 끝맺음을 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감독이 그려낸 인간의 나약함, 사악함, 그리고 이기심에 충격애 빠질뿐더러 현대인은 과연 죄의식을 갖고 살고 있는지 혹은 상실한 상태로 살고 있는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 관람 인증

1. 2018.02.24 (제7회 마리끌레르 영화제)

2. 2018.07.15 (더스페셜패키지 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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