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르너바시 토트 감독의 <살아남은 사람들>(2019)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1993),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2002), 라즐로 네메스 감독의 <사울의 아들>(2015) 등 홀로코스트 시절의 삶을 다루는 영화가 꾸준히 제작되어 왔다. 그러나 버르너바시 토트 감독의 <살아남은 사람들>(2019)은 이전 작품들과는 결이 다른 시대극이다. 1948년부터 스탈린이 사망한 1953년 사이의 시기를 배경으로 삼은 <살아남은 사람들>은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후 삶에 중점을 두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서 주요 인물은 산부인과 의사 알도(카롤리 하이덕)와 16세 소녀 클라라(아비겔 소크)이며, 두 사람 모두 홀로코스트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알도는 홀로코스트 때문에 아내와 딸을 잃었고, 클라라는 전쟁 포로로 잡힌 부모의 행방을 모른다. 나이 차는 상당하지만, 두 사람은 이를 극복하고 친구이자 가족 같은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는 그들에게 잊고 있던 삶의 따뜻함을 안기고, 상처 입은 영혼을 보듬어주는 힘으로 발전한다.
버르너바시 토트 감독은 클라라의 시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그려낸다. 어른이 아닌 자의 시선이 작품의 핵심인 경우는 드물지 않다. 최근 사례로 2021년 1월에 개봉한 무니카 시멧츠 감독의 <나의 작은 동무>(2018)가 있다. <나의 작은 동무>는 여섯 살 렐로(헬레나 마리아 라이스너)의 눈을 빌려서 스탈린주의 때문에 경직된 에스토니아의 1950년대에 접근하고, 당시의 비극을 부각한다. 그렇지만 <살아남은 사람들> 속 16세 클라라의 시선은 다른 역할을 한다. 경직된 사회에서도 꺼지지 않은 순수와 같은 그녀의 시선은 ‘살아있다는 것’의 의미를 일깨우고, 관계에 내재된 치유력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작용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영화는 신생아 출산을 돕는 알도의 일상적인 근무로 시작한다. 그는 아버지가 된 남성을 축하해주고 진찰실의 문을 연다. 그리고 페이드아웃이 되는 찰나에 카메라는 희미한 미소 뒤에 숨겨진 알도의 고독을 포착하며 세상을 떠난 사람보다 생존자의 삶이 더 힘들다는 점을 보여준다. 페이드인이 되고 1948년 9월 어느 날, 알도의 일상에 클라라가 나타난다. 알도에게서 익숙한 침울감을 감지한 클라라는 그를 따라다니고, 심지어 그의 집에 들어선다. 부엌에서 계속 투정을 부리던 클라라는 알도에게서 냉철한 말 한마디를 듣는다. 클라라는 토라지기는커녕 그를 포옹한다. 부모님의 부재로 인한 슬픔과 분노를 지우고 싶어 하는 클라라의 처절한 몸짓일 테다.
클라라가 이렇게까지 행동하는 연유를 이해한 알도는 심경의 변화를 보였고 그녀를 보호하기로 결심한다. 우선 그는 두 사람의 관계를 오해한 고모할머니께 정중히 연락을 드려서 상황을 해결하고 클라라의 수양아버지가 된다. 이제 클라라에게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악몽을 꿨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클라라는 고모할머니와 알도의 집을 오가며 생의 활력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점차 회복한다. 알도도 마찬가지로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 게다가, 두 사람은 또 다른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손을 건네며 연대한다. 알도는 진찰 중에 갑자기 눈물을 흘린 예르제베트(카탈린 심코)의 상황과 심정을 은연중에 인지한다. 그래서 알도는 그녀에게 연락해 만났고, 두 사람의 관계는 상처를 숨기지 않는 진솔한 사이로 발전한다. 무엇보다 알도는 그 관계를 매개로 예르제베트에게 클라라가 일깨워준 정애(情愛)의 치유력을 나눈다. 클라라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부모를 잃은 어린 소녀들이 기댈 수 있는 언니가 되어준다. 왜냐하면 클라라는 고모할머니를 만나기 전에 고아원에서 생활했고, 어린 소녀들이 내색하지 않은 상처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주변에 있는 살아남은 사람들을 만나고, 생존자들은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함께 극복해 간다.
그런데 <살아남은 사람들> 안에는 서스펜스가 지속해서 작동한다. 이는 스탈린주의의 영향 아래에 있었을뿐더러 마티아스 라코시 공산정권의 숙청이 자행되고 있었던 헝가리의 시대상을 환기하기 위함과 유관하다. 곳곳에 도청 장치가 심어졌고, 이웃 사람은 알도를 포함한 다른 주민의 우편물을 뒤지며 공산당에 밀고할 자를 찾아다닌다. 학교 선생님은 알도가 클라라와 원조 교제를 한다고 의심하며 두 사람의 관계를 위협한다. 또한, 가족을 보호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공산당에 입당한 알도의 지인은 당에서 내린 명령 때문에 알도를 포함한 동료 세 명을 감찰하고 보고해야 하는 상황을 털어놓는다. 하지만 버르너바시 토트 감독은 서스펜스를 형성하되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연대와 사랑으로 긍정적인 앞날에 도달하는 과정을 그려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다시 한번 페이드아웃과 페이드인을 통해 1953년으로 넘어온다. 1948년의 문을 열었던 알도는 이번에 1953년의 문을 연다. 그런데 카메라가 포착한 그의 표정에서는 1948년과 달리 고독감이 사라지고 온화함이 묻어있다. 알도, 클라라, 예르제베트, 페페(버르너바시 호르케이), 그리고 알도와 함께 근무하는 간호사는 클라라의 고모할머니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근데, 라디오에서 스탈린이 3월 5일에 사망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고, 그 순간 알도는 조용히 화장실에 간다. 무언가를 느낀 클라라는 그를 따라간다. 알도가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화장실에서 나오지만 클라라는 그의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눈치챘고, 그를 위해 화장실에 들어가 자리를 피한다. 부엌에 사람들이 다시 모이자 고모할머니는 “이 자리에 없는 그리운 이들을 위해 건배하자”라고 말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잔을 든다. 이때 카메라는 클로즈업이 아닌 되레 트랙 아웃을 하며 그 순간을 담아낸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인물들의 중요한 순간에 카메라는 관망할 수 있는 위치로 물러난다. 어두운 거리에서 클라라와 알도의 연(緣)이 시작되었을 때 카메라가 하이 앵글 숏의 위치로 이동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울러 극적으로 형성되는 카메라와 인물 간의 거리는 중요한 일순(一瞬)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배려이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트랙 아웃으로 확장되는 프레임의 여백은 관객에게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은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이들을 기억하는 감각’이라는 점을 불러일으킨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버스 창문 너머로 바깥을 바라보는 클라라의 리액션 숏으로 끝나는데, 클라라와 스크린 밖에 있는 관객이 창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이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역사가 현재 진행형임을 이야기하고, 더 나아가 <살아남은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겪는 현대인에게도 대입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 개봉 전에 배급사 알토미디어(주)에서 제공한 스크리너로 관람한 후에 작성한 글입니다.
※ 해당 글은 아트렉처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artlecture.com/article/20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