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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문보 Apr 13. 2021

상처와 치유의 로드 무비, <피넛 버터 팔콘>

타일러 닐슨 & 마이크 슈왈츠 감독의 <피넛 버터 팔콘>(2019)


영화사에서 장애를 소재로 하는 영화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중간에 불의의 사고나 원인 불명의 질병 때문에 후천적으로 장애인이 된 주인공에 관한 영화다. 대표적인 예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 줄리안 슈나벨 감독의 <잠수종과 나비>(2007) 등이 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복싱 선수 매기(힐러리 스웽크)는 경기 도중 상대 선수의 반칙 때문에 척수를 다쳐 전신 마비 장애인이 되었고, <잠수종과 나비>에서 장 도미니크 보비(마티유 아말릭)는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왼쪽 눈꺼풀을 제외하고 전신이 마비되는 락트-인 증후군(locked-in syndrome)을 앓는다. 이와 같은 장애 관련 영화는 주인공이 주변 사람의 실질적인 변화를 일으키기보다 스크린 밖에 있는 관객들이 안락사와 같은 사회 이슈의 담론에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또 다른 하나는 선천적인 장애를 겪는 주인공을 다루는 영화이며, 정윤철 감독의 <말아톤>(2005)이 이에 해당한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윤초원(조승우)은 마라톤 선수가 되어 춘천 마라톤에 참가한다. 초원이 만들어낸 운동성은 그의 의지와 욕구를 억압하던 주변 사람들의 편협한 인식을 허문다. 타일러 닐슨과 마이크 슈왈츠 감독의 <피넛 버터 팔콘>(2019)은 후자의 갈래로 분류할 수 있다. 주인공 ‘잭’을 연기한 잭 고츠아전은 실제로 다운증후군 장애인이다. 영화에서 잭(잭 고츠아전)의 목표는 솔트 워터 레드넥(토마스 헤이든 처치)이 운영하는 레슬링 학교가 있는 에이든으로 향하는 것이다. 잭의 여정에서 레슬링에 전혀 관심이 없는 어부 타일러(샤이아 라보프)와 보호소 직원 엘리너(다코타 존슨)가 얼떨결에 합류하게 되고, 잭은 본인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인간적인 성숙을 이끌어낸다.



미국 청소년 문학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기반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한 <피넛 버터 팔콘>은 장애인 영화인 동시에 진정한 나를 찾는 로드 무비이기도 하다. 보통 로드 무비는 개인적인 영역에 머무르고 있고, 일련의 에피소드가 길 위에서 펼쳐진다. 심지어 역사적인 영역으로 확장되었던 스와 노부히로 감독의 <바람의 목소리>(2020)의 경우에도 하루(모토라 세리나)가 경험하는 사건 모두 길 위에서 진행된다. 그렇지만 <피넛 버터 팔콘>의 로드 무비는 도로가 아니라 물길에서 일어난다. 잭은 타일러와 엘리너와 함께 뗏목을 타고 길이가 130km인 팜리코사운드(Pamlico Sound) 호수길을 따라 에이든으로 내려간다. 더 나아가, <피넛 버터 팔콘>이 그려내는 여정에서 중요한 건 ‘물’이라는 속성이다. 타일러가 어떤 소년의 못된 장난으로 물에 빠진 잭을 구하면서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동행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옥수수밭처럼 육지로 이동할 때마다 비가 내린다. 이처럼 주요 무대가 호수길(혹은 물길)이므로 엔딩 시퀀스에서의 ‘Welcome to FLORIDA’ 표지판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로드무비와 다르게 도로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안내판이나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건축물 및 기념물을 찾을 수 없다. 즉, 잭, 타일러, 그리고 엘리너의 여정에는 풍경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와 같은 사실은 <피넛 버터 팔콘>의 카메라가 세 인물의 물리적인 시간이 아닌 내면적인 시간을 찍고 있음을 의미한다. 요약하면 <피넛 버터 팔콘>은 지리적인 개념을 제거함으로써 세 인물이 어딘가를 돌고 돈다는 인상을 남기고, 그들이 내면의 여행 끝에서 무엇을 찾는지 따라가는 로드 무비다.



<피넛 버터 팔콘>에서 잭, 타일러, 그리고 엘리너는 ‘트라우마’와’ ‘결핍’이라는 키워드를 공유하며 관계를 형성한다. 2년 반 전에 가족에게 버림을 당한 잭은 노스캐롤라이나 소재 보호소에서 생활 중이다. 플래시백 장면은 없었지만 잭의 대사를 상기하면, 그의 가족은 오래전부터 다운증후군 장애인인 잭이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바람을 숨기지 않았음을, 그리고 잭은 이 모든 게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잭은 매일 레슬러 솔트 워터 레드넥이 등장하는 비디오테이프를 보면서 그를 직접 만나 피니셔 기술을 배워 영웅이 되겠다는 꿈을 갖는다. 그런데 이때 잭이 말하는 영웅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극 중에서 잭이 ‘생일 파티’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한다. 잭은 영웅이 되어야만 생일 파티를 열 수 있다고 믿으며, 생일 파티에서 주변 사람들의 축하를 받는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가족에게 배신을 당한 상처와 애정 결핍을 고려하면, 잭은 다시 태어날 힘을 지닌 ‘나 자신을 위한 영웅’이 되어 자신을 소중하다고 생각해주는 새로운 가족 앞에서 본인의 탄생을 축복받고 싶어 한다. 타일러는 몇 년 전 음주 후 졸음운전으로 사랑하는 형을 잃었다. 본인의 잘못으로 형이 죽었기에 타일러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을뿐더러 여태껏 ‘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호를 받았던 타일러에게는 남을 돌보는 능력이 결여되었다. 이는 타일러가 몸만 어른일 뿐인 이유이기도 하다. 혹은 타일러는 형의 빈자리를 대면할 용기가 없어서 어른이 되는 걸 스스로 포기하고, 화가 나면 주먹을 먼저 날리고, 호감이 가는 이성 앞에서 철부지처럼 행동하는 등 10대 소년처럼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엘리너는 과거에 남편과 사별한 아픔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남편과의 이별을 심리적으로나마 미루고 싶은 엘리너는 잭이 지내는 보호소에서 임종을 앞둔 노인들의 곁을 자원해서 지켜주는 일을 함으로써 상실과 트라우마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 게다가, 엘리너는 팔에 문신 ‘J’를 새기며 남편과의 사별을 부정한다.



이렇게 각기 다른 트라우마를 경험한 세 사람은 같이 움직이며 치유의 과정을 밟는다. 그러나 세 사람의 치유는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잭은 타일러와 엘리너가 삶의 정수에 도달하도록 인도하고, 타일러와 엘리너는 잭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목적지까지 일행하는 상호 보완적인 방식으로 이뤄진다. 근데, 이와 같은 특징은 <피넛 버터 팔콘>이 그려내는 여정의 핵심은 아니다. 세 사람이 떠나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위에서 언급한 트라우마로부터 도망쳤던 이들이 다시 그 앞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잭은 본인 입으로 자신이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트라우마적 상황으로 돌아온다. 심지어 보호소에서 자신이 들었던 ‘저능아(retard)’라는 단어를 내뱉어야 하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하지만 이런 트라우마적 상황을 외면하지 않자 아이러니하게도 잭은 자기 존재를 인정해주는 소중한 사람들을 만난다. 타일러는 형이 없는 빈자리로 돌아왔으며, 잭과 함께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경험하면서 형이 없는 세계에서 잭의 형 노릇을 하나씩 해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타일러는 한동안 잊고 있던 안정감을 다시 느끼게 된다. 엘리너는 타일러와의 대화 도중에 남편과 사별했다는 사실을 본인 입으로 꺼낸다. 이는 엘리너가 자신의 상실을 비로소 바라봄으로써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며 애틋한 감정을 가꾸는 기회를 부여받는 순간이다. 아마도 남편의 죽음을 부정하려고 새겼던 문신 ‘J’가 타일러와의 사랑을 가리키는 ‘T’로 바뀔 테다. 정리하자면 트라우마를 재경험함으로써 극복한다는 측면에서, 세 사람의 여행은 굉장히 역설적인 성격을 띤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잭은 솔트 워터 레드넥의 도움으로 동네 레슬링 경기에 ‘피넛 버터 팔콘’으로 데뷔한다. 근데, 경기 도중 타일러는 괴한에게 기습적으로 공격을 당하고 페이드아웃이 된다. 페이드인이 되었을 때 공간적 배경이 병원으로 바뀌었고, 그곳에는 엘리너와 잭만 보일 뿐이다. 다시 한번 페이드아웃과 페이드인이 일어났고, 세 사람이 함께 플로리다주에 진입하는 장면이 시작한다. 내러티브 타임만 놓고 보면 심각한 부상을 입은 타일러가 다행히 퇴원해 본인이 정착하고 싶었던 플로리다에서 잭과 엘리너와 새 출발을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내러티브 타임을 낱낱이 분해하다 보면 대단히 이상한 두 개의 숏을 마주하게 된다. 하나는 잭의 공상적인 숏이고, 또 다른 하나는 씁쓸하게 홀로 남은 솔트 워터 레드넥의 숏이다. 대사가 일절 없는 병원 장면에서 엘리너는 고개를 떨구고 있으며, 잭은 오른쪽에 홀로 앉아서 케이크의 초를 분다. 이때 잭과 타일러가 둘만의 비밀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 펼쳐진다. 얼핏 보면 잭이 과거를 회상하는 플래시백 장면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들이 여행의 초반부에서 합의한 악수 횟수는 5회였지만,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의 악수는 4번만 진행된다. 무엇보다 잭이 타일러에게 ‘난 괜찮을 거야’라는 말을 건네자 비가 내린다. 그리고 이 모호한 숏에 레슬링 경기 후에 혼자 남은 솔트 워터 레드넥의 숏이 맞물린다. 두 가지 숏을 종합하면, 갑작스러운 사고로 솔트 워터 레드넥은 세 사람과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했고, 타일러는 병원에 이송되었으나 회복하기 힘든 상태에 빠졌다고 유추할 수 있다. 아울러 미스터리한 비밀 악수 장면은 잭의 플래시백이 아니라 타일러와 작별하기 위한 잭의 공상적인 숏이고, 그 숏 안에서 내리는 비는 잭이 흘리는 작별의 눈물일 테다. 그러므로 플로리다행 차 안에 있는 타일러는 실재로서의 타일러가 아니라 잭과 엘리너가 감지하는 그의 영혼이다. 그럼에도 <피넛 버터 팔콘>은 해피 엔딩의 영화다. 왜냐하면 타일러는 잭을 만나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엘리너는 더는 은둔하지 않고 진정한 행복을 느끼며 인생 제2막을 열었고, 잭은 본인의 존재를 소중하게 여기는 새로운 가족을 만나 꿈을 이뤘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세 사람의 동행은 내면적인 시간의 흐름 안에서 영원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플로리다에 진입했을 때 잭이 타일러의 영혼을 깨우고, 잠에서 깬 타일러의 영혼이 운전하는 엘리너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자 엘리너는 실제로 감각하듯이 그의 손을 어루만진다는 장면이 이를 입증한다. 이처럼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피넛 버터 팔콘>이 답답하고 우울한 일상생활에 한 줄기의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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